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43화 (43/220)

43화.

간제가 신랄하게 방해꾼들을 비판했다. 퉁퉁한 발타의 남성 귀족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중이었다.

“오늘은 이쯤하고 물러나야 할 것 같군요. 다음에는 좀 더 깊은 얘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리카르디스 전하.”

“짧지만 즐거운 만남이었습니다. 간제 왕녀.”

간제가 무릎을 살짝 굽혀 그에게 인사했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금빛 장신구가 찰랑이며 흘러내렸다.

“곧 다시 만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그녀가 돌아서며 생긋 웃었다.

“그때까지 몸조심하시기를, 황자 전하.”

리카르디스의 발길은 궁 내부에 있는 커다란 신전을 향했다. 간제 왕녀가 떠나기 직전 그에게 추천해 준 곳이었다. 어지러운 연회장보다도 어쩌면 볼 거리가 많을지도 모른다고.

연회장의 분위기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장소였다. 몇 개의 촛불로 밝혀진 웅장한 내부는 조각과 벽화로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신전 중앙에는 커다란 샘이 있었고, 그 위로 천장이 크게 트여 있어 달빛이 그대로 들어왔다. 반듯하고 동그란 모양의 샘은 그것이 인공적으로 만들어 졌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대륙의 모든 중요한 의식들은 언제나 물을 매개로 했다. 이델라브힘과 크레안 티다니온의 신화와 관련이 깊은 ‘약속의 호수’를 흉내 내는 것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인공 샘에서 시선을 돌렸다. 결혼 의식이 새겨져 있는 벽화가 보였다. 안쪽으로 파여 조각 되어 있는 동그란 원. 그리고 그 아래에는 호수 가운데에 들어가 기도하고 있는 두 사람이 새겨져 있었다.

발타와 일라베니아의 결혼 예식은 매우 비슷했다. 몸을 담글 수 있는 물이 있다던가, 그 수면에 해가 떠오를 때 이루어진다는 점이 같았다. 해는 이델라브힘의 상징. 수면에 해가 비칠 때 결혼하는 두 사람은 빛의 신 이델라브힘의 축복을 받는다. 그렇게 믿어 널리 굳어진 관습이었다.

“…….”

결혼 의식은 발타와 일라베니아뿐만 아니라 라고슈 왕국도 같았다. 대륙에 위치한 나라라고 불릴 수 없는 작은 부족들 또한 같은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물론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 부분이야 있었지만, 기본적인 큰 틀은 동일했다. 뭔가 좀 이상하지 않나? 리카르디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좋은 밤이로군요.”

리카르디스는 대뜸 인사를 건넨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예상대로 하카브 왕자였다. 동생 다음에는 오빠인가. 피로가 몰려왔다. 하카브는 이를 보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도 골치 아픈 일이 많은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습니다, 황자.”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상태라, 리카르디스는 하카브 왕자의 등장이 달갑지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그답지 않게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로 멀거니 서 있었다. 하카브는 아랑곳하지 않고 리카르디스의 곁에 다가와 섰다. 그가 보고 있는 벽화를 같이 감상하는 듯, 여유롭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뒤를 살짝 돌아보니 상급 기사 몇 명에게 로젤린이 제압당해 있었다. 또 그 유별난 호위를 하려다가 저지당한 게 아닐까. 상급 기사 파르딕트가 그녀의 머리에 꿀밤을 놨다. “내 일은 전하를 지키는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달려드는 경을 막는 게 아니야!”라며 화내고 있었다.

“어디 저만 고생하고 있겠습니까. 하카브 왕자 역시 검은달 때문에 바쁘신 걸로 압니다.”

리카르디스의 말은 해석하기에 따라 뜻이 달라졌다. ‘검은달이 요즘 사고치고 다니던데, 발타의 왕자로서 수습하느라 참 바쁘겠다.’라고 들리기도 했고, ‘너 요즘 나한테 자주 암살자 보내던데 참 부지런하기도 하더라.’라고도 들렸다. 물론 일라베니아와 발타의 유례없는 굳건한 동맹이 맺어진 상황에서야, 전자로 해석해야만 했다. 하카브는 그 중의적인 뜻을 파악했으면서도 살살 눈웃음을 쳤다. 껄끄러운 상대였다.

“황자께서 발타까지 친히 발걸음해 주신 만큼, 곧 좋은 결실을 맺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습니까.”

“그럼요.”

두 사람은 지상에서 한 뼘 정도 붕 떠있는 것 같은 말을 주고받았다. 혼잣말보다도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리카르디스는 벽화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해를 상징하는 동그란 원. 음각으로 깊게 파여 있어 다른 벽화들보다 어두웠다. 보통 해는 양각으로 표현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던가? 뭘까. 무언가가 목에 걸린 것처럼 거슬렸다.

“그러고 보니 검은달이 새로운 독을 만들어 냈다고 하던데…….”

하카브 왕자가 이 주제로 먼저 얘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리카르디스는 흠, 얕게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마력과 독을 섞은 것입니다. ‘파편’……이라는 이름이더군요.”

“오, 참신하군요.”

그런 이름은 난생 처음 듣는다는 양, 흥미로워 하는 목소리였다. 왕자의 연기는 수준급이었지만, 리카르디스는 그의 반응에 세심한 신경을 기울이지 못했다. 아까부터 음각으로 조각되어 있는 해가 계속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벽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카브가 그런 리카르디스를 보며 미소를 입에 걸었다.

