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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없는 밤-38화 (38/220)

38화.

리카르디스와 나단이 한숨을 푹 쉬었다. 다행히 눈치와 생각이 있는 사람이 이후에 일어날 수작질을 막아준 모양이었다. 당연히 리카르디스는 그녀를 부른 적 없었다. 디에즈가 이 맹한 기사를 돌려보내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래서 그곳을 벗어나는데…….”

“아직도 안 끝났나?”

리카르디스는 좀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리카르디스를 떠나 있던 건 삼십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다. 그사이에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닌 건지 감도 안 잡혔다. 로젤린이 끄덕이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디에즈 황자가 하카브 왕자에게 ‘엘피디오의 전언입니다.’라고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리카르디스는 소리를 내어 억지로 웃었다. 그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올렸다. 방 안의 분위기가 송곳처럼 뾰족해졌다. 로젤린은 대충 이해했다. 그는 리카르디스의 적인 1황자의 전언을 가지고 하카브와 접촉했다. 그런 디에즈가 리카르디스에게 유리한 행동을 하리라고는 생각 할 수 없었다.

로젤린은 문득 머릿속으로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디에즈가 다정한 손길로 제 얼굴에 붙은 꽃잎을 떼어 줬다. 햇빛 아래 황금색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걱정했습니다, 로젤린.]

목소리가 녹아내릴 듯 부드러웠다. 그 안에 호의가 가득 담겨있다는 사실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서 로젤린은 이 상황을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디에즈는 자신에게 좋은 사람이다. 그러나 리카르디스에게 좋은 사람은 아니다. 좋은 사람 내 편, 나쁜 사람 남의 편. 마음속에 정해 놓은 확고한 경계선이 있었으나 디에즈는 그녀가 분류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행보를 보였다. 그는 나의 적인 걸까?

“도착한 첫날부터 접촉하다니, 어지간히 급했나보군. 또 다른 말 들은 건 없나, 로젤린 경?”

로젤린은 풀벌레 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장악하기 전까지, 점점 작아지던 그들의 대화를 떠올렸다. 들새의 청력을 빌린 귓가로 두 남자의 얘기가 고스란히 닿았다.

[엘피디오의 전언입니다.]

[이런, 미천한 발타의 아들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실까.]

[‘마력과 독의 결합물이라니, 듣지 못한 것이다.’]

[정확히는 ‘파편’이라고 부르는 독이지.]

[‘마력과 독의 결합물이라니 듣지 못한 것이다. 서로의 앞날을 위해 맞잡은 손이었으나, 진정한 친우로 거듭났다고 생각했다.’]

이후에 하카브가 웃는 소리를 들었다. 진정한 친우라는 부분이 특히 웃긴 듯했다. 디에즈는 그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그 순간에도 점점 소리는 작아졌다.

[‘어설프게 쌓아진 신뢰 관계 위에서 어떤 대업을 이루겠는가. 내가 그대를 믿은 만큼, 그대 또한 신뢰를 보여 주길 바란다…….’라고 하셨습니다.]

[말 한번 요란하게 꼬아 대는군. 요지는 해독제가 있냐는 말 아닌가?]

[그렇습니다.]

하카브는 짧게 침묵했다. 기분이 좋은 듯 나지막이 웃는 소리만 그 공백을 메웠다. 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로젤린은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했다.

[해독제는,]

하카브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작아지던 소리는 완전히 멎었다.

[없다.]

찌르르 풀벌레만 우는 밤이었다.

* * *

“위험합니다, 전하!”

어디에선가 로젤린이 날아왔다.

젠장! 리카르디스는 잇새로 욕을 내뱉으며 자세를 잡았다. 한 마리의 나비처럼 날아오는 로젤린을 받아 내기 위한 것이었으나, 쏜살 같은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뒤로 넘어갔다. 넘어진 두 사람 옆으로 벌 한 마리가 날아다녔다. 레이몬드는 무심한 표정으로 손을 휘휘 저어서 벌을 쫓았다. 정적이 감돌았다.

‘자른다. 일라베니아에 돌아가면 기필코 자른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밑에서 부들부들 떨었다. 이 유별난 호위는 어젯밤부터 지속되었다. 로젤린은 혼란스러웠다. 이 거대한 궁을 뒤덮고 있는 이상한 마력 때문이었다. 한두 사람도 아니고, 한두 군데도 아니었다. 사방에서 넘실댔다.

사물을 관찰하는 뛰어난 눈과 귀. 살기를 포착하는 동물적인 감. 마력을 읽는 ‘그것’의 특성까지. 평소 훌륭하게 공을 쌓았던 로젤린의 능력이 도리어 독이 되었다. 누군가에게 알릴 수도 도망갈 수도 없었다. 먼저 공격을 해 오지 않는 한 죽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녀에게 허락된 것은 오직 방패의 역할뿐이었다.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시야와 감각으로 보는 세상이 겹쳐졌다. 이질적인 마력 속의 꽃과 검. 무엇이 위험한지 순간적으로는 판별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제 본능을 따라 모든 것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냥 지나가는 하인. 궁에 사는 고양이. 날벌레. 심지어는 잇세리온과 기사단장 스타스까지.

로젤린이 경계하며 앞을 가로막자, 스타스는 기가 차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태한 태도보다야 나았다. 경계가 부족하기보단 넘치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약간은 부족하지만 열심히 하는 모습이 예뻐 보여서 그냥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넘어갔더랬다. 그 안일한 판단의 결과가 나타난 것이 바로 오늘이었다.

