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50화 (50/220)

50화.

세상에, 이델라브힘이시여. 리카르디스는 자기도 모르게 신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머릿속에서 또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로젤린의 품에 안겨, 팔을 베고 누워 있는 제 모습이었다.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둘 다 하지 마!”

“예에.”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묶으며 흘리듯 대답했다. 귓등으로도 안 듣는 태도였다. 로젤린은 꿈나라로 떠나 있는 나단과 레이몬드를 보며 나갈 채비를 했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혼란에 빠져 있는 리카르디스에게 말했다.

“잠시 바깥을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놈들과 부딪히면, 응전하지 말고 바로 돌아와.”

“…….”

“경.”

“……알겠습니다.”

그녀의 대답에는 불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혀를 차기까지 했다. 이 기사가 정말…… 리카르디스는 자신의 걱정이 괜한 기우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제발 멀리 가지 말고,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곧바로 돌아와. 급히 덧붙인 말에 그녀는 불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로젤린은 동굴을 벗어났다. 어제와는 달리 화창한 날씨였다. 그녀는 굵은 나뭇가지를 밟으며 높은 언덕으로 이동했다. 몇 번의 도약으로 정상에 도달했다. 나무로 빼곡히 채워진 숲의 정경이 아래에 펼쳐져 있었다.

로젤린은 나무에 등을 기대고 망토와 윗옷을 벗었다. 어깨의 상처가 아물지 못한 채 짓물러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리 인간의 신체라지만 치유되는 속도가 지나치게 더뎠다. 이것도 ‘파편’의 힘인가? 상처에서 피고름이 흘러내렸다. 독은 완전히 퍼져 나가지 못했으나, 해독되지도 못하고 아직까지 어깨에 남아 있는 상태였다. 검은 실핏줄이 상처 부근에 울룩불룩 떠올라 있었다.

‘잘라 낼까?’

로젤린은 단검을 꺼냈다. 그녀는 제 쇄골부터 겨드랑이 아래까지 가상으로 검을 그었다. 왼팔이 통째로 잘려나갈 수 있는 범위였다.

‘아니야.’

출혈이 과하면 위험하다. 흔적이 남는다. 최소한 그가 일라베니아에 도착할 때까지는 피해야 하는 수단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오른손잡이라고 해도 왼팔과 어깨가 통째로 없어진다면, 몸의 균형이 깨질 것이다. 제대로 싸울 수 없는 건 곤란했다. 로젤린은 아쉬운 듯 단검으로 어깨를 긋는 시늉을 몇 번 더 반복했다. 하지만 차가운 금속은 그녀의 몸에 파고드는 대신 막 옆을 날아가던 산새에게 꽂혔다.

일단은 보류한다. 어제보다 ‘파편’이 더 스며들었으나, 아직까지는 움직일 수 있는 수준이었다. 로젤린은 숲 저 너머를 응시했다. 새벽 공기를 실은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로젤린은 킁킁, 소리를 내며 코를 움찔거렸다. 나무 잎과 흙의 냄새 바뀌고 있었다. 발타의 숲에 일라베니아의 냄새가 섞이기 시작했다.

* * *

불을 피울 수 없어서 고기는 날것으로 먹어야 했다. 리카르디스는 꼬질 해진 낯으로 로젤린이 넘겨 주는 생고기를 씹었다. 잇세리온이 보았다면 바닥을 굴러다니며 대성통곡했을 장면이었다.

식사 후에 네 사람은 다시 움직였다. 부츠 자국이 아직 다 마르지 못한 진흙에 새겨졌다. 그들은 빠른 속도로 숲을 스쳐 지나갔다. 새벽의 서늘한 공기는 시간이 흐르며 뜨거워졌다. 작열하는 빛이 잎을 뚫고 찬란하게 내려쬐었다.

로젤린은 귀를 활짝 열어 두었다. 파삭파삭. 일행의 옷자락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찌르르 벌레 우는 소리, 돌풍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리가 뒤섞였다. 로젤린은 그 소리 하나하나를 감지하며 판별했다. 무해하다, 무해하다. 아우우- 짐승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또한 일행을 향하지 않으니, 이 또한 무해하다.

삐이이-

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삐이이, 삐이이. 피이…… 로젤린은 눈을 번뜩였다. 이것은 위험하다!

로젤린은 튀어나온 거대한 나무뿌리를 콱 밟으며 급하게 발걸음을 멈췄다. 다들 로젤린의 행동을 눈치채고 걸음을 늦췄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새만 들을 수 있는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숲속에서 들려오기에는 한없이 낯설고, 인위적인 소리였다. 무언가의 신호가 틀림없었다.

암구호로 이루어져 있기에 내용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이 뒤에 검은 집단이 있으리라는 사실만은 확실해 보였다. 로젤린이 짧게 고심하는 도중에도 새소리와 피리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생각보다 쫓아오는 속도가 빨랐다. 솔개 한 마리가 뱅글뱅글 원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저 짐승이 습격대에게 길을 안내했나? 그녀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놈들이 붙었습니다. 먼저 떠나십시오, 제가 남겠습니다.”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린 리카르디스가 입을 떼기 전, 레이몬드가 먼저 소리쳤다.

“로젤린!”

“어서가, 레이몬드. 거리가 멀지 않아.”

로젤린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리카르디스는 성큼성큼 그녀에게 걸어가 팔을 확 잡아챘다. 로젤린이 압박감에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상처가 있는 쪽이라 통증이 느껴졌다.