“파편, 재미있는 이름입니다. 파편이라…… 무엇의 파편일까요?”

“글쎄요…….”

천장을 통해 세차게 바람이 불었다. 신전을 밝히고 있던 촛불 몇 개가 꺼졌다. 리카르디스가 시선을 주던 벽이 한층 어두워졌다. 안쪽으로 깊게 파여 있던 해의 조각 또한 속을 들여다 볼 수 없을 정도로 검게 변했다. 검고, 동그란…….

“검은 달, 일지도 모르겠군요.”

조용한 공간에 리카르디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리카르디스는 벽화에서 눈을 돌려 하카브와 마주 보았다. 아까보다 어두워졌지만 하카브가 입꼬리를 올려 웃는 모습은 똑바로 보였다. 정답이라 얘기하는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깨달았다. 안으로 깊게 파져있는 이 동그란 원은 해가 아니었다. 달이었다. 검은 달. 하카브의 질문에 답하며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에 불과했으나, 잃어버렸던 열쇠를 찾은 것처럼 꼭 들어맞았다.

리카르디스는 하카브와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침착하게만 보였지만, 그의 머릿속은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치고 있었다. 여러 기억이 깨지고, 부서지고, 합쳐졌다. 과거에 찾았던 하얀 밤의 단서와 작은 실마리들이 몸집을 불리고 서로 얽혔다.

온 대륙을 관통하는 똑같은 방식의 결혼식.

이상한 일이었다. 이델라브힘을 믿지 않는 발타와 신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는 대륙 끝자락의 소부족조차 결혼 의식의 형태가 같다고? 어쩌면 이는 더 중요한 일을 가리키는 지표인지도 몰랐다. 보다 중요한, 두 사람이 평생을 함께하겠다는 약속보다 중요한, 어쩌면 생명과 관련된…….

만물이 꽃을 피우며 생명이 순환하는 밤. 축복의 밤은 일라베니아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와 모든 사람에게 중대한 일이다. 대륙이 노쇠하면 어떠한 생명도 살아갈 수 없다. 그러니 만약 이것이 하얀 밤을 불러내기 위한 일부의 조각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비슷한 의식의 형태를. 눈앞의 벽화는 결혼 의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득한 먼 옛날부터 내려왔던 축복의 밤을 표현하고 있었다.

아, 그런 거였나. 그런 거였어. 리카르디스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일라베니아 황실은 축복의 밤을 부르는 의식을 꼭꼭 감추고 있었다. 그들의 황권을 유지하기 위해. 마치 그들이 신의 사자라도 되는 양, 포장하기 위해. 하지만 사람들은 잊지 않고 기억해 왔다. 몇 세대가 흘러도 사라지지 않을 사람과 사람의 약속 안에 축복의 비밀을 간직해 왔던 것이다.

[네가 이델라브힘의 존재만으로 하얀 밤을 되찾을 수 있을지, 이 어둠에서…….]

지하 감옥, 그 깊숙한 곳에서 마녀라 불리는 여자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로 인해 하얀 밤이 아닌 검은 달을 찾아야 하나 추측했다.

리카르디스는 벽화에 그려진 검은 달 아래의 두 사람을 보았다. 하얀 밤만을 찾아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검은 달만을 찾아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얀 밤과 검은 달은 하나의 조각, 하나의 축복, 맞물려진 톱니바퀴였다.

이로써 목표가 명확해졌다. 강대한 마력을 다루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마인(魔人)이라 불리는 그들. 불길한 힘을 다룬다 해서 박해받고, 살해당하고, 꼭꼭 숨어 버린 이들을. 리카르디스는 제 얼굴을 거칠게 쓸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7

발타를 떠나는 날이었다. 연회 내내 보이지 않던 마카롱이 돌아왔다.

“마카롱, 어디 있었어.”

방에 둔 과일이나 치즈 같은 간식거리가 주기적으로 없어지지 않았다면, 어디서 사고를 당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마카롱의 볼이 빵빵해져 있었다. 볼 주머니에 음식을 가득 구겨 넣은 모양새였다.

마카롱이 튓! 무언가를 거칠게 뱉었다. 로젤린은 그것을 집었다. 조각나 있는 검은 돌이었다. 생김새는 평범했지만, 그 안에서 검붉은 모래 같은 무언가가 스르륵 움직이고 있었다. 검고 붉은 조각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낯설지 않았다. 발타 왕궁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던 마력이었다. 마수의 몸에서 날뛰는, 폭주하며 모든 것을 집어 삼키려 하는듯한.

‘그것’이었던 시절에도 이러한 돌조각, 아니 보석을 본 적이 있었다. 죽은 마수들의 시체에서 간혹 볼 수 있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몇 백 년 살며 시체만을 찾아다녔던 ‘그것’도 자주 발견하지는 못했다. 발타는 그 희박한 확률을 뚫고 이 보석을 찾아낸 듯 했다. 발타에서 마수를 찾아보기가 힘든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사체에서 마력의 결정을 찾기 위해 대대적인 학살이 벌어졌을 것이다.

찍. 마카롱은 호두를 들고 갉아 먹었다. 궁의 깊은 곳을 돌아다니다가 어느 방안에서 발견했다고 했다. 그곳에 있는 몇 개의 상자에 이런 보석이 가득 차 있었다고. 하나정도 없어져도 모르겠지. 마카롱은 흥하고 콧김을 세게 불었다. 로젤린이 손가락 끝으로 마카롱의 머리를 슥슥 문질렀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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