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40화 (40/220)

40화.

“로, 로젤린…….”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아, 어…… 으…… 온전하게 형태를 갖추지 못한 신음소리만 새어 나왔다. 반파되어 있는 마차 내부에는 피 냄새가 가득 차올라 있었다.

“…무, 사해서 다행이야…….”

날카롭게 부서진 마차의 파편이 소녀의 복부를 관통해 있었다.

아아아아악! 고막을 찢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명인지 울음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나의, 아니 로젤린. 그녀의 목소리였다.

[무섭네. 사람이 너무 쉽게 죽는 것 같아서, 무서워.]

소녀가 했던 말이 떠오르며 과거와 현재의 공간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행복한 순간이었다. 로젤린은 소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웃고 있었다. 햇살이 따듯하게 쏟아지고, 봄바람처럼 살랑거리는 공기는 포근했다.

[걱정 마세요. 황녀 전하.]

“부탁……이, 야. 오빠를…….”

[제가 지켜 드릴게요.]

* * *

로젤린은 동이 터오기 직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밤의 꿈이 뒤숭숭했던 탓인지 온몸이 찌뿌둥했다. 로젤린은 고개를 돌려 곤히 잠든 리카르디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꾼 꿈이 ‘로젤린’의 기억임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로젤린은 말라붙은 눈물을 대충 손으로 쓸었다. 인간으로서의 첫 눈물은 기억하지 못했던 시간 속에 흘러갔다.

로젤린은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서다가 호위 중이던 레이몬드와 마주쳤다. 2황자의 방. 새벽. 심지어는 창문에서 남몰래? 레이몬드는 당장에라도 눈물을 한 바가지 쏟을 것 같은 표정으로 외쳤다.

“나, 나는…… 널 그렇게 안 키웠다, 로젤린!”

잔소리가 길어질 듯했다. 로젤린은 그 기미를 읽어 내고는 잽싸게 도망쳤다. 바람과도 같은 빠르기였다. 레이몬드는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뒷목을 잡았다.

방으로 돌아가니 찻잔 안에서 자고 있던 마카롱이 부스스 눈을 떴다. 검은깨같이 작은 눈이 깜박거렸다. 포동포동한 배 위에는 먹다 남은 옥수수 알갱이의 부스러기가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이놈의 기지배…… 너 밤늦게 싸돌아다니고…… 그러면 안 돼…… 찍찍거리는 소리가 잠에 늘어졌다. 바깥을 쳐다보니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회담은 대부분 진지하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 진행되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주로 여러 세력이 모이며, 각자의 이익을 위해 칼 대신 입을 휘두르는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발타의 회담은 긴장감 가득한 대부분의 나라와 다른 양상을 보였다. 겉으로 웃으며 속으로는 칼날을 가는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분위기가 판이했다.

금과 다양한 색료로 화려하게 치장된 연회장은 수천 개의 등불과 촛불로 환하게 밝혀졌다. 수백 명이 있다면 그 수백 명의 다른 입맛을 모두 충족시킬 만한 온갖 진미가 가득했다. 사람들은 아름답고 흥겹기도 한 노래 소리 가운데 술을 마시고, 춤을 췄다. 축제나 연회라고 봐도 손색없었다.

하지만 이런 자유분방한 회담에도 공통적인 부분은 있었으니, ‘회담장 내부에서는 무기 소지가 불가하다.’라는 점이었다. 나라의 중대사가 오가며 국가의 주요 인사들이 모이는 장소인 만큼 위험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하카브 왕자 측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일라베니아의 사절단, 전원에게는 언제 어디서든 무기소지를 허가한다고.”

이례적인 일이었다. 기사들 사이에 소란이 일었다. 언제 어디서든 무기 소지를 허가? 하카브는 오늘 있는 회담을 염두에 두고 얘기한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는 고작 몇 시간 전의 갑작스러운 통보라니. 더욱 의심이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비죽대며 웃었다.

“그 좋은 성격이 어디 갔나 했지. 괜한 동요를 일으키려는 수작이다. 모두 신경 쓰지 마라.”

리카르디스의 태평한 태도에도 하얀밤의 기사단원들은 복잡한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무기 소지를 허용하다니. 예상 못한 위험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 혹시 회담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것인가? 또는 무장을 빌미로 걸고넘어지려 한다던가. 하카브 왕자는 대체 무슨 생각이지?

사절단 일행의 동요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들의 계산속이라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대책을 의논할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이었다. 리카르디스는 팔짱을 끼고 주위를 쭉 둘러보았다. 호수에 떨어진 돌멩이 하나가 파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이 이상 우습게 보이는 건 좀…… 기분 나쁘군. 리카르디스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입을 열었다.

“회담장에 들어가는 모든 인원은 무장을 해제한다.”

“명 받들겠습니다.”

다들 허리춤에 매어놓은 검집을 풀었다. 로젤린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들고 가도 된다는데 대체 왜 무장을 해제하라는 건지. 그녀는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느리게 검을 내려놓았다.

“로젤린 경.”

리카르디스가 그녀를 불렀다.

“네.”

“부츠 안에 있는 무기도 빼야지.”

로젤린이 부츠 안에서 슬그머니 단검 두 개를 꺼냈다.

