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연회 같은 회담은 잘 진행되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동안 일라베니아 사절단 측과 발타의 왕자는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하카브 왕자는 사절단의 말을 경청했다. 검은달이 일라베니아에게 행하는 횡포에 크게 분노하기도 했고 검은달이라는 집단을 발타에서 뿌리를 뽑겠노라 다짐하기도 했다.
“보다 강한 신뢰로, 보다 더 굳건한 동맹을!”
하카브가 잔을 높이 들었다. 연회장의 모두가 그를 따라 잔을 들었다. 리카르디스는 웃으며 그와 건배했다. 챙. 유리가 부딪히는 청명한 소리 속,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깊게 들여다보았다. 고요한 탐색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 * *
곧이어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되었다. 일라베니아의 사절단은 회담이나 연회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로젤린은 음악이 좀 더 흥겨워지고 술의 도수가 미세하게 높아진 것을 눈치챘다. 사절단은 완벽하게 경계를 풀지는 않았으나 그들 나름대로 틈틈이 먹고 마시며 풀어진 분위기를 즐겼다.
리카르디스는 많은 왕족과 귀족을 만났다. 몇째 아들, 몇째 딸. 누구의 친척, 누구의 팔촌, 누구의 이웃사촌. 리카르디스는 살짝 웃는 얼굴로 차분하게 응대했다. 한구석에서 아가씨들이 삼삼오오 모여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녀들의 시선이 유독 리카르디스를 향해 있기에 로젤린은 잠시 그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안주가 따로 없네, 따로 없어.”
“술맛 끝내 준다.”
듣긴 했는데…… 무슨 소리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술과 음식이 맛있다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로젤린은 어깨를 으쓱하며 신경을 돌렸다.
로젤린은 여전히 리카르디스의 한 걸음 뒤에서 졸졸 따라다녔다. 잇세리온이 이젠 좀 질린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해야 할 일이 많은 리카르디스는 여기저기 부지런히 돌아다녔고, 로젤린은 배가 고팠다. 몇 시간째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그의 뒤를 쫓고 있는 상황이라 심각하게 허기졌다. 심지어 처음 보는 음식들이 천지에 널려있는 공간이었다. 여기는 훈제한 고기가 쌓여 있고, 저기는 꿀에 절인 과일이 반지르르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흘끗흘끗 음식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 열망이 타올랐다. 배가 부르더라도 입에 욱여넣고 싶을 정도였으니, 배가 고픈 지금에서야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 위험한 곳에서 리카르디스의 곁을 떠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헉헉…… 헉 가쁘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폐 깊숙이 음식 냄새라도 간직하기 위해.
“……이봐, 경…….”
리카르디스는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에 흠칫 놀라서 돌아보았다. 로젤린이 붉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는 초조하게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식은땀도 나는 듯 했다. 대체 뭘 얼마나 먹고 싶기에…….
“예, 전하.”
“식사하고 와. 아무도 경에게 굶으라고 말한 사람 없어.”
“아닙니다. 곁에 있겠습니다.”
로젤린은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는 듯 표정을 가다듬었지만, 손끝이 그녀의 의지를 배반하고 잘게 떨리고 있었다.
“…….”
웃기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했다. 리카르디스는 기사 몇 명을 더 불러 모아 아까보다 촘촘하게 호위망을 구성했다.
“이 정도면 위험할 일 없으니 이만 가봐. 어떤 사태가 올지 모르는 거고, 먹을 수 있을 때 먹어 둬야지.”
로젤린은 머뭇거렸다. 그녀는 “그럼…….”이라는 말로 운을 띄우며 기사 두 명을 콕콕 손가락으로 지목했다.
“이 두 명은 빼고, 파르딕트 경과 카일로 경으로 대체해 주시면 잠시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녀에게 손가락질 당한 두 명은 하급 기사였다. 실력을 영 믿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에게 지목당한 바다협곡의 네스터가 우울한 표정으로 곧 파르딕트와 카일로를 불러왔다. 그들은 불려온 이유를 건네 들었는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로젤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젤린은 음식을 먹으러 가는 와중에도 열두 번 정도 뒤돌아봤다. 리카르디스는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기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인내심은 딱 여기까지였다. 열세 번째로 그녀가 뒤를 돌아봤을 때, 열 받은 리카르디스가 레이몬드를 소환했다.
“가서 저 문제아에게 음식을 좀 먹이고 와!”
“……예, 전하…… 저희 애가 원래는 이러지 않는데…… 심려 끼쳐 드려 매우 송구…….”
“가!”
레이몬드는 면구스럽다 듯 고개를 꾸벅꾸벅 숙인 후에, 곧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로젤린은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에게 무어라 말하며 열네 번째로 리카르디스를 돌아보았다. 리카르디스가 뒷목을 잡기 직전, 레이몬드가 근처에서 먹기 좋은 크기의 음식을 집어 그녀의 입에 확 집어넣었다. 로젤린의 표정이 스르르 풀렸다. 레이몬드는 흐물흐물해진 로젤린의 손을 잡고 음식이 쌓여 있는 테이블로 이끌었다. 과연 로젤린을 다루는데 일가견이 있는 훌륭한 솜씨였다.
