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46화 (46/220)

46화.

그 날카로운 소리를 기점으로 일라베니아의 사절단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검을 호기롭게 뽑아 든 기사들이 말을 탄 채 줄행랑을 쳤다. 화려한 장식의 흰색 마차와 그를 호위하는 인원이 왼쪽. 베이지색의 마차와 그를 따르는 호위 기사들은 오른쪽. 습격대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자난은 본능적으로 튀어 오르는 몸을 겨우 억눌렀다. 작전 지점의 공터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세 대의 마차 때문이었다. 남겨진 자들은 어딘가로 달아나지 못한 채 멀뚱히 서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마차 주위를 둘러싸며 엄호했다. 호위 기사의 숫자는 고작 열 명 정도에 불과했다.

자난은 깨달았다. 이들은 버리는 말이다.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라면 부하를 버리는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은가. 2황자의 비정과 비겁함이 엿보였다.

하얀밤의 기사단장은 노련하게 검을 흘려 냈다. 보통 사람이라면 검이나 팔 둘 중 하나가 부러졌을 것이다. 그는 타이렝과 검을 부딪친 이후 곧바로 물러섰다. 타이렝의 이상할 정도로 강한 힘을 경계하는 것 같았다. 기사단장은 곧장 말을 몰아 공터에서 벗어났다.

타이렝과 자난은 기사단장을 주시했다. 리카르디스의 마차가 하얀색이라는 점은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었지만, 그 안에 그 본인이 들어있으리란 확신은 없었다. 황자가 어지간한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제 마차 안에 얌전히 앉아 있지 않을 테니 누군가와 분명 마차를 교체했으리라. 2황자의 수족이자 가장 강한 하얀밤의 검. 가을안개의 스타스. 그가 아니라면 누가 리카르디스를 지키겠는가. 그가 향하는 곳에는 반드시 2황자 리카르디스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추측을 배신이라도 하듯, 기사단장은 왼쪽으로 달려간 흰색 마차를 쫓아갔다. 허망할 정도로 자난의 기대를 배반하는 상황이었다. 어지간한 멍청이가 맞았나 보군.

“1조, 2조는 흰색 마차를, 3조는 반대를 향한다! 4조는 남은 자들을 처리해라!”

타이렝의 목소리에 습격대가 흩어졌다. 2조의 조장인 자난은 대장의 명령에 따라 즉시 흰색마차를 쫓아야만 했음에도 가만히 멈춰서 주위를 둘러볼 뿐이었다. 알 수 없는 묘한 감각이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뭔가…… 무언가가 이상하다.’

어딘가 이질적인 분위기의 기사가 눈에 띄었다. 망토를 쓰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자와 눈이 한번 마주쳤다. 햇빛을 받는다면 푸르게 빛날 녹색의 눈동자였다. 호수의 잔잔한 물결 같았다. 이 상황에 대해 어떤 두려움도, 절망도 느끼지 않는 눈이었다.

기사는 자난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머리를 덮고 있던 망토를 뒤로 넘겼다. 높게 묶은 검은 머리가 드러나며 비에 젖기 시작했다. 여자였다. 사절단의 중요한 인물을 여자 기사가 호위할 리 없다. 확실히 이 공터에 남은 세 대의 마차에서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는 모양이었다.

불안은 괜한 기우였나. 기왕 남은 것, 빨리 정리하고 쫓아가면 될 일이었다.

“4조는 현장을 정리하고 1, 2조를 엄호한다.”

“네.”

“네.”

조원들이 자세를 낮추며 눈에 살기를 띠었다. 마차 주위의 호위 기사들이 긴장하는 기색을 비쳤다.

“전부 죽여라.”

자난의 말에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이 일시에 움직였다. 휘이이, 스산한 바람소리가 일라베니아의 기사들을 덮쳤다. ‘파편’을 굳이 사용하지 않더라도 이 정도의 인원을 없애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자난은 마차의 지붕 위로 훌쩍 뛰었다. 쿵. 하고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챙,

비가 내리는 공간임에도,

쾅!

검과 검이 부딪치며 불꽃이 일었다. 가느다란 금속이 낸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강렬한 소리였다. 자난은 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아까 눈이 마주쳤던 여기사가 보였다. 그녀는 신체가 비약적으로 강화된 검은달과 비등하게 싸우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어깨로 밀쳐 내고 발로 걷어차 거리를 벌리는 둥, 임기응변에 익숙해 보이는 전투 방식이었다. 주위의 다른 남자 기사들이 느리게 보일 정도로 그녀의 동작은 재빨랐다. 태생적으로 힘이 약한 여자만 아니었더라도 더욱 훌륭한 기사가 될…….

콰직! 그녀의 발길질 한 번에 조원 한 명이 날아와 마차에 처박혔다. 자난은 덜컹거리는 마차 위에서 흔들리는 제 몸을 겨우 수습했다. 자난은 여기사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대단히 훌륭한 기사였다.

그녀는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자신에게 향하는 공격 뿐 아니라, 다른 기사들에게 닿는 공격까지 중간에서 계속 쳐 내고 있었다.

‘이런. 나도 모르게 손이 놀고 있었잖아.’

자난은 마차 근처에서 전투 중이던 기사의 등에 칼을 꽂았다 빼내었다. 기사는 피를 토하더니 풀썩 주저앉았다. 비범한 솜씨의 여기사가 흥미롭긴 했으나 쭉 여유부릴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자신도 빨리 2황자를 뒤쫓아야 했다.

