51화.
저 멀리 기척을 숨기지도 않고 무섭게 쫓아오는 자들이 있었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으나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여러 가지 준비를 했다. 망토를 훌쩍 벗고, 부츠 안의 단검을 꺼냈다.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높게 묶을 쯤에는 발소리가 더욱 바싹 다가왔다.
로젤린은 단검을 살짝 던졌다가 받으며 손장난을 했다. 날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묘기 같은 손놀림이었다. 그녀는 탁, 탁 손안에 차갑게 떨어지는 일정한 소리를 들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로젤린의 주위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있었다. 칼릭스, 하녀, 집사, 레이몬드, 수습 기사, 하급 기사, 상급 기사, 성의 시종들까지. 그녀는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 속에 있었다. 일반적인 인간 여성, 일반적으로 단련한 인간. 로젤린은 항상 그 기준을 생각하며 넘지 않으려 노력해 왔다. 물론 그 기준이 매우 유해서 다른 이들이 보기에 조금은 이상해 보였을지언정, 그녀는 항상 자신을 억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로젤린을 보는 눈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세 사람이 떠난 이상, 그녀를 묶어둘 만한 금제는 어디에도 없었다.
로젤린은 몸을 빠르게 회전하며 단검을 높이 던졌다. 화살보다 빠르게 날아간 단검은 그녀를 쫓아오던 솔개의 머리에 정확히 박혔다. 그녀는 나뭇가지에 걸린 새의 사체에서 단검을 뽑아냈다. 조용히 침묵하던 숲이 본격적으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땅이 울리도록 강하게 박차고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무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로젤린의 눈이 빠르게 홱홱 움직였다.
‘수는…… 열둘.’
예상보다 적은 인원수였다. 여러 갈래로 찢어 놓은 작전이 어느 정도 유효했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의 모습을 확인하고 걸음을 멈췄다. 나무 몇 그루를 사이에 두고 긴장감이 흘렀다.
로젤린의 눈에 익은 얼굴이 하나 있었다. 맨 처음 습격당할 당시에 기사단장 스타스와 검을 부딪쳤던 자였다. 이 암살자들의 우두머리가 아닐까. 그에게서는 다른 암살자들보다도 훨씬 많은 마력이 느껴졌다. 암살자들을 탐색하고 있는 와중에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황자를 넘기면 네 목숨만은 살려 주마.”
어, 이게 무슨 개소리지. 로젤린은 어이가 없어서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남자는 그녀의 침묵을 다른 방향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더욱 거침없이 개소리를 했다.
“앞서 사지가 찢겨 나간 네 동료들처럼 되고 싶지 않다면, 순순히 입을 여는 게 좋을 거다.”
로젤린은 머리가 띵해지는 걸 느꼈다. 머릿속은 뜨거운 용암이 가득 찼는데, 심장에는 얼음으로 만든 칼날이 박혀 있는 듯했다. 그녀는 들끓다 못해 녹아 버린 머리로 생각했다. 그래 이건 열 받은 거야. 화가 난 거야. 나는 지금 매우 화가 났어. 로젤린은 홀로 고개를 끄덕인 후 입을 열었다.
“너의 다른 동료들은 어디 있지?”
남자의 거칠고 낮은 목소리와는 상반되는 고운 목소리였다. 그는 잠시 말을 잃었다. 지금 태평하게 질문을 건넨 것이 저 여자가 맞는 건가? 생각보다는 담이 강하군. 벌벌 떨면서 도망치지 않는 것만 해도 용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담이 강한 여기사의 말은 이후로도 끊이지 않았다.
“정보를 넘겨도, 목숨은 살려 주지 않겠다.”
“……뭐?”
“다른 곳으로 간 네 동료들은 사지 멀쩡히 죽었겠지만, 너희들은 그렇지 못한다.”
“이 미친년이!”
검은 머리의 기사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너희들 중 그 누구도 이곳을 지나갈 수 없다.”
차분하고 고운 음색이었다. 타이렝은 제 몸을 감싸고도는 오싹한 감각에 몸서리쳤다. 저 온도 없이 창백한 낯빛 때문인가? 딱딱 끊어지는 말투 때문인가? 알 수 없었다. 그저 제 감각이 무수히 경계를 내리고 있었다. 저 기사는 위험해, 위험하다!
“죽여!”
고작 한 명 앞에서 이 무슨 추태냐. 남자는 겁먹은 자신을 추슬렀다. 까닥이는 손짓 한 번에 검은 옷의 무리가 일제히 몸을 날렸다.
그녀의 눈동자는 순식간에 흘러가는 시간을 천천히 되짚었다. 살기가 사방으로 흩뿌려지고 날카로운 검날에 햇살이 부서졌다. 발타의 습격대가 푸른 잎과 함께 쏟아져 내렸다. 로젤린의 손등 위로 굵은 핏줄이 돋았다. 질긴 섬유가 압력을 못 버티고 찢기는 소리가 났다. 찌이익, 그녀의 팔이 부풀어 오르며 제복이 뜯겨져 나갔다. 짐승의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손이었다. 그것은 눈 깜짝할 새에 암살자들의 몸을 갈랐다. 두 명의 암살자가 몸이 찢겨진 채 날아가 나무에 크게 부딪혔다.
