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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없는 밤-37화 (37/220)

37화.

로젤린은 사절단이 머무는 궁을 향해 급하게 달려가던 도중, 담벼락에서 마카롱과 만났다. 회색 쥐는 달리고 있는 로젤린의 머리카락에 재주 좋게 매달렸다. 그녀의 귓바퀴 뒤에서 마카롱이 찍찍 이야기했다. 궁을 돌아다니면서 마력을 몸에 지니고 있는 자를 많이 보았다고 했다.

“얼마나 많은데?”

마카롱의 대답에 로젤린은 사나운 얼굴을 한층 더 사납게 만들었다. 방금 전 하카브의 수족들을 보면서 떠올랐던 불길한 예감. 혹시나 이런 자들이 예상보다 더 많은 것은 아닌가? 가늠할 수 도 없이, 셀 수도 없이?

그녀의 추측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마카롱은 짧은 다리로 많은 장소를 돌아다녔다. 경악의 연속이었다. 앞서 마주했던 기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어마어마한 양에 압살 당할 것만 같았다.

마카롱은 선천적으로 마력을 타고나는 마인(魔人)을 만나 본 적 있었다. 마인이 가진 마력의 기운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마력과 매우 흡사했다. 온건하고 조화로웠다. 이렇게나 난폭하게 모든 것을 찢어발길 듯이 폭주하는 힘이 결코 아니었다. 그런 그들을 단순한 ‘마인’이라고 보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순간 마카롱은 떠올렸다. 붉은 안광을 띄고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공격하는, 그 사나운 짐승들. 마수. 커다란 짐승들조차 감당하지 못한 힘을 한낱 인간이 운용한다고? 마카롱은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마카롱은 감각을 벼려 넓은 궁을 훑어보았다. 밤보다 어두운 기운이 진득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로젤린은 높이 올려 묶었던 머리를 풀었다.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흐트러졌다. 마카롱이 머리 안쪽에 몸을 파묻고 찍찍 소리를 내며 다 숨었다고 신호했다. 로젤린은 눈앞의 창문을 힘차게 열었다.

벌컥 문이 열리기 바로 전. 호위 기사들은 창밖에 누군가가 있음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검을 빼들고 경계 중이던 그들의 시야로 익숙한 이의 얼굴이 보였다. 로젤린은 날카로운 검 끝을 그저 멀뚱히 쳐다보았다.

“무슨 일 있습니까?”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태도에 호위 기사들이 한숨을 쉬며 짜증냈다. 왜 멀쩡한 문을 두고서 창문으로 들어오고 난리란 말인가. 일단 로젤린의 얼굴이긴 했으나, 검은달이 다른 사람의 얼굴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상황을 대비해 그들은 로젤린을 향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발타의 성전을 읽고 있던 리카르디스는 기가 찬다는 듯 그 대치 상황을 바라보았다. 보통 호위 기사를 흉내 내려는 암살자라면, 결코 창문으로 들어오는 수상한 짓은 안 할 것이다. 저건 어느 모로 보나 백퍼센트 로젤린이었다. 리카르디스가 발타의 성전을 뒤적거리며 입을 열었다.

“발타에서는 아침밥으로 샐러드만 먹는다더군. 알고 있었나, 로젤린 경?”

물론 거짓말이었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로젤린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로젤린은 헉 숨을 들이켜며 제 입을 막았다. 어…… 어떻게…… 그토록…… 잔인한…… 이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표정이었다.

“정말입니까? 정말…… 풀만 나옵니까?”

로젤린이 충격에 횡설수설하자 리카르디스가 무심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

“샐러드.”

호위 기사들이 검을 집어 넣었다. 그녀는 로젤린이 맞다. 음식을 좋아하는 사실은 쉽게 파악할 수 있다고 해도, 분위기를 읽고 해석하는 능력이 전무하다시피 한 저 모습은…… 흉내 내기도 힘들 것이다. 어느 누가 날카롭게 벼려진 검 날이 자신을 향하는데, 태평하게 음식 얘기나 하고 있단 말인가. 심지어는 2황자 전하의 말이 자신을 시험한다 생각조차 하지 않는 듯 했다.

“우리는 발타 사람이 아닌 데다가 손님이니 채소만 나오진 않겠지.”

리카르디스는 상황이 종료된 것을 보고 거짓말을 수습했다. 로젤린이 방긋 웃었다. 아침햇살 저리가라 할 정도로 환한 미소였다. 상급 기사들이 어처구니 없어하는 사이에, 로젤린이 가볍게 창문을 넘어왔다.

그녀는 방 안에 있던 부단장 나단에게 잠시 구석으로 불려가 혼났다. 창문으로 드나들면 안 되겠지, 로젤린 경? 그녀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급히 창문으로 들어와야 할 만큼 중대한 사항이 있으리라 믿고 있네. 그렇지, 로젤린 경?”

부단장 나단이 은근히 압박을 주었다. 리카르디스도 발타의 성전을 덮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젤린은 눈동자를 굴렸다. 디에즈 황자의 건 이전에, 발타의 궁에서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이상한 마력의 기운 때문에 불안해졌다. 그래서 무작정 찾아 왔다.

