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경계는 하되 너무 미워는 하지 마, 로젤린. 외로운 분이시니까. 어렸을 적에 전하가 기거하시던 백옥 성이 불타 버린 사건이 있었어. 두 살 밑의 왕자 전하와 전하의 어머니이신 황비 전하까지 전부 이델라브힘의 품으로 돌아가셨지. 전하만 창문에서 뛰어내려 가까스로 살아남으셨어.”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로젤린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레이몬드는 그런 그녀를 기특하다는 듯 바라봤다.
“이후에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리셔서 몇 년간 요양하셨는데…… 성으로 돌아올 쯤엔 아무도 손 내밀어 주지 않았어. 모든 걸 잃어버린 5황자 따위가 무슨 도움이 되겠냐고. 그때 디에즈 전하를 거둬들인 분이 엘피디오 전하야.”
“실어증은 어디가 아픈 건데?”
아. 레이몬드는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잠시 말을 못하게 되는 병이야. 로젤린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멀리 술 석 잔을 아슬아슬하게 들고 오는 디에즈가 보였다. 그는 그늘 한 점 없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엘피디오 전하의 세력이 훨씬 컸으니까. 또 그때의 리카르디스 전하께서는 누군가를 품어 줄 만한 여유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그냥, 그렇게 알고만 있어 로젤린. 티 내지 말고. 괜히 더 위해 주려고도 하지 말고. 지금처럼만.”
“응.”
레이몬드가 씩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착하다.”
그는 다정한 손길로 그녀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레이몬드와 마주하던 시선을 돌리니 디에즈가 막 당도해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하얀 얼굴 위로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그는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두 사람에게 잔을 건네었다. 색 없이 투명한 술이었다.
로젤린이 디에즈에게 먼저 건배했다. 쨍 하는 맑은 유리 소리가 울렸다. 레이몬드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하급자는 상급자한테 먼저 그러는 거 아니야 로젤린…… 조금 이따가 일러둬야 할 것 같았다. 디에즈는 잠시 놀란 표정을 했다. 하지만 곧, 황금색 눈동자에 그녀의 모습을 가득 담으며 환하게 웃었다.
* * *
매일 매일이 축제 같은 분위기였다. 연회는 삼일이나 계속되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리카르디스와 하카브는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록 무의미한 대화들만 오고가는 지루한 시간이었을지언정, 겉으로 볼 때에는 탄탄한 관계를 쌓고 있는 과정처럼 보였다. 호위하던 로젤린도 하카브를 자주 보긴 했으나, 그는 가끔 보내는 눈인사 이외에는 일절 아는 체하지 않았다.
리카르디스가 잠시 휴식을 취하러 들어갔던 때였다. 로젤린은 그 틈을 타서 배를 채우기 위해 연회장을 떠돌았다. 한참을 이것저것 집어 먹고 있는데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카브 왕자였다.
“음식이 입에 맞는 것 같아 다행이군.”
로젤린은 고기를 열심히 먹는 중이라 대답할 수 없었다. 칼릭스가 입안에 음식이 있을 때 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했다. 로젤린은 음식물을 필사적으로 씹어서 삼키려 했다. 그 모습을 보던 하카브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귀엽기는. 천천히 들게.”
로젤린은 입을 가리며 “네.” 하고 짧은 대답을 했다. 하카브는 그녀가 음식을 먹는 모습을 감상했다. 시선은 검은 머리카락에 머무르기도 했고, 우물거리는 입가를 떠돌기도 했다.
“우리의 전통 의상을 입은 모습이 보고 싶었는데…… 안타깝군. 지금이라도 입어 볼 텐가? 그대를 위해 기꺼이 선물하겠다.”
그쯤 되어 로젤린은 음식을 꿀꺽 다 삼켰다.
“아니오, 괜찮습니다.”
“사양하지 않아도 괜찮다.”
“전하의 곁을 오래 떠나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카브는 눈썹을 조금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술잔을 건네며 한 발 더 다가섰다.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로젤린의 손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로젤린은 술잔을 받은 채 멀뚱히 그를 올려보았다.
“걱정마라. 이 궁 안에서 황자가 위험할 일은 없을 테니까.”
“아니오. 괜찮습니다.”
이후로도 하카브는 끈질기게 권했다. 로젤린은 “괜찮습니다.”와 “아니오, 괜찮습니다.”만 반복하며 여섯 번의 시도를 모두 퇴짜 놓았다. 어조와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하카브는 흠, 하며 팔짱을 꼈다. 짓궂은 표정이었다.
“왜, 나를 못 믿겠나? 황자를 해칠 것 같아서?”
로젤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카브는 허를 찌른 질문이라고 생각했는지 의기양양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자신만만한 표정은 로젤린의 이어진 대답에 와르르 무너졌다.
“네.”
“…….”
어,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지? 딱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었다. 하카브는 잠시 무표정해졌다가, 허리까지 굽혀 가면서 와하하 웃었다. 반달로 접힌 그의 눈꼬리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대, 정말 마음에 든다. 황자를 떠나고 싶어지거든 나에게 와라.”
“싫습니다.”
