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타이렝은 목표를 바꾸었다. 마차의 후미에서 달리고 있는 기사단장 스타스가 보였다. 그는 화풀이라도 하듯 날렵한 손놀림으로 단검 하나를 빨간 머리통으로 날렸다.
팅.
하늘에서 날아온 독수리가 날개로 칼날을 퍽 쳐 내었다. 대체 저 깃털은 뭐야?! 강철로 만든 것도 아닐 텐데! 타이렝의 이마에 혈관이 불뚝 올라왔다.
“저 미친……!”
욕설의 대가는 곧바로 돌아왔다. 타이렝의 머리 위로 큰 돌덩이가 쾅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삐이이. 큰 충격을 받은 머리에 이명이 일었다. 정신이 잠시 둔해진 사이 독수리의 공격은 더욱 매서워졌다. 여기저기서 이게 대체 뭐냐며 울분을 토해 내는 소리가 들렸다. 습격대는 수차례의 낙마와 공격을 근근이 버티며 2황자의 흰색 마차를 쫓았다.
그렇게 잘 도망치던 흰색 마차가 갑자기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길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습격 대원들이 미리 작업해 둔 결과물이었다. 느릿하게 달리던 2황자 무리가 하나둘 멈춰 섰다. 타이렝은 으하하 웃으며 승리를 예감했다. 지긋지긋한 술래잡기의 끝이 보이는 듯 했다. 쓰러진 나무 앞에 멈춰선 기사들이 하나 둘 망토를 젖혔다. 그들의 머리 위로 빗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한 명, 한 명. 그리고, 이내 모든 사람의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마치 일부러 보여 주는 것 같았다.
그 무리 사이에 있는 5황자 디에즈를 발견하고 타이렝은 당황했다. 오른쪽 갈림길로 들어갔으리라 예상했던 디에즈가 이 자리에 있다니. 무언가가 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타이렝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본 스타스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신호를 기점으로 디에즈와 함께 기사들의 반절이 되는 인원이 말을 탄 채로 나무를 훌쩍 뛰어 넘었다.
암살대가 눈만 깜박이며 그들을 지켜봤다. 1조의 조장이 머뭇거리다가 타이렝의 옷자락을 툭툭 당겼다. 어쩌면 좋겠냐고 묻는 것 같은데, 타이렝도 환장할 지경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는 남은 기사들과 함께 흰 마차가 있었다. 황자의 안위가 걸려 있는 이 중요한 판국에 호위를 줄이는 미친 짓을 하다니? 타이렝의 뒷골에 섬뜩한 감각이 돋아났다. 설마, 저 안에…… 2황자가 없는 건가? 방금 달아난 무리에 2황자가 섞여 있었나? 아니다. 그 중에 은발 머리는 없었다. 전원이 망토를 벗으며 얼굴을 드러낸 이유는 그 때문인 것 같았다. 타이렝이 으드득 이를 갈았다. 이놈들은 미끼다!
저 마차에 리카르디스가 없으리라는 예감이 들었지만 열어보기 전까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타이렝의 머릿속에서는 2황자가 득의양양 한 낯으로 마차 안에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졌다. 리카르디스의 그림자가 그를 세차게 흔들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려 했지만, 이미 실타래는 잔뜩 엉켜 있었다.
검은 집단은 곧 타이렝의 지시 하에 세 개로 나뉘었다. 이곳에 남을 자, 베이지색 마차를 쫓을 자, 세 개의 마차가 남아 있는 최초의 지점으로 돌아갈 자. 검은달의 대원들은 재빠르게 숲속을 헤치며 사라졌다. 타이렝 또한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2황자를 추격하기 위해 떠났다.
