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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없는 밤-36화 (36/220)

36화.

로젤린은 돌아가는 도중에 리카르디스의 방에 한 번 더 들렀다. 검만 안 들었다 뿐이지 사방에 적이 포진해 있는 상황이었다. 그녀의 경계심은 늦춰질 새 없이 단단해져 갔다.

“실례합니다, 전하.”

로젤린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갔다. 리카르디스는 상의를 벗은 채, 하의마저도 막 벗고 있던 중이었다. 방 안에 같이 있던 상급 기사들과 잇세리온은 로젤린의 기습에 쩍 굳었다. 리카르디스의 인상이 사나워졌다. 그가 한 자 한 자 씹어 먹을 듯이 이를 갈며 말을 내뱉었다.

“나가.”

로젤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방안을 쭉 둘러보며 이상한 점은 없는지 구석구석 살폈다. 방 안에 있는 상급 기사들만 죽을상을 했다. 리카르디스는 여전히 골반쯤에 걸쳐진 바지를 붙잡고, 올리지도 내리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한참을 둘러본 로젤린이 꾸벅 인사하고 나가자마자 리카르디스는 제 옷을 패대기쳤다. 진짜 저 기사를 내가 진짜…….

* * *

방으로 돌아갔지만 마카롱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회색 쥐를 찾기 위해 침대 밑, 이불 아래, 창문 틀, 물 컵 안 등등을 살폈다.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몇 시간 전에 궁을 뒤덮은 난폭한 마력을 살펴보겠다고 방을 나섰는데, 해가 진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마카롱을 찾으러 가기로 결심했다.

현재 리카르디스를 호위하고 있는 인물들은 뛰어난 실력을 가진 상급 기사들이었다. 더군다나 발타의 왕궁이라는 위치적 특수성 때문에 호위 인력은 평소의 배로 불어난 상태였다. 로젤린은 안심하고 잠시 그의 곁을 떠나 있을 수 있었다.

“마카롱.”

복도에서 한참을 돌아다녀 봤지만 궁에 살고 있는 고양이만 몇 마리 발견했다. 자그마한 회색 쥐를 좋아할 것처럼 생긴 고양이들이었다. 불안감이 차올랐다. 로젤린은 걸음을 바쁘게 움직여서 사절단이 머무르는 궁을 벗어났다.

꽃이 피어 있는 화원이었다. 밤의 장막에 가려져 있지만 햇살을 받는다면 오색찬란하게 빛날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꽃이나 풀의 냄새가 일라베니아와는 달랐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킁킁 코를 움직여서 냄새를 맡다가 아차하고 목적을 상기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마카롱.”

한밤중의 고요한 화원에서 적국의 기사가 마카롱을 애타게 원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봤더라면 매우 이상한 상황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는 한참을 돌아다녔다. 그때 로젤린의 예민한 귓가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크기로 보아 작은 동물은 아니었다. 일부러 나뭇가지를 밟아 제 존재를 알리고자 하기에, 로젤린은 그 소리의 주인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뒤돌아본 그녀의 시야로 한 사람이 들어왔다. 발타인의 특징인 검은 머리와 구릿빛 피부를 가진 남자였다. 하지만 낮에 본 퉁퉁한 재상 아틸라크와는 생김새가 매우 달랐다.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다. 둥그렇고 부드러운 눈매에 비해 인상이 사나웠는데, 눈썹이 짙고 골격이 단단해서 그런 것 같았다. 옷 또한 재상과 비슷했지만 그보다 더 화려했다. 바닥에 자락이 끌릴 정도로 더 길기도 했다. 남자는 로젤린과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몇 번 걸으니 어느새 로젤린의 앞에 도착해 있었다.

“아름다운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군.”

정작 그렇게 말을 꺼낸 남자의 머리카락 또한 검은 색이었다. 로젤린의 머리카락보다 색이 밝아, 빛을 받는다면 흑갈색처럼 보일 것이다. 검은 머리는 일라베니아에서 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 흔한 색 또한 아니었다. 제국 내에서도 ‘와, 검은 머리네요’ 하는 소리를 간혹 들을 정도였으니, 발타인의 입장에서는 희귀하게 생각 될 법도 했다. 남자는 로젤린의 검은 머리카락이 흥미로운지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남자의 시선이 그녀의 하얀 제복 위에서 떠돌았다. 수놓아진 하얀밤 기사단의 문양을 발견한 남자가 웃었다.

“황자의 기사인 것 같은데…… 제법 멀리까지 나왔군. 그대, 이름은?”

하대는 아주 자연스러웠다. 남자가 발타의 높은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그녀의 추측이 힘을 얻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입니다.”

“강인해 보이는 좋은 가문 명이야. 이름도 예쁘고.”

“감사합니다.”

이렇게나 짧은 시간 안에 연달아 칭찬하는 사람은 칼릭스와 레이몬드 이후로 처음이었다. 좋은 사람인 건가? 한데 이상하게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로젤린의 본능이 남자를 경계했다. 남자는 로젤린이 껄끄러워 하는 기색을 눈치챈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힉살라 아돈의 첫 번째 아들. 하카브다.”

로젤린도 아는 이름이었다. 발타의 1왕자. 병환을 앓고 있는 발타의 왕을 대신해서 실질적인 통치를 하는 능구렁이 같은 자라고 했다. 능구렁이라는 주석은 리카르디스가 달았지만, 칼릭스나 레이몬드도 비슷한 평가를 했다. 많은 사람들을 가차 없이 죽이는 무서운 사람이라고도 했다.

‘…….’