레이몬드는 그녀의 식사 수발을 착실히 수행했다. 새로운 음식 위주, 고기 위주, 달콤한 것 다음에는 짭짤한 음식, 그리고 다시 달콤한 것의 법칙을 지켜서 음식을 가져왔다. 여자 기사들에게서 맛있게 먹는 방법을 배워 왔다고 했다. 로젤린은 신문명의 위대함을 몸소 체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방법만 지킨다면 끝도 한도 없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참 음식에 심취해 있는 중, 익숙한 목소리가 로젤린의 귓가에 들려왔다.
“좋은 밤입니다. 즐기고 있습니…… 있네요, 로젤린.”
“네.”
“즐기고 있습니까?”라고 물으려 했지만, 그녀의 행복한 얼굴을 보고 디에즈는 재빨리 말을 바꿨다. 음, 굉장히 즐기고 있구나…….
레이몬드가 흐리게 웃으며 디에즈를 맞았다.
“여독은 좀 풀리셨습니까, 전하?”
“나야 편하게 앉아서 마차 여행을 했을 뿐인데요. 고생은 여러분들이 전부 했지요.”
“술은 과하게 드시지 마세요. 누군가가 억지로 권하면 마시는 척…… 하면서 손수건에 뱉으세요.”
디에즈가 푸하하 웃었다.
“알았다니까요. 걱정이 과합니다, 레이몬드.”
로젤린은 치즈와 고기가 켜켜이 쌓여진 음식을 먹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레이몬드는 디에즈와 제법 허물없는 사이처럼 보였다. 그녀의 의문에 찬 눈빛을 읽은 건지 레이몬드가 답했다.
“아, 디에즈 전하와 나는 어렸을 때 같은 가정교사를 두고 있었거든. 그때부터 좀 친했지. 너는 내 수습 기사일 때부터 디에즈 전하와 알며 지냈고. 셋이 자주 놀러 다녔어.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하와 네가 도서관에 갈 때…… 내가… 억지로 끌려갔었지…….”
레이몬드는 먼 옛날을 생각하는 듯 아련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디에즈는 “맞아, 그랬었죠. 생각난다.” 하면서 생글생글 웃었다. 그리고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로젤린의 접시 위에 양고기를 올렸다.
“이게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입니다. 양고기를 버터에 구웠다가 각종 향신료와 채소를 집어넣고 오랜 시간 삶는다고 하더군요. 드셔 보세요.”
“감사합니다.”
로젤린은 냄새를 먼저 맡은 후 고기를 입에 넣었다. 일라베니아에서 만났을 때부터 양고기 타령을 하더니, 대체 어떤 맛이기에?
“……!”
로젤린은 척추를 관통하는 짜릿한 미식의 감각에 온몸의 힘이 풀릴 뻔 했다. 과, 과연. 발타의 전통요리! 그녀의 미각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맛이었다. 결결이 스르륵 찢어지는 식감. 쫄깃하지만 질기지는 않고, 촉촉하지만 느끼하지는 않았다. 육즙과 채즙이 농축된 짭짤함과 달콤함. 양념의 배율 또한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그 여러 가지 복합적인 맛과 함께 향신료의 강렬한 감각이 어우러지며 그녀를 이성을 흔들었다. 로젤린의 눈에 환희가 서린 것을 본 디에즈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맛있습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디에즈는 흐뭇해하며 양고기가 담긴 접시를 두 개 더 들고 와 그녀에게 건넸다. 로젤린이 볼이 불록해질 정도로 음식을 밀어 넣는 모습을 지켜보던 디에즈가 아차, 하는 소리를 내었다.
“이것과 잘 어울리는 발타의 술이 있는데, 그걸 꼭 같이 먹어야 하거든요. 그걸 같이 마시지 않으면 호렘보를 먹지 않은 것이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입니다. 아 호렘보는 그 요리 이름이에요.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로젤린.”
디에즈가 연회장을 가로지르며 후다닥 뛰어갔다. 레이몬드가 그의 뒤로 소리 질렀다.
“뛰면 넘어지십니다, 전하! 조심하세요!”
디에즈는 자신의 나이가 세 살이 아니라 스물세 살이라는 얘기를 하더니 사람들 사이로 쏙 사라졌다. 로젤린은 냠냠 고기를 목구멍으로 넘기며 입을 열었다.
“사이 좋아 보여.”
“그렇지 뭐. 좀 불경스럽게 표현하자면 소꿉친구 같은 거니까.”
“2황자 전하의 적인데도?”
레이몬드는 음료를 마시던 행동을 우뚝 멈췄다. 짧게 한숨을 내뱉은 그는 시끄러운 연회장을 잠시 둘러보았다. 시선은 날카롭지 않았고 그저 목적 없이 부유했다. 경계가 아닌 생각을 환기하기 위함인 듯 보였다. 로젤린이 고기를 다 먹을 쯤, 레이몬드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걱정하지 마, 로젤린. 내가 이래 보여도 공과 사는 잘 구분하는 편이거든.”
레이몬드가 제 가슴을 툭툭 쳤다.
“언젠가 필요하다면, 저분이 나아가는 길이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을 만큼 위험해 진다면.”
레이몬드는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을 꺼냈다. 로젤린의 입가에 묻은 양념이 그의 손수건에 닦여 나갔다.
“그때는 내가…….”
레이몬드가 빙긋 웃었다. 우는지 웃는지 모를 미묘한 표정이었다.
“아, 왜 이렇게 안 닦여. 고개 살짝 들어 봐 로젤린.”
레이몬드가 인상을 쓰며 손수건에 물을 묻혔다. 로젤린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하도 닦아 내어 입가가 쓰릴 정도였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