흰 마차를 둘러싼 사람들로부터 비장함이 감돌았다. 남은 하얀밤 기사단은 스타스를 비롯한 삼십여 명으로, 스무 명 남짓한 암살자들보다 많은 숫자였다. 하지만 본격적인 싸움이 일어나기 전부터 스타스는 체감하고 있었다. 고작 이 정도 수의 우위로는 승리를 기대하기 어렵다. 검은 옷을 입은 습격 대원들의 태도에는 어떠한 조급함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기이한 안광을 띠고 있는 눈동자에는 오만함이 서려 있었다. 스타스가 이끄는 이곳에 2황자가 있건 없건 간에 모든 것은 자신들의 뜻대로 돌아가리라 확신하는 듯했다.
스타스는 얼굴의 빗물을 닦아 내며 웃었다. 습격해 온 다수의 인원은 예상치 못한 상황의 연속으로 인해 잘게 흩어지고 쪼개졌다. 그들의 전체 인력과 맞부딪쳤다면 이 자리에서 전멸했을 것이다. 애초부터 패할 것이 분명했던 싸움. 약간의 승산을 더 얻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고래 무덤의 파르딕트와 가을안개의 스타스는 검을 다잡았다. 모두가 이 위험 속에 발버둥 치고 있었다. 심지어는 자신의 하나뿐인 주군, 리카르디스마저도.
마차를 둘러싼 두 무리가 충돌했다.
리카르디스님을 위해!
모든 것은 힉살라의 뜻대로!
* * *
쾅!
검을 던져 버린 로젤린은 적과 몸을 부딪치며 직접적인 힘겨루기를 했다. 검은 복면의 남자가 나무에 처박히며 꿈틀거렸다. 또 다른 암살자가 그녀의 목을 향해 예리한 검을 휘둘렀다.
로젤린은 몸을 깊게 숙여 칼날을 피한 후, 상대의 발목을 휙 잡아채어 들어 올렸다. 그녀의 어마어마한 힘에 남자는 몸의 균형을 잃었다. 로젤린은 그 품으로 한 발짝 깊게 파고 들어가며 팔꿈치로 관자놀이를 세게 찍었다.
퍽.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남자는 다른 암살자에게 날아갔다. 두 남자는 뒤엉켜 데굴데굴 구르더니 그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로젤린은 흙바닥에 떨어져 있는 발타의 검을 집었다. 지금 막 그녀에게 검을 왜 던지느냐, 대체 뭐로 싸우려고 이러냐 하며 타박하려던 리카르디스가 머쓱해하며 말을 바꾸었다.
“심장이 남아나질 않으니 검 좀 그만 버려, 경! 위험하잖아!”
“예.”
그녀는 듣는 둥 마는 둥 설렁설렁 대답하면서 주위를 쭉 살폈다. 세 대의 마차가 있는 넓은 공터. 하얀밤 기사단을 둘러싸고 있는 암살자의 수는 스물이 조금 넘었으나 현재는 반 이하로 줄었다. 하얀밤 기사단 측의 피해는 크지 않은 상태였다. 강력한 치유의 힘을 지닌 신성력 덕분이었다.
피가 분수같이 쏟아지던 머리에서는 상처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팔이 뜯겨 나갈 듯 너덜거리는 상처도 순식간에 아물었다. 습격 대원들의 안색이 점차 파리해졌다. 허벅지를 꿰뚫렸던 기사 한 명이 벌떡 일어나 싸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자난이 다 말하지 못한 채 죽어 버렸지만, 모두가 깨닫고 있었다. 2황자 리카르디스가 이곳에 있다.
베어도 찔러도 죽지 않는 무시무시한 군단이었다. 상처는 생성된 그 순간부터 사라졌고, 흉터 하나 남지 않았다. 죽음이라는 섭리를 무시하는 듯 했다. 저것이 인간의 힘이란 말인가? 두려움에 팔다리가 떨렸다. 크레안 티다니온의 창을 막는 이델라브힘의 방패. 대륙에 널리 퍼진 명성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나를 죽이지는 않을 거다. 그들에게도 신성력은 필요한 것이니까.]
전날 밤이었다. 군사 회의는 밤이 새도록 계속되었다.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리카르디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몇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신성력의 소유자 2황자 리카르디스가 그들의 영역인 발타의 땅 안에 들어와 있는 상황이었다. 하카브 왕자가 이 귀중한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우선 전하를 생포하려는 시도를 하겠지요?]