“으, 으아악!”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남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동료의 시체를 보고 비명을 지른 것이 아니었다. 여자의 몸에 달려 있는 거대한 손 때문이었다. 팔을 온통 뒤덮은 검은 비늘, 세 갈래로 불거진 손가락, 맹금류의 부리 같은 날카로운 손톱까지. 인간에서 벗어난 기괴한 형태였다. 그 부조화에 본능적으로 거부감과 공포가 치솟았다. 습격대의 단원들은 숨을 헉 들이켰다. 저게 뭐지? 저게 대체! 그들이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그녀의 손이 한 암살자의 머리를 콱 쥐고 들어 올렸다.
콰직!
뼈가 으스러지며 피가 섞여 있는 액체가 검은 비늘을 타고 흘러내렸다. 사과를 으깨는 일보다 손쉬워 보였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하아…….”
그녀는 숨을 내쉬었다. ‘파편’을 막고 있던 마력을 팔의 변이에 운용하다보니 점점 독이 퍼지기 시작했다. 날카롭고 사납게 날뛰는 마독이 그녀의 몸속을 가르며 마구잡이로 파고들었다. 머리가 저릿저릿해질 정도의 고통이었다. 빨리 끝내자. 그녀는 한층 차가워진 낯으로 땅을 박찼다.
“아악!”
“사, 살려……!”
한 번의 손짓에 몸을 가르고, 한 번의 공격에 뼈를 부수고, 한 번의 움직임으로 팔다리를 뜯어냈다. 로젤린은 그 거대한 손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눈치챈 자들이 힘을 모아 공격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빗나갔으나, 운 좋게 스치는 경우도 있었다. 때로는 몸을 관통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로젤린은 멈추지 않았다. 몸에 칼이 박히고서도 변함없는 표정으로 손을 휘둘렀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뛰어다녔다. 악몽 같았다. 아니, 차라리 꿈이 더 현실감이 있을 듯 했다.
그들 또한 크레안 티다니온의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정예 대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앞에서 어떤 가치도 의미도 없이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그들이 결정의 일부를 사용해서 신체를 강화하는 것에 불과했다면, 로젤린은 마수의 힘 자체를 자유자재로 구현하고 있었다.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몇몇의 검날에 발려 있는 ‘파편’이, 깊고 작은 상처를 통해 그녀에게 침투했다. 로젤린은 제 몸을 파고드는 고통을 이기기 위해 소리쳤다. 으아아아! 그녀가 사나운 짐승처럼 울부짖자 일순 산이 소란에 휩싸였다. 새가 날아가고, 그로 인해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거센 바람이 그녀의 비명소리와 함께 숲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고 지나갔다. 맹수와 벌레들이 위협적인 포식자의 싸움에 숨을 죽이며 존재감을 지웠다.
전투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무력의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녹음이 우거진 숲의 정경에 울긋불긋 피가 낭자하게 뿌려졌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시체들은 심약한 이가 본다면 단번에 토악질을 할 정도로 처참하고 참혹했다.
“흐, 흐으으…….”
숨을 쉬고 있는 자는 로젤린이 의도적으로 살려 둔 한 명뿐이었다. 그는 도망친다던가, 검을 들고 대적한다던가 하는 선택지가 없는 듯이 그저 무릎을 꿇고 몸을 떨기만 했다. 로젤린이 몸에 꽂힌 검을 무심하게 뽑아내자 남자의 몸이 흠칫 튀어 올랐다. 깊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로젤린은 대수롭지 않은 듯 피를 툭툭 털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저벅.
한 걸음.
저벅.
한 걸음 더.
그는 급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한참 위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악귀같이 동료의 목을 잡아 뜯던 이 같지 않았다.
“더 쫓아오는 애들 있어?”
“네, 네네! 그, 그렇습니다. 미끼인 걸 확인하고 나면, 하, 합류하기로…….”
“몇 명.”
“여…… 열 하나에, 또 다른 지원 부대가 이십 명 더…….”
남자는 몸의 떨림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녀의 괴물 같은 손은 몸을 가르고 나무를 박살 냈다. 가벼운 도약으로 머리 위를 날아다니기도 했다. 때로는 암기가 공기를 울리는 소리를 듣고 능숙하게 피했다. 하지만 단순히 그 때문에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형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강대한 마력이 온 숲을 채우고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그는 원래부터 미약한 마력을 지닌 마인이었기에 느낄 수 있었다. 검은달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범한 인간이었고, 검은 마석을 이식함으로써 비약적인 신체 능력의 상승을 가져왔을 뿐이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눈앞의 여자가 두려웠지만 경외심이 들기도 했다. 이런 존재를 보리라고, 이런 존재가 있으리라고 어떻게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몇 천 년을 살아온 거목, 폭풍우 치는 바다를 보는 것 같았다. 그 위대함을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그녀는 마치, 마치…….
힐끗 시선을 들어 올리자 피로 물든 부츠가 보였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크레안 티다니온이십니까?”
로젤린은 바닥에 있는 검을 발로 차 올려 공중에 띄웠다. 솜씨 좋게 손잡이를 잡은 그녀는 곧바로 남자의 목을 강하게 내려찍었다. 머리를 바닥에 대고 있던 남자가 피를 토했다. 그녀는 검을 그어서 완전히 머리를 잘라 냈다. 남자의 머리가 데구루루 굴렀다.
“아니.”
로젤린은 차갑게 대답을 내뱉었다. 코에서 흐르는 피를 대충 닦아 낸 그녀는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