“그런 말을 할 시간에 달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빠른 속도로 쫓아오고 있습니다. 제가 저들의 발을 묶을 수 있습니다.”

조용한 숲속에서 적의 존재를 감지한 로젤린. 여기에 있는 그 누구도 그녀가 잘못 들은 거라 의심하지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그저 답답했다. 제 손을 단호하게 밀어내는 손길을 느끼고 있으니, 무언가 뜨거운 것이 목 밑까지 차오르는 것 같았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이라도 꾼 것처럼 가슴이 철렁였다.

“절대, 안 돼. 같이 이동한다, 로젤린 경!”

“전하.”

“이동한다고 했어! 어서 움직여, 로젤린!”

리카르디스는 버럭 소리 질렀다. 쫓아오는 자들이 듣건 말건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이 순간에도 그들은 급격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로젤린은 딱딱한 얼굴을 한층 더 굳히며 리카르디스의 손을 매섭게 뿌리쳤다. 어이없을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파편을 들고 있을 겁니다. 제가 나서야 합니다.”

“파편이 그대는 피해간다던가? 헛소리 말아.”

로젤린이 제 망토를 홱 젖혔다. 흰 제복의 어깨 부분은 찢겨 있었고, 피가 굳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세 남자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설마, 설마…….

“저는 이미 중독되어 있습니다. 진행 속도는 늦지만, 파편이 틀림없습니다.”

가세요, 전하. 로젤린은 리카르디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는 멀거니 서 있었다. 땅이 흔들거렸다. 아니, 그의 몸이 흔들리는 것이었다. 리카르디스의 손은 공기를 잡듯이 허공을 부유하며 그녀에게 나아갔다. 하지만 손길이 로젤린에게 닿기 전, 나단이 급하게 리카르디스의 손목을 붙잡았다.

“가셔야 합니다, 전하.”

단 한마디, 그 한마디 말이 끝나지 않는 악몽이 되어 그를 끌어들였다. 리카르디스는 가슴을 억죄어 오는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저……는 이 길을 벗어나 흔적을 남기며 다, 른 곳으로 걷겠습니다.]

[전하!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하얀밤 기사단, 이델라브힘의 광휘 아래 맺었던 언약대로 목숨을 바쳐라!]

[…황자 전하를 모시고 이곳을 벗어나라!]

[전하, 세티스티아 황녀님께서…….]

[전하, 부디…….]

[전하……!]

전하! 미친 듯 소리를 지르고 울고 있는 말소리가 머릿속에서 마구잡이로 뒤엉켰다. 과거 그를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두 번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자들이었다. 절대 죽지 않는다. 반드시 살아남는다! 나를 대신해 누군가가 죽더라도 이미 그 희생을 밟고 나아왔으니 멈출 수 없다. 죽은 이들의 바람이라 하여, 그들의 희생을 값지게 만드는 것은 나의 승리뿐이라 해서. 그렇게 이곳까지 왔다. 하지만 지금은…….

“로젤린…….”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피로가 갑자기 밀려왔다. 억지로 쌓아 왔던 발밑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흔들려왔다.

“전하…….”

“전하!”

멍한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그 짧은 단어 안에 발걸음을 재촉하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앞에 서 있는 나단과 레이몬드를 쳐다봤다. 그리고 뒤에 서 있는 로젤린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자신의 심장이 찢기던 뇌가 녹아내리던, 갈 길은 정해져 있었다. 하나뿐이었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로젤린이 한 걸음 리카르디스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하얀 손가락이 그의 가슴팍에 닿았다. 어서 떠나라며 밀어내는 손짓이었다. 따뜻했다. 새벽 내내 닿아 있었던 체온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로젤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숨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리카르디스가 있었다.

“나는 멈출 수 없으니.”

리카르디스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긴 속눈썹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아, 반짝반짝하고 예쁘다. 그렇게 생각할 즈음 로젤린은 제 이마 위를 가볍게 누르는 부드러운 감촉을 느꼈다. 서임식 때 리카르디스가 성수를 찍어 줬던 이마의 정중앙이었다. 따스한 기운이 흘러들어 왔다. 마치 따듯한 물속에서 유영하는 것 같았다. 기분이 몽롱해졌다. 로젤린은 눈을 스르륵 감았다.

“그대가 와야 한다.”

로젤린은 눈을 둥글게 휘며 웃었다. 가슴속에 스며드는 환한 미소였다.

* * *

레이몬드는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미소 한 점 없는 그늘진 얼굴이었다. 평소 그가 로젤린을 어떻게 대하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놀라워 할 광경이었다. 울지 않았고 화내지도 않았다.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로젤린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로젤린은 다시 “레이몬드, 빨리.” 하고 그를 다그쳐야만 했다. 레이몬드의 턱 근육이 튀어나오려는 말을 꾹 눌러 참는 듯 움찔거렸다. 그는 빠르게 다가와 로젤린을 아플 정도로 꽉 끌어안았다. 짧은 시간이 흘렀다. 그는 곧 앞서 달려간 리카르디스와 나단의 뒤를 쫓았다.

로젤린은 멀어지는 레이몬드의 등을 바라보았다. 빽빽한 나뭇잎의 틈새로 햇빛이 찬란하게 쏟아졌다. 저 멀리서 레이몬드가 뒤돌아보는 모습이 보였다. 로젤린은 멀리서도 볼 수 있게끔 손을 높이 들고 붕붕 흔들었다. 그는 쓰게 한번 웃고 발길을 돌렸다. 그들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로젤린은 그제야 걸음을 돌려 반대쪽으로 향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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