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44화 (44/220)

44화.

“고마워. 고생했어.”

그녀는 귀환을 준비하며 분주해진 사람들 사이를 지나갔다. 리카르디스는 측근들과 두런두런 이야기 중이었다. 푸른등불 후작의 대리인 카일로. 기사단장 스타스, 부단장 나단, 비서관 잇세리온과 레이몬드, 호위 기사 헤일과 파르딕트까지. 그들은 막 방을 들어서는 로젤린에게 시선을 주며 대화를 정리했다.

“……아무튼 전달이 잘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부터는 하늘에 맡기도록 하지.”

“네.”

리카르디스는 팔짱을 끼며 턱을 살짝 치켜 올렸다.

“그래. 집에 갈 준비는 다 끝내고 온 거겠지, 로젤린 경?”

“아니오.”

“……그래, 나는 경의 그…… 진솔한 면이 참 보기 좋다고…… 항상 생각해 왔지…….”

로젤린은 주머니에서 검붉은 결정을 꺼내서 리카르디스에게 내밀었다. 그는 그녀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는 조각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건…….”

리카르디스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결정 안에서 연기처럼 움직이는 검붉은 안개. 한 번도 본적 없는 물체였지만, 이렇게 확실하게 보이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이것은…… 혹시, 마력입니까?”

잇세리온이 작게 소리쳤다. 잔뜩 흥분한 목소리였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에게서 검붉은 보석을 받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손가락 한 마디만 한 돌조각이 담겼다.

햇빛을 받으며 빛나는 표면 안쪽에서 검붉은 안개가 스르륵 움직였다. 불길해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아름다워 눈을 뗄 수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조각난 표면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딱딱하고 차가운 돌의 감촉이 느껴졌다. 마력의 결정? 어떻게 이런 게 존재할 수 있는 거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발타가 만들어 낸 것인가? 정확한 사용법은? 용도는? 합성된 독과의 연관은? 리카르디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런데…… 이걸, 대체 어디서 가지고 온 겁니까 로젤린 경?”

잇세리온의 물음에 방안의 시선이 모두 그녀를 향했다. 리카르디스도 보석에서 눈을 떼고 로젤린를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이걸 대체 어디서……?

로젤린은 그들의 열렬한 시선을 슬쩍 피하고 입을 우물댔다. 뭔가 켕기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모두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뭐지, 이번엔 또 뭘 한 거야 로젤린!

“훔쳤는데…….”

마카롱이…… 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로젤린이라도 다른 사람들이 마카롱을 독수리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쯤은 알았다. 그리고 독수리는 지하에 있는 은밀한 장소에 숨어들어 가기 힘들다는 것도.

레이몬드가 허헉…… 하는 신음을 내뱉으며 제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리카르디스는 두 눈을 꾹 눌렀다. 순식간에 피로가 몰려왔다.

“들켰나?”

“아니오.”

“누가 봤을 가능성은?”

로젤린은 곰곰이 생각한 후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목격자가 있다 치더라도 그저 궁내의 수많은 고양이 정도이지 않을까.

“없습니다.”

“그럼 됐어.”

전하! 잇세리온이 입을 떡 벌렸다. 되기는 뭐가 돼!

“하카브 왕자가 눈치챌 경우 일이 크게 번질 수 있습니다, 전하!”

“거기에 이런 검은 조각 많았습니다. 하나 빠진다고…….”

모를 텐데…… 그녀의 말은 작게 흩어졌다.

“로젤린 경!”

잇세리온이 버럭 화를 냈다. 질책을 담은 시선을 마주하니 억울했다. 누구 좋으라고 가져왔는데. 로젤린은 조가비처럼 입을 딱 다물었다. 언제나 무표정했으나 한층 더 부루퉁한 얼굴이었다.

“여기까지 하지, 잇세리온. 어차피 진흙탕 싸움은 예견되어 있다. 보석 하나의 유무로 이제와 크게 달라질 건 없어. 진흙탕에 한 줌의 진흙을 더하면 뭐가 될 것 같나?”