로젤린은 마주한 남자의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무섭다기보다 기묘했다.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왕자가 웃는 모습에 로젤린은 급하게 상념에서 깨어났다. 여태껏 빤히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왕자라고 했지. 혹시 그가 왕자라고 밝히기 이전에 무례를 저질렀던가? 이것은 어떤 사고의 한 종류가 아닌가? 로젤린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아닌 듯 했다! 그녀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발타의 첫 번째 아들을 뵙습니다.”

로젤린이 말하며 고개를 숙이려고 하자, 하카브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아 다음 행동을 저지했다. 로젤린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곧 하카브의 차가운 입술이 그녀의 볼에 무겁게 눌러졌다. 그는 쪽 하고 일부러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로젤린의 코앞에서 하카브가 씩 웃었다.

“힉살라 아돈의 영혼이 그대와 함께한다.”

아, 발타로 떠나기 전에 레이몬드가 가르쳐 줬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연장자가 그보다 어린 이들에게 먼저 볼에 입을 맞춘다. 이후 받은 사람이 입맞춤을 돌려준다. 가까운 가족뿐 아니라 친구나 사무적인 관계에서 까지 넓게 통용된다고. 하물며는 처음 보는 사람끼리도 볼에 입을 맞춘다고 하니, 일라베니아로 치면 그저 악수를 하거나 손을 흔드는 인사방법인 셈이었다.

“…….”

로젤린은 눈동자를 또르륵 굴렸다. 기사로서 보이는 정식적인 예우는, 일라베니아 황족 이외에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었기에 가볍게 묵례를 할 예정이었는데…… 계획이 와장창 다 깨져 버렸다. 이제 어떤 인사를 해야 하지? 일라베니아식? 발타식? 로젤린이 눈동자를 굴리며 고민하고 있자, 하카브가 웃었다. 그러고는 그녀 가까이에 얼굴을 살짝 가져다 대는 모습이, 눈치가 없는 로젤린이 봐도 발타 식으로 돌려달라는 얘기였다.

로젤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하카브가 훌쩍 컸기에, 그녀는 발끝으로 서서 그의 어깨를 살짝 짚었다. 하카브가 로젤린에게 맞춰 몸을 조금 숙였다. 남자의 얼굴이 더 가까이 다가오던 참이었다.

“로젤린 경!”

누군가가 뒤에서 그녀를 끌어당겼다. 로젤린의 입술은 하카브의 피부를 스치지도 못하고 떨어졌다. 로젤린은 단단하게 안겨있는 상태였다. 남자의 가슴이 등 뒤로 느껴졌다. 막 뛰어 온 듯 크게 부풀었다 가라앉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귓가에 거친 숨소리가 울렸다. 남자는 로젤린의 어깨를 꾸욱 한 번 더 깊게 감싸 안은 후에 풀어줬다.

로젤린은 고개만 살짝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표정으로 하카브를 마주하고 있는 5황자 디에즈가 보였다. 사절단의 여정이 고단해도 한 번도 찌푸려진 적 없던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처음 만날 때부터 생글생글 웃기만 하던, 그녀의 기억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장난이 지나칩니다, 하카브 왕자. 일라베니아의 사람에게 발타의 개방적인 풍습을 따르라니요. 로젤린 경이 당황하지 않겠습니까.”

개방적인 인사와 개방적이지 않은 인사의 차이를 알지 못했지만, 로젤린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디에즈는 그녀의 팔을 잡아끌어 제 등 뒤로 쏙 넣었다.

“발타에 오면, 발타의 뜻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디에즈 황자?”

“저랑은 몇 년을 알고 지내면서도 안하셨던 인사 같은데…….”

“그거야 뭐…….”

가벼운 어조로 얘기를 주고받는 것치고는, 맹수 두 마리가 격돌 직전 탐색전을 하듯 살벌한 분위기였다. 친분이 있다는 관계라 들었는데 그다지 살가워 보이진 않았다. 디에즈가 로젤린의 등을 밀어냈다.

“형님이 찾으시더군요. 먼저 들어가 보세요, 로젤린 경.”

“예.”

떠나는 로젤린의 등 뒤로 하카브가 웃음기 어린 인사를 건넸다.

“또 보도록 하지. 로젤린.”

로젤린은 하카브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 화원을 벗어났다. 어쩐지 사람의 발소리가 많이 들리더라니. 쥐 한 마리 찾을 수 없던 아까와는 달리 수많은 인원이 화원을 둘러싸고 있었다. 디에즈의 심복들도 몇 있었고, 무장한 갈색 피부의 사람들도 많았다. 아마 하카브의 사람일 것이다. 그들의 몸 안에도 광폭한 마력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낮에 보았던 경비대보다 더 많은 양의 마력이었다. 로젤린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가슴이 기분 나쁘게 울렁거렸다.

어두운 밤, 궁과 떨어져 있는 작은 화원. 주위를 지키는 사람들. 이 장소에서 디에즈와 하카브는 미리 만나기로 약속했던 게 아닐까. 그녀는 화원을 벗어나 천천히 궁을 향해 걸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얼핏 들려왔다.

[예민하게 굴기는.]

[타국의 기사한테 치근덕대지 마세요. 없어 보입니다.]

[밤보다 깊은 검은 머리더군. 아름다웠다. 하얀 피부를 예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오늘 처음 일라베니아의 미의식을 아주 조금 이해한 것 같기도 해.]

[치근덕대지 말라니깐요.]

두 남자는 그렇게 중요해 보이지 않는 안건으로 한참을 티격태격 다퉜다.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연회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양고기 요리를 올려 달라고 하던 디에즈가 여상하게 말을 이었다.

[엘피디오의 전언입니다.]

주위에 로젤린을 지켜보는 시선들이 있었다. 그녀는 계속 걸을 수밖에 없었다. 디에즈와 하카브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들을 수 있는 반경을 점점 넘어서고 있었다.

이내 그녀의 귓가에는 풀벌레가 찌르르- 우는 소리만 들려왔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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