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48화 (48/220)

48화.

막사 안이 들썩였다.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리카르디스의 작전에 강하게 반대했다. 제 시체를 밟고 가시라, 죽어도 안 된다! 핏발이 번뜩번뜩하게 비치는 것에서 그들의 결의가 느껴졌다. 리카르디스는 쐐기를 박기 위해 누군가의 이름을 입안에 담았다. 바로 옆에 있는 잇세리온과 스타스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소리였다.

[로젤린 경.]

높낮이 없이 잔잔한 대답이 들려왔다.

[예, 전하.]

로젤린이었다. 정확히는 막사의 아래 부분을 들춰, 얼굴만 쏙 들어와 있는 머리통이 대답했다. 그녀의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흙바닥에 펼쳐져 있어 다소 공포스러웠다.

[…….]

[…….]

아, 아까 분명 레이몬드한테 잡혀 갔는데 언제 또 들어와 있었지? 그것도 머리만? 파르딕트와 카일로는 그녀의 집념에 식겁했다. 리카르디스가 유쾌하다는 듯 하하 웃었다.

[스타스 대신 그녀가 날 지킨다. 그렇지 로젤린 경?]

[네. 제가 전하를 지킵니다.]

[호위 인원이 적고 많고는 딱히 상관없지 않나, 경?]

[그렇습니다. 솔직히 움직이는데 방해만 됩니다.]

이것 봐. 그녀도 그렇게 말하지 않나. 리카르디스는 여상한 표정으로 막사 안의 사람들에게 고루 시선을 주었다. 그들은 입만 떡 벌린 채 황당해하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버럭 소리 질렀다.

[안됩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고작 상급 기사 한 명으로……!]

리카리디스가 손을 들어 올려 그들의 말을 끊었다.

[로젤린 경.]

그녀는 몸을 굴려 완전하게 막사 안에 들어왔다. 하얀 제복에 흙먼지가 얼룩덜룩하게 묻어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구석에 있던 거대한 방패를 그녀에게 넘겼다. 중장비 전사인 파르딕트의 방패라 그런지, 로젤린이 들고 있으니 몸 대다수가 가려질 정도였다.

그녀는 물끄러미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부숴버려.]

리카르디스의 농담에 모두들 어허허 웃었다. 하지만 곧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두꺼운 방패가 그녀의 손에서 종잇장처럼 우그러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콰드득, 카앙. 여린 손등 위로 힘줄이 툭 불거졌지만 그녀의 표정만은 온화했다. 점점 더 휘어지던 방패는 완전히 뒤틀리며 결국에는 타앙! 금속이 우는 소리와 함께 두 조각으로 분해되었다. 파르딕트는 방금 제 귀한 방패가 쓰레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크게 충격 받았다.

[더 할까요?]

리카르디스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잇세리온은 어버버,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 제 두 눈으로 뭘 본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조용해진 공간 속에서 말을 이었다.

[그녀가 날 지킨다.]

아까와는 다른 무게를 지닌 말이었다.

[네, 반드시.]

* * *

누가 보아도 불리한 형국이었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비정상적으로 강인한 발타의 습격대를 상대로 필사적으로 싸웠다. 이미 기사단원의 삼분의 일은 차가운 비를 맞으며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큰 부상을 입은 자도, 이미 죽은 자도 있었다.

스타스와 파르딕트는 그 난전의 가운데 끝까지 버티고 서 있었다. 실력과 오랜 경험이 그들을 가까스로 지탱했지만 이미 한계였다. 급소를 스치지 않았다 뿐이지 어디 하나 성한 곳 없이 너덜너덜거렸다. 지키는 자들이 줄줄이 쓰러져 마차로 가는 길이 열렸다. 암살자 중 한명이 빠르게 접근해 흰색 마차의 문을 열었다. 널찍한 내부는 습기만이 가득 차 있었다.

“비어 있습니다!”

쯧, 혀 차는 소리가 났다. 습격대 1조의 조장이었다. 흘러가는 분위기로 보아 이곳에 2황자가 없으리란 것쯤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몇 놈 안 남았으니 마저 처리하고 간다.”

“네.”

“네.”

스타스가 복부의 길게 난 상처를 붙잡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끝인가. 승패는 이미 갈렸다. 그러나 하얀밤 기사단원 중 그 누구도 끝까지 검을 놓지 않았다. 스타스는 덜걱거리는 몸을 이끌고 두 명을 더 베어 내다 어깨를 꿰뚫렸다. 그는 이를 꽉 깨물며 신음을 참아냈다.

“제법 끈질겼다. 일라베니아의 기사여.”

무릎을 꿇은 스타스의 목덜미로 암살자의 검날이 향했다.

쿵…….

검을 내리치려던 손길이 잠시 정지했다. 암살자는 괴이한 소리에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잘못 들었나?

쿵.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무거운 것이 내려앉는 소리가 그들의 귀로, 땅의 진동으로 전해졌다.

쿵!

크고 묵직한 울림에 간신히 땅을 딛고 서 있던 기사단원들이 털썩 주저앉았다. 마치 천둥소리처럼 온 공간이 울렸다. 놀란 새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뭐, 뭐야. 하얀밤 기사단원 뿐만 아니라 검은달의 암살자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쿵, 쿵. 소리는 점점 빨라지고 발밑은 더욱 요동쳤다. 콰드득, 와직. 수백 년 그 자리를 지키던 거목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푸른 잎이 빼곡히 채워진 숲에서 기묘한 움직임이 일었다. 갈대밭에 바람이 불듯이 나무가 하나씩 눕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저, 저게 대체……!”