“그, 그렇지만……!”

“그리고 로젤린 경이 목격자가 없다고 했지. 이, 로젤린 경이.”

리카르디스는 눈길로 그녀를 콕 가리키고 있었다. 잇세리온은 제 주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깨달았다.

그녀는 ‘강하다’라는 단순한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나뭇잎, 소리 없이 날아다니는 날벌레의 기척까지 읽어 내는 사람에게 어떤 수식어를 붙여야 좋을까. 잇세리온은 내심 ‘유능하다’ 정도의 평가를 그녀의 이름 석 자 앞에 붙여 두기는 했으나 그마저도 마뜩잖았다.

로젤린이 목격자가 없다고 했다면, 들키지 않았다고 말 했다면 분명 그 말대로일 것이다. 잇세리온은 앓는 소리를 내며 제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어쩔 수 없다. 이걸 다시 돌려놓고 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잠시간 골치 아팠던 기분을 말끔히 떨쳐 버린 듯 했다. 심지어는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검은 결정을 들어 빛에 이리저리 비춰 보았다. 내부의 느릿한 움직임이 차갑고 딱딱한 보석을 살아 있는 생물처럼 보이게 했다. 우리에게는 미지의 세계나 다름없군.

“발타가 동분서주하며 날뛴 덕에 대륙 전체에 마력의 영향력이 짙게 퍼져 있는 상황이지. 이런 때이니 만큼 이 작은 보석이 군침을 흘릴 만한 훌륭한 먹이가 될 거다. 일라베니아의 고귀하신 분에게도, 심지어는 2황자 리카르디스의 시체를 바라는 자라고 할지라도.”

잇세리온은 아, 하더니 눈을 반짝 빛냈다. 그도 아까와는 다르게 만면에 히죽대는 미소를 떠올렸다.

“그렇군요, 그렇지요. 아귀가 딱 맞아 떨어집니다. 잘했습니다, 로젤린 경.”

로젤린은 잇세리온으로부터 과자 몇 개를 받았다. 아까의 닦달이 못내 마음이 쓰여 성의를 표시한 것이었다. 비록 그 과자가 레이몬드의 주머니에서 나왔을 지라도, 어쨌거나.

레이몬드는 강탈당한 과자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애초에 왼쪽 주머니에 항상 넣어 다니는 간식들은 모두 로젤린을 위한 거였다. 잇세리온은 여전히 흡족한 듯 로젤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 이 일은 함구하세요. 아시겠지요?”

“네.”

“그리고 앞으로는 훔치기 전에 허락 맡고 훔치세요.”

“주인에게 말입니까?”

그건 훔치는 게 아니지 않나? 리카르디스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니요. 저나 전하께 묻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부득이한 상황이라면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라도 물어보세요.”

“네.”

“꼭, 꼭 먼저 묻고 행동하셔야 합니다.”

어디선가 들어본 말 같은데…… 로젤린은 순순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잇세리온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또 일순간 불안해졌는지 “꼭입니다.” 하고 한마디 덧붙였다.

훔친 일이 걸리면 어떻게 하나 고민을 한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리비타의 궁은 소란스러운 기색조차 없었다. 물론 그 침묵이 들키지 않았으리란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도 철저한 단속이 필요했다. 상급 기사들은 티끌만 한 책 하나 잡히지 않기 위해 기사단원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매섭게 단속했다. 로젤린이 맛있는 간식을 먹는 사이 단원들은 열심히 굴렀다.

수확이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었던 일주일의 일정이 모두 끝났다. 하카브 왕자는 궁 바로 앞까지 배웅을 나왔다. 그리고 또 다시 리카르디스의 볼에 입을 맞췄다. 얼렁뚱땅 넘어갔던 첫인사에 비해 조금 더 끈질긴 태도였다. 리카르디스는 결국 그의 볼에 인사를 돌려 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정겨운 모습을 보면서 디에즈는 하하 웃었으나 곧 하카브에게 똑같은 ‘인사’를 당했다. 디에즈는 잠시 전의 리카르디스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두 남자의 썩어 가는 표정을 보면서도 하카브는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힉살라의 영혼이 일라베니아 귀빈 여러분과 함께합니다. 가시는 길 또한, 평안하시길.”