“전하! 위험합니다!”

풀밭에 드러누워 앞발을 할짝거리는 고양이였다.

“전하! 제 뒤로!”

저 멀리서 식사하던 궁의 하인이었다. 로젤린의 외침에 사레가 들렸는지 한참을 콜록거렸다.

“피하십시오!”

바람에 날려 온 나뭇잎이었다. 계속된 과잉 호위에 짜증내던 잇세리온도 이쯤에서 포기했다.

“전하!”

쭉 뻗은 로젤린의 팔이 리카르디스를 막아섰다.

“그만! 제발 그만, 로젤린 경!”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동글동글한 뒤통수를 보며 버럭 소리 질렀다. 하지만 로젤린은 그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양, 발밑의 돌부리를 필사적으로 캐내려 시도할 뿐이었다. 리카르디스는 화가 머리끝까지 뻗쳤다. 자신이 무엇이 된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아흔 살 노인도 아니고 갓난아이도 아니건만 대체 이 기사는!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제복 뒷덜미를 잡아 일으켰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돌부리에 머물렀다. 마저 제거하지 못해 굉장히 아쉬워 보였다.

“이……!”

리카르디스는 순간 욱했지만 심호흡하며 겨우겨우 제 마음을 가다듬었다. 다른 이였다면 괴롭힘의 일종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상대는 로젤린이었다. 모두 자신을 지키기 위한 마음에서 나온 행동일 것이다. 잘 알고 있다. 그래, 알고는 있지만…… 과해도 너무 과했다.

“나도 눈이 있어, 로젤린 경. 돌부리는 내가 알아서 피할 테니, 좀…… 그만하지.”

리카르디스는 이를 으드득 갈았다. 주위에서 사라지라고 하고 싶었으나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몇 분 전, 참다못해 휴식시간을 줘서 억지로 내보냈더니 고작 꿀벌의 출현과 함께 바람처럼 다시 나타났다. 떨어져 있는 시간과 거리에 비례해 그녀의 호위는 더욱 강화되었다.

그녀는 얘기에 전혀 집중하지 못한 채 계속 주위를 휙휙 둘러보고 있었다. 경계심이 극도로 높아져 있는 모습이었다.

타국이라서? 오랜 숙적의 땅이라서? 기사단장의 말에 다시금 위험을 깨달아서? 아니면 그녀 혼자만 아는 무언가가 있어서? 짐작만 할 뿐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더 이상 돌아다니다가는 하카브 왕자를 만나기도 전에 로젤린 때문에 혈압이 올라 죽을 것 같았다. 로젤린은 불안한 듯 주위를 더 둘러보았다. 곧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얼른 쫓았다.

* * *

리카르디스는 깊게 잠들지 못했다. 몇 날 몇 밤을 새더라도, 고작 비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뜨기도 했고, 방 안의 촛불이 꺼진 정도로 일어나기도 했다. 그에게 방심이 허락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방심은 위기로 직결되며, 자는 순간 또한 예외가 아니다. 위기는 개인 사정에 맞춰서 찾아오지 않는다. 리카르디스는 어린 나이 때부터 그 사실을 이미 깨우쳤다.

그 결과, 리카르디스는 수면을 취할 때에도 제 무의식을 어슴푸레 인식 할 수 있는 곳까지 끌어올려 둘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누군가에게는 질병이라고 불릴지라도 리카르디스는 흡족하게 생각했다.

리카르디스는 방 안을 감싸는 공기가 미세하게 달라졌음을 느꼈다. 고요하게 흐르던 공기를 가르고 다른 공간에서 바람이 밀려왔다. 부드럽게 천이 스치는 소리에는 풀냄새 따위가 섞여있었다. 누군가가 들어왔다. 리카르디스는 몽롱하게 잠에 빠진 채로 기척을 읽었다.

‘…….’

창문이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니, 알려지지 않은 통로로 온 손님일 것이다. 그럼에도 경계심이 들지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감은 채로 그대로 누워 있었다.

“로젤린.”

“네, 전하.”

리카르디스의 귓가로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젤린 또한 전혀 놀랍지 않다는 태도였다. 잠시 끊겼던 대화를 지속하는 듯 자연스러웠다. 리카르디스는 부스스 눈을 떴다. 머리맡에 검은 인영이 우뚝 서 있었다. 방 안을 밝히고 있는 불빛이 희미하게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흔들리는 촛불이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일렁였다. 리카르디스는 잠결에 벌어진 셔츠를 정리했다

“어디로 들어왔지? 문 열리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천장에 길이 있었습니다.”

“뚫어놓은 발타 놈들이나, 그걸 찾아서 오는 경이나. 재주도 참 좋군.”

“처음에는 창문으로 들어오려고 했는데 파르딕트 경한테 걸려서…….”

혼났습니다. 그녀의 숨겨진 뒷말을 읽었다. 리카르디스는 잠에 취해서 흐리게 웃었다. 이 어두운 밤에도 제 호위 기사들은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 중인 듯 했다. 그 로젤린으로부터 창문을 사수할 정도면.

리카르디스는 그녀에게 굳이 왜 왔느냐, 뭐 하러 왔느냐. 하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오늘 하루 내내 유별난 호위를 펼치던 로젤린의 모습은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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