모두들 경악하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뒷걸음질 치던 암살자 한 명이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 하나를 밟았다. 탁.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검은 형체가 숲의 경계를 뚫고 뛰쳐나왔다.

쿠와아아아아-!

귀가 멀어 버릴 정도의 포효였다. 스타스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던 자의 상반신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스타스의 얼굴 위로 피가 확 튀었다. 눈을 깜박이며 핏물을 시야에서 몰아낸 것은 시간이 조금 흐른 후였다. 그 사이에도 인간의 비명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검은 털과 날카로운 발톱. 일반적인 불곰의 서너 배 크기는 될 법한 거대한 곰이었다. 그것은 사람들을 도륙해 나갔다. 산만한 덩치가 무색할 정도의 빠르기였다. 검은달의 암살자들 또한 자그마한 마수의 결정을 몸에 심고 있었으나,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암살자들은 맹수와 대적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도망가는 자, 전의를 상실한 자들은 곰의 두터운 앞발에 산산조각이 났다.

그런데 왜…… 스타스의 의문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로 인해 끝맺지 못했다.

“다, 단장님.”

바다협곡의 네스터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스타스를 불렀다. 네스터는 검은 곰이 지나가는 길목에 서 있었지만 무사히 귀환했다. 곰이 커다란 엉덩이로 밀어 그를 튕겨냈던 것이다. 그것도 네스터의 옆에 있던 암살자의 머리를 아작아작 씹다 뱉으면서.

아저씨, 길 막지 마시고요. 방해되니까 좀 비키세요. 라는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거슬리는 물건을 치워 버리는 듯한 느낌으로.

이후로도 야수는 몇몇 사람들을 머리나 엉덩이로 슬쩍슬쩍 밀어냈다. 모두 일라베니아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엉덩이가 튕겨낸 방향을 따라 생존자들의 무리로 합류했다. 다들 멍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저 짐승이 검은달의 암살자만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만은 아주 명확해 보였다. 혼란의 와중 스타스는 제복을 찢어 어깨의 상처를 지혈했다.

“부상자들을 수습한다!”

암살자들의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기사단원들은 스타스의 명령에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지금은 공격당하지 않고 있지만, 암살자들이 전부 죽은 후에는 사정이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었다.

비명소리가 멎었다. 흙바닥은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운 좋은 암살자 몇은 달아났다. 검은 짐승은 형형한 눈으로 기사단원들을 쭉 둘러보고는 어슬렁어슬렁 숲속으로 사라졌다. 암살자들이 도망간 방향이었다. 쿵, 쿵. 땅을 울리는 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허…… 허억…….”

단원들은 창백한 얼굴을 한 채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암살자들과 치렀던 전투보다도 두려운 경험이었으나 덕분에 전멸은 피했다.

“단장님.”

파르딕트가 스타스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왔다. 그 또한 허벅지에 대충 천을 둘러 지혈해 놓은 상태였다.

“눈치채셨습니까. 그 짐승.”

스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혼이 쏙 빠져 있어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두 사람은 눈치챘다. 그 검은 곰은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부터 피에 잔뜩 젖어 있었다.

“전하를 뒤쫓아 간 무리도 비슷한 꼴을 당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희에게는 대단한 행운이군요. 검은달 놈들이 그 곰의 돈이라도 떼먹은 걸까요?”

“농담에는 영 재주가 없군, 파르딕트 경. 놈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니 얼른 이곳을 벗어나도록 하지.”

“아니면 먹잇감을 빼앗겼다던가? 새끼를 건드렸다던가?”

“…….”

이후로도 파르딕트는 부모의 원수까지 운운하며 온갖 추측을 해 댔다. 스타스는 그의 말을 받아치며 잡담에 마침표를 찍었다.

“뭔지는 몰라도 소중한 걸 위협하지 않았겠나.”

스타스는 문득 하늘을 올려봤다. 그들 머리 위를 날아다니던 독수리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 * *

타이렝은 상당히 화가 난 상태였다. 초장에 기사단 전원을 전멸시키고 황자를 납치하려던 계획이 자꾸만 틀어지고 있었다. 리카르디스의 계략과 습격대만 공격하는 독수리까지. 아주 재수가 옴 붙은 날이 아닌가. 그는 초조함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서 되돌아가 상황을 마무리 지어야했다. 그러나 세 대의 마차가 있어야 할 장소에서 마주한 광경은, 그의 상상과 다소 달랐다.

“이, 이……!”

타이렝은 주위를 빠른 눈으로 훑었다.

“이런 젠장! 그 망할 놈들이!”

공터에는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차도, 말도, 살아 있는 하얀밤의 기사도. 진흙을 피로 흥건하게 물들이고 있는 시체들만 차가운 비속에 널브러져 있었다. 수십 구의 시체는 대부분이 검은달의 습격대원 이었고, 하얀밤 기사단원의 시체는 고작 넷에 불과했다. 작전 지점으로 돌아온 대원들이 모두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타이렝이 버럭 소리 질렀다.

“찾아서 전부 죽여!”

그는 벌겋게 충혈 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2조를 관리하는 자난의 시체가 보였다. 감이 좋은 놈이었다. 이 웃기지도 않은 계획을 혼자 알아채고 이곳에 남은 듯 했다. 타이렝은 이빨을 으득으득 갈았다.

“……이건?”

타이렝은 시체들 주위로 굴러다니는 작은 유리병을 집었다. 조장들에게만 배급된 발타의 마독, ‘파편’이 담긴 병이었다. 하지만 텅텅 비어 있었다. 필사의 상황이 아니면 꺼내지 않아야하는 무기인데 누군가가 사용해 버린 듯 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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