하카브는 마지막으로 로젤린과 눈을 맞췄다. 그는 빙그레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움직였다.

‘그대의 무운을 빌지, 로젤린.’

로젤린은 그 말에 답하지 않았다. 하카브의 집요한 시선 아래 그녀는 검지와 엄지를 입에 물고 세게 바람을 불었다.

삐이익-

뜨거운 숨이 손가락 틈새를 비집고 나가며 높은 바람소리를 냈다. 궁의 반대쪽으로 출발하기 시작한 사절단의 머리 위로 독수리 한 마리가 빙빙 돌았다. 마카롱도 화답하듯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었다.

* * *

“최대한 빨리 발타를 벗어난다.”

“예, 전하.”

결전은 발타의 땅 위에서 이루어 질 것이다. 아무리 검은달이라 하더라도 국경을 넘어서 일라베니아의 병력과 직접 맞부딪치는 일은 반기지 않을 것이므로. 다행히도 모두의 체력이 가득 채워진 만전의 상태였다. 사절단 일행은 말을 재촉하며 달렸다. 한시라도 빨리 발타의 땅을 벗어나야 했다. 이틀이면 국경에 닿을 것이다. 마카롱은 하늘 위를 뱅글뱅글 돌며 사절단을 따라왔다.

해가 저물 쯤 일행은 자리에 멈췄다. 까맣게 변한 숲은 아군의 눈을 가리고 적의 모습을 숨기고는 했다. 더군다나 길을 잃어버릴 가능성 또한 무시하기 어려웠다. 사절단은 분주히 천막과 간이 울타리를 세웠다. 밤에 이동할 수 없는 만큼 경계는 배로 강화했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천막으로 숨어들다가 레이몬드에게 걸려서 끌려 나갔다.

“…….”

막사 안에는 리카르디스의 측근만 남았다. 잇세리온이 지도를 중앙에 펼쳤다. 부단장 나단이 턱을 쓸며 입을 열었다.

“틸락, 차보, 다리온. 세 개의 마을이 교차하는 지점일 줄 알았습니다만…….”

“하카브 왕자는 허를 찌르는 걸 좋아하더군. 천성이 그런 모양이야.”

“가장 경계하는 첫 날에는 건드리지 않겠다는 걸까요.”

“왕자의 생각이 무엇이건 간에, 결과적으로는 말이지.”

스타스는 바닥의 돌멩이를 주워서 지도 위에 하나씩 올려놓았다.

“여기, 여기. 많은 인원을 숨겨 놓을 수 있을 만한 곳은 두 군데입니다. 하카브 왕자의 성격상, 정정당당하게 정공법으로 오지는 않을 겁니다. 매복의 가능성이 높습니다.”

“돌아서 가야 할까요?”

나단의 물음에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저었다.

“돌아서 가면 길이 너무 길어져. 게다가 이렇게 확연하게 보이는 매복 지점. 우리 측에서 눈치챘으리라고 하카브도 생각할 거다. 돌아서 가는 길에도 군대를 심어 뒀을 가능성이 높아.”

잇세리온이 신음을 흘렸다.

“전투는 피할 수 없겠지요.”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달의 새로운 독 ‘파편’. 그 강력한 독의 해독법은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병사의 머릿수도 수거니와 힘의 차이 또한 역력했다.

이길 방법이 없다! 이길 수 없다면 피해야만 한다. 활로는 오직 일라베니아로 넘어가는 국경뿐이었다. 이렇게 수세에 몰린 것은 또 오랜만이지 않은가. 리카르디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국경이 걸어서 우리에게 다가오길 간절히 바래야겠군.”

다들 씁쓸히 웃었다. 스타스가 돌멩이를 올려 놓은 곳은 사절단의 현재 위치와 그다지 멀지 않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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