자난은 마저 정리하기 위해 마차의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발타에서 시종일관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다니던 고귀하신, 일라베니아의 사절단 나리들을 알현할 시간이었다.

덜컥. 마차의 문이 거칠게 뜯겨나갔다.

하지만 안에는…….

“마차가 비었다!”

당황한 자난의 외침에 반응하듯이 곳곳에서 다른 조원들의 목소리가 퍼졌다. 마차가 비어 있다! 안이 비어 있다! 아무도 없다!

자난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디 갔지? 애초에 비워 두었나? 어째서? 혼란스러워하며 전투를 지속하는 조원들이 보였다. 마차가 비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형성되지 않을 불안한 기류가 조원들을 감싸고 있었다. 자난은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 너른 공터를 쭉 둘러보았다.

아까만 해도 부상으로 바닥을 기고 있던 일라베니아의 기사들이 펄펄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이 등에 칼을 꽂았던 기사 역시 어느새 일어서 다시 싸우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단련했다고 해도 그들은 인간이었다. 위대한 크레안 티다니온의 힘 앞에 한낱 인간이 상대가 될 리 없는 것이다. 무언가 이상했다. 분명히 무언가가 있다! 어쩌면 아까 느꼈던, 제 발목을 붙잡았던 기묘한 불안은 이 때문인지도 몰랐다. 뭐지, 뭐가 있는 거냐? 자난은 빠르게 기억을 더듬었다.

순간 여린 나뭇잎처럼 푸르렀던 눈동자. 그 눈이, 눈빛이 다시금 자난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검은 머리의 기사를 찾았다. 저 멀리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캉, 캉. 금속이 부딪치는 거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자난은 깨달았다. 그녀를 중심으로 뭉쳐 있는 기사들의 전투는 방패 같은 형상을 갖추고 있었다. 해치우는데 급급하기보단, 무언가를 지키기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자난은 그 사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거슬리는 여자 기사의 뒤. 검을 빼어 들고 응전하던 장신의 남자 기사가 다친 동료에게 손을 뻗었다.

“!”

잿빛으로 물들어 있는 숲속에 희미한 빛이 퍼졌다. 피를 멎게 하고 상처를 아물게 하는 생명의 빛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자난이 모를 리 없었다.

이런 미친! 왜 이곳에 황자가 남아 있는 거지? 자난은 소리를 왁 질렀다. 이곳에 2황자가 있음을 알려야 했다.

“여기에……!”

2황자가 있다! 하지만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눈을 빛내며 이쪽을 바라보던 여기사가 한 발을 축으로 크게 돌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거친 움직임에 따라 태풍처럼 원을 그렸다.

쉬익-

섬광이 바람 소리와 함께 쇄도했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보이지 않았다. 쿨럭, 자난은 피를 왈칵 토했다. 자신의 목 아래에 정확하게 검이 박혀있었다. 살기를 미처 눈치채기도 전에 날아왔다. 속도를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이, 이런 말도, 안되, 는…….’

자난의 몸이 털썩, 바닥에 쓰러졌다. 흘러내린 피가 비 웅덩이 사이로 퍼져 나갔다.

* * *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는 흰색 마차가 끊임없이 덜컹거렸다. 말이 달리는 것에 비하면 현저히 느린 속도였음에도 타이렝은 아직까지 마차의 뒤꽁무니만 쫓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이번에는 반드시 잡는다! 습격 대원들이 속도를 내기 위해 말의 옆구리를 힘차게 찼다. 그때였다.

“으아악!”

“왁!”

상공에서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하강해, 발타의 습격 대원들을 퍽, 퍽 치고 지나갔다. 복잡한 시장 바닥에서 사람들을 어깨로 치고 다니는 건달이 연상되었다. 물론 그것보다 몇 배는 아프고 위협적이었다.

두세 사람은 거뜬하게 집어 삼킬 것 같은 거대한 독수리였다. 잠시간 마수가 나타난 거라 생각했지만 타이렝은 그 가설이 틀렸다는 사실을 곧바로 깨달았다. 피아 식별을 할 줄 모르고 눈앞의 모든 걸 파괴하는 마수의 행동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습격대만 주구장창 공격하는 걸 보면 누군가에게 길들여진 게 분명했다. 불시의 기습을 받은 조원이 말을 탄 채로 꼬꾸라지자, 뒤따라오던 대원들도 그에 걸려 연쇄적으로 줄줄이 낙마하고 쓰러졌다. 아비규환의 상황을 적당히 수습하고 다시 쫓아갈 쯤에는 흰색 마차는 또 한참 멀어져 있었다. 아까부터 반복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타이렝이 씩씩거리며 욕을 내뱉었다. 하강하는 때를 맞춰 단검을 던져 보아도 재주넘기라도 하듯 신묘하게 피하고,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까닥까닥거리며 약 올리는 듯한 몸짓을 하기까지! 새 한 마리에 휘둘리는 상황이 이렇게 수치스러울 수가 없었다. 타이렝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신성 제국 일라베니아. 그들의 신 이델라브힘은 인간세계에 현신할 때, 독수리의 모습을 빌렸다고 알려져 있다. 독수리라는 동물 자체가 원체 똑똑하기로 유명했으나, 머리 위를 떠도는 저 날짐승은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위대한 무언가가 독수리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같았다. 진짜 이델라브힘의 사자이기라도 하다는 말인가.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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