리카르디스에게는 사실 고민할 거리도 아니었다. 하카브는 다른 사람을 제 손 안에서 쥐락펴락 하는 것을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별 의미 없는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로 다른 이들을 흔들고, 그 모습을 즐기며 지켜봤다. 엘피디오는 그 성격을 개 같다고 했고, 리카르디스는 엿 같다고 표현했다.

“흔드는 대로 쉽게 흔들리면 쓰나.”

잇세리온은 감명받은 표정이었다. 이 어찌나 대담한 분이신지……!

리카르디스는 말없이 앉아 있는 디에즈를 쳐다보았다. 디에즈는 그의 결정에 옹호도, 반대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저 흐르면 흘러가는 대로 물 위에 떠있는 나뭇잎 같았다.

문이 달리지 않은 연회장은 아치형의 모양으로 내부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아름다운 선율에 술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재상 아틸라크가 환하게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일라베니아의 사절단이 회담장에 도착했노라, 우렁차게 알리는 소리와 함께 리카르디스는 빛나는 공간으로 발을 들였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하카브 왕자가 입구 쪽으로 걸어왔다. 금사로 수놓인 튜닉 위로 바닥까지 끌리는 기다란 천을 겹쳐 입은 차림새였다. 온갖 장신구가 그의 팔과 귀에서 빛나고 있었다. 하카브는 사람 좋은 미소로 사절단을 환대했다. 긴장해서 억지 미소를 걸고 있는 사절단 일행과 다르게 정말로 기분 좋아 보였다.

하카브의 시선은 리카르디스의 뒤를 향했다. 그는 하얀 제복을 입은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정확히는 그들의 허리쯤. 기사단이 무기를 소지하지 않은 것을 확인한 하카브가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엘피디오였다면 분명 이런저런 무기를 바리바리 싸 들고 왔을 것이다. 그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역시 이쪽이 훨씬 번거롭겠어.

“먼 길 오시느라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일라베니아의 귀빈 여러분. 저는 힉살라 아돈의 첫 번째 아들. 하카브입니다.”

회담의 포문을 여는 인사에 리카르디스 또한 정중하게 응대하려 했으나, 하카브가 다가오는 게 먼저였다. 그는 거침없이 리카르디스를 향해 걸어왔다. 기사단장 스타스가 하카브를 막아섰다.

“스타스 경.”

리카르디스가 낮게 그를 불렀다. 스타스는 까닥 묵례하고 다시 물러섰다. 발타인의 대화 거리는 일라베니아인보다 훨씬 가깝다. 또한, 발타의 1왕자 하카브는 그렇게 아둔한 인물도 아니었다. 회담장에서 갑자기 칼을 빼 들고 일라베니아의 황자를 해하려는 시도가 있을 리 만무했다. 스타스는 이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실수를 했다. 하카브가 회담 직전에 사절단 측을 흔들어 놓은 장치가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검은 머리의 왕자는 기분 좋은 듯 눈웃음을 지으며 스타스를 스쳐 지나갔다.

리카르디스의 주위로 호위가 허물어졌다. 하카브는 웃으면서 한 걸음 더 리카르디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발끝이 서로 닿을 정도의 거리였다. 너무 가깝지 않나? 리카르디스조차도 인상을 굳힌 순간이었다. 하카브가 리카르디스의 한쪽 어깨에 제 손을 살포시 올려놓았다.

“아.”

로젤린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카브 왕자가 어떤 행동을 할지 깨달았다. 그녀의 예상대로 왕자의 얼굴이 리카르디스를 향했다.

쪽.

공간을 메운 음악 소리를 뚫고 리카르디스는 들었다. 고막에 생생하게 박힌 그 소리를.

느꼈다. 볼에 꾹 눌러진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을.

그는 굳은 고개를 으드득 돌렸다. 하카브 왕자의 얼굴이 바로 한 치 앞에 있었다. 리카르디스의 머리는 평소와 달리 둔하게 돌아갔다. 그러니까, 방금, 내, 볼에. 이 왕자가…….

“꼭 뵙고 싶었습니다. 리카르디스 황자.”

하카브는 열세 명의 후궁에게 두루 사랑받는다는 소문을 입증이라도 하듯, 근사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리카르디스는 얼굴을 파삭 구겼다. 디에즈도 드물게 눈살을 찌푸렸다. 볼에 입을 맞추는 인사는 발타의 풍습이었다. 간혹 타국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면 하는 경우가 간혹 있긴 했지만…… 단 한 번도 중요한 회담자리에서, 심지어 타국의 사자에게 행해진 적은 없었다.

하카브 왕자의 돌발행동에 회담장은 잠시 침묵에 휩싸였다. 악기를 연주하던 악단도 살짝 삐끗했다. 하지만 곧 유쾌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발타의 귀족들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발타의 왕자가 이렇게까지나 일라베니아의 사절단을 반기고 있다. 진의가 무엇이건 간에, 그는 모든 이들에게 그렇게 알아 두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사절단도 왕자의 뜻을 알아들었다. 몇백 년간 싸워 온 앙숙의 나라였지만 그 중심부에 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발타의 왕족, 귀족. 어느 누구도 적대감의 흔적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능숙하게 속을 가리는 웃는 얼굴이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 되는 것 보단 훨씬 나았다. 애정 어린 인사를 받은 리카르디스 황자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여하간 그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화기애애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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