[그래, 그러니 해독제가 없다는 파편을…… 처음부터 사용하진 않겠지. 초반에 수를 좀 줄여야겠어.]
[단순히 수의 차이로 우위를 점하려 할까요?]
[하카브 왕자가 그렇게 쉽게 나올 리가. 몇 가지 가정은 있었지만 ‘이것’이 내게 확신을 주었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이 훔쳐 왔던 검은 보석을 들어 보였다. 마력이 담긴 검은 돌이었다.
[마인들은 몸 안의 마력을 활용해서 신체 능력을 높이고는 하지. 마력의 양에 따라 그저 신체가 건강한 자부터 마수와 같은 힘을 내는 자까지 다양하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응축된 마력이라면, 글쎄. 대단한 병기가 탄생할 수도 있지 않겠나?]
[……!]
다들 리카르디스의 손에 담긴 검은 보석을 쳐다보았다. 그 작은 돌 안에서 연기가 불안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마수의 결정을 꽉 쥐었다. 뾰족한 파편이 그의 손을 파고 들 듯했다.
[인위적인 마인의 제조라…… 하카브 왕자도 제법 재밌는 짓을 벌이는군.]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그런 간악한…….]
잇세리온의 떨리는 목소리에는 그의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분노, 경악, 공포. 막사 안에 있는 모든 이가 느끼는 공통적인 감정이었다.
[몸에 심는 것이려나. 흠…… 사용법까지는 모르겠군. 어쨌든, 신체 기능이 비정상적으로 증폭 되어 있는 집단이겠지. 보통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지는 싸움이지만 내가 나서면 판도는 달라진다. 신의 가호가 있는 이상 그대들은 쉽게 다치지 않을 테니.]
[너무 무모합니다, 전하!]
[백 명이 넘는 인원을 내가 하나하나 치료해 가며 끌고 갈 수는 없어. 상급 기사들로만 호위 조를 구성한다. 열 명 안쯤이면 적당하겠군.]
잇세리온은 거품 물고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삼천 명이 달라붙어서 호위해도 모자랄 판에 열 명? 심지어 열 명 안쯤이란다.
[스타스 경도 빼고.]
[전하!]
이번에는 스타스도 기겁했다. 기사단장을 떼어 놓고 대체 어쩌겠다는 건지! 모두가 눈을 뒤집고 기함했지만 리카르디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기에 제국의 2황자, 설원의 월계수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가 있습니다. 큰 소리로 말하고 다니지 그래. 그대들의 말대로 하얀밤 기사단의 단장이 2황자를 안 지키면 또 누굴 지키겠어. 그놈들도 똑같이 생각하겠지. 설마? 설마 2황자 곁에 기사단장이 없겠어? 설마 기사단장이 빈 마차를 지키고 있겠어? 분명 생각해 볼 만한 틈이 있지만, 희박한 확률을 걸고 도박을 하지는 못할 테지. 하지만 나는 한다, 그 도박.]
미친 짓이었다. 어느 나라의 황족, 왕족이 제 목을 미끼로 전쟁터에 뛰어든단 말인가. 그를 위해 죽음도 불사할 스타스는 무릎을 꿇으며 그의 명에 불복하겠노라 얘기했다. 물론, 고지식한 기사단장이 이렇게 행동할 것이라고는 예상하고 있던 바라 놀라울 것도 없었다.
정공법으로 싸운다면 전멸이다. 리카르디스는 알고 있었다. 모두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분명 많은 기사들이 죽을 것이다. 리카르디스가 아둔해 보일 정도로 이 방법을 고집하는 이유는 제 사람들의 승률을 조금이라도 더 올리기 위함이었다. 아주 조금 더 이길 수 있는 가능성, 아주 조금 더 살 수 있는 가능성. 본말이 전도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기사가 주군을 지키는 것이지, 주군이 기사를 지키는 게 아니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