하카브는 또 소리 내어 웃었다. 연회장의 귀족들이 술렁이며 그 광경을 훔쳐봤다. 하카브가 웃는 모습이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웃으면 우습게 보인다는 둥, 경박해 보인다는 둥의 이상한 체면치레를 하는 여타 귀족, 황족과 다르게 그는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하카브를 쉽게 보지 못했다. 미소를 짓고 있다 하더라도 차가운 시선과 장신의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이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미소가 즐거운 감정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 절대적인 포식자가 보이는 여유라는 점에 있어서 도리어 위축될 뿐이었다.
그런 하카브가 진심으로 유쾌해하고 있었다. 눈물까지 흘려 가며 웃는 그의 모습은 오래 일한 시종들도 처음 목격했을 정도로 희귀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찾아와라. 리비타의 궁은 그대에게 언제나 열려 있을 테니.”
로젤린은 조금 불만스러운 기색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 생각하는 속이 빤히 다 들여다보였다. 하카브는 제 턱을 느릿하게 손마디로 쓸었다.
발타나 일라베니아나, 두 나라 다 사람 사는 곳 아니었나? 어쩌다 일라베니아에 이런 귀여운 게 나타난 거지? 흠. 하카브는 유쾌한 제 기분을 거스를 생각하지 않고 마음껏 즐겼다. 조만간 그녀가 죽어 버리게 되면 다시 느낄 수 없는 감정이 아닌가. 약간은 아쉬웠다. 부디 그렇게 되기 전에 내게 와 주면 좋으련만.
* * *
로젤린은 여전히 날이 서 있었다. 시간이 흐르며 연회장의 분위기가 좋아졌지만, 그녀는 리카르디스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을 흉흉한 눈빛으로 막아섰다. 지위고하 막론하고 사람들을 위협하던 그녀의 행동은 부단장 나단에게 불려 가 왕창 혼나는 것으로 끝을 맞이했다. 좋게 흘러가는 분위기 속에서 혼자만 바짝 경계하는 그녀의 태도는 큰 문제를 초래할 수 있었다. 호위도 좋지만 적당히 티 안 나게 하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로젤린은 과도한 경계를 조금이나마 허물었다. 연일 계속된 연회 중, 수많은 만남이 있었으나 어느 누구 하나 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카브 왕자의 말대로 이 궁 안에서라면 리카르디스의 안전은 보장되는 듯 했다. 그제야 리카르디스는 제 앞으로 할당된 음식을 한 접시 다 온전히 먹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로젤린이 독의 유무를 판별한답시고 항상 반 정도 먹고 그에게 넘겨줬기 때문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시끄럽고 화려한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로젤린과 상급 기사 몇 명이 호위를 위해 그의 뒤를 따랐다.
“리카르디스 전하?”
뒤에서 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카르디스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한 사람 가면 한 사람 오고, 두 사람 가면 두 사람이 오는 연회장을 벗어났더니, 기어코 쫓아오기까지 한다. 발타인들은 지독한 구석이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돌아서며 파삭 구겼던 얼굴을 피고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달이 밝은 밤입니다. 연회는 즐거우셨는지요?”
비단 같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여자였다. 가느다란 눈매가 나른해 보였다. 그녀의 장신구와 복식으로 보아 고위 귀족에 해당한다는 사실쯤은 알겠으나, 리카르디스는 이 며칠간 고위귀족에 해당하는 수많은 발타인을 만난 상태였다. 솔직히 그 여자가 그 여자로 보였다. 리카르디스가 눈을 휘며 웃었다.
“즐거움에 취하는 것 같아 잠시 달구경이나 할까 나와 보았습니다…….”
잇세리온이 뒤에서 소근거렸다.
‘3왕녀 간제입니다.’
“……간제 왕녀.”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 만나 뵈는 겁니다만, 절 알고 계시다니 기쁘군요.”
리카르디스가 잇세리온을 슬쩍 째려봤다. 그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인사 했던 것 같은데, 아니었나? 그 또한 많은 인물들을 만나다 보니 착각했던 듯 했다.
“농담입니다, 둘째 날 인사 드렸었지요.”
……착각이 아니었다. 간제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홀로 남으실 순간을 호시탐탐 노려 보았어요. 연회를 떠나는 사람을 붙잡고 얘기를 나누는 것만큼 촌스러운 일은 없지만, 너그러이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연한 만남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연회를 벗어나 주위에 사람이 없어진 때를 노려 찾아왔으니. 뭔가 용건이 있는 건가?
“제게 하실 말이라도?”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전하의 미모에 달조차 구름 뒤로 숨어 버렸군요.”
간제가 두 손을 모으며 눈을 반짝였다. 리카르디스의 대외적 가면에 조금 금이 갔다.
“감사합니다만…… 용건이 그게 전부라면…….”
“설마요, 지금은 그저 순간의 감상을 내뱉었을 뿐이랍니다.”
간제가 이어서 말을 하려던 순간, 복도 끝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연회장을 벗어나는 사람들이 또 발생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입을 벌린 그대로 멈춰 있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간제가 난처하다는 듯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쓸모라고는 없는 작자들 같으니.”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