칼릭스는 그녀에게 마력을 감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말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마인(魔人)이라고 생각되어 어쩌면 하얀밤 기사단에서 제명 될 가능성이 있으며, 또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로젤린은 걸릴 만한 주제는 걸러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카롱을 찾으러, 잠시 밖에 나갔습니다.”

“음……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계속 해 보게.”

“그러가다 이 궁에서 좀 벗어난 꽃밭에 들어갔습니다.”

“단독 행동을 하지 말라는 얘기는 전혀 안 들었다는 건 잘 알겠네.”

나단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리카르디스도 턱을 괴고 그녀의 얘기를 집중했다.

“뒤에서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나서, 뒤돌아봤더니 모르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힉살라 아돈의 첫 번째 아들 하카브라고 했습니다.”

“뭐?!”

리카르디스는 인상 쓰며 버럭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단은 당황을 숨기려고 애써 보았지만, 콧수염이 씰룩거리며 그의 마음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다른 상급 기사들도 입을 쩍 벌렸다. 갑자기 왜 거기서 하카브가 튀어나온단 말인가?

나단은 솔직히 로젤린이 쓸모없는 얘기를 하리라 예상하고서, 이미 혼낼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하카브, 발타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의 이름이 그녀의 입에서 나올 줄이야. 인사만 했다고 한들 결코 가볍게 넘어갈 수 있을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그자가 그대에게 뭐라고 했나! 그대는 그자에게 뭐라고 했어!”

리카르디스가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하카브와의 우연한 만남. 그것을 계기로 무언가 틀어진 부분이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로젤린은 눈동자를 잠시 위로 굴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하카브가 자신에게 했던 말은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아름다운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군.”

방안에 순식간에 싸한 기운이 돌았다. 상급 기사 파르딕트가 제 귀를 후볐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헷갈리는 듯 했다. 리카르디스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나단은 헛기침을 몇 번 하긴 했지만, 비교적 빨리 평정을 찾았다. 로젤린은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왕자가 그렇게 말해서, 제가 감사합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왕자가 ‘황자의 기사인 것 같은데…… 제법 멀리까지 나왔군. 그대, 이름은?’이라고 물어서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

“…….”

“그랬더니 왕자가 ‘강인해 보이는 좋은 가문 명이야, 이름도 예쁘고.’라고 해서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

리카르디스는 으으음 하고 깊게 신음했다. 지금 자신이 뭘 듣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카브 그 자식은 왜 남의 기사에게 껄떡대고 있는 거지? 그는 로젤린을 남자로 치환해서 상황을 다시 상상해보았다.

몇 부분이 좀 걸리긴 하지만, 단순히 검은 머리 자체에 대한 호감이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제가 경계하고 있자, 왕자가 ‘나는 힉살라 아돈의 첫 번째 아들. 하카브다.’라고 소개를 해 왔습니다. 그 전까지 왕자라고 생각 못하고 있었지만 무례를 저지르진 않았습니다.”

로젤린은 무표정한 얼굴로도 매우 뿌듯해하고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왕자의 소개에 ‘발타의 첫 번째 아들을 뵙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왕자에게 인사하는 법은 알고 있었군.”

리카르디스는 ‘용케’라는 단어를 겨우 빼고 그녀에게 칭찬 아닌 칭찬 비슷한 걸 했다.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일라베니아 식으로 인사하려고 했는데, 왕자가 먼저 볼에 입을 맞춰 와서…….”

“뭐?!”

“뭐!”

그 미친놈이! 검은 머리 자체에 대한 호감은 개뿔. 하카브 왕자는 로젤린에게 갖은 수작질을 하고 있는 게 맞았다. 리카르디스가 인상을 찌푸리고 부단장 나단도 애써 유지하던 평정을 깨트렸다. 그놈이 건드릴 여자가 없어서 이 어린애를! 나단이 무섭게 화냈다.

물론 로젤린이 어린아이는 아니지만 그녀의 행동을 쭉 지켜봐 온 부단장에게는 아이만큼 어리숙하게 느껴졌다. 상급 기사들의 기세도 흉흉해졌다. 발타의 더러운 들개 놈이 감히 우리 동료를 건드려? 심지어는 그게 수작질이라고 인식도 못하는 맹한 애한테!

로젤린은 생각지도 못한 그들의 격한 반응에 말을 멈췄다. 머리카락 안쪽에서도 찍찍찍! 하는 울분에 찬 쥐 울음소리가 들렸다. 로젤린은 찍찍거리는 격한 소리를 콜록콜록 헛기침을 내뱉어서 무마했다. 나랑 떨어져 있던 그 짧은 사이에 대체 어떤 놈팡이가! 마카롱이 분노했다.

로젤린은 티 나지 않게 몸을 움츠렸다. 정확한 분노의 원인은 잘 모르겠지만, 발타식 인사에 대해서 다들 화내는 듯 보였다. 아까 전 5황자 디에즈 또한, 일라베니아의 사람에게 발타의 개방적인 풍습을 강요하지 말라고 하지 않던가.

“…….”

로젤린은 하카브에게 발타 식으로 인사를 돌려주려 했던 사실을 조용히 묻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혼날 것 같았다. 위기감을 비료로 삼아 눈치라는 꽃이 피어난 순간이었다.

“또 그 자식이 무슨 짓을 했지?”

“아무것도 안했습니다. 디에즈 황자님이 오셔서 전하께서 부르신다고, 가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급하게 왔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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