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로젤린은 마카롱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또한 발타의 성문이 열리고 경비대와 조우한 이후로 줄곧 눈치채고 있었다. 로젤린은 눈을 감았다. 시선은 차단되었지만 그녀의 감각이 주위의 광경을 그려냈다. 군마 무리, 기사들의 갑주가 철컹이는 소리. 마차의 수레바퀴가 흙 자갈 위를 굴러가는 가운데 당장에라도 터질 듯한 불안정하고 난폭한 기운이 주위에 넘실거렸다. 마수 한 마리의 마력이 횃불이라면, 지금 이것은 주위를 온통 뒤덮은 산불처럼 범람해 있었다. 로젤린은 이것과 비슷한 기운을 느낀 적 있었다. 리카르디스의 홍차에 섞여 있던 ‘파편’과 ‘마수’ 라 불리는 흉포한 짐승들로부터.
아틸라크라는 재상에게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사절단을 둘러싼 경비대 한 명, 한 명이 모두 그 기운을 품고 있는 상태였다. 그 탓에 마수가 많기로 유명한 마의 산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진풍경이 그녀의 감은 눈 위로 펼쳐졌다. 이렇게 한곳에 응집해 있을 수 있는 힘이 결코 아니었다. 기괴한 광경을 마주하자 신경 하나하나가 저릿할 정도로 오싹했다. 팔 위로 소름이 돋아났다. 마카롱이 식겁해서 계속 무어라 말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마카롱 또한 이렇게 마력이 응집되어 있는 경우는 보지 못했던 것 같았다.
로젤린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발타의 많은 백성들이 사절단 일행을 구경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다행히도 일반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저 경비대가 특수한 집단인 모양이었다.
로젤린은 불안한 마음에 리카르디스의 마차 근처로 말을 바싹 붙여 몰았다. 마차를 끌고 있는 말들이 푸르릉, 소리 내며 성질낼 정도였다. 마카롱이 말의 투레질 소리를 듣고 얼른 주머니에서 기어 나와 말들에게 삿대질하며 화냈다. 늙은 할머니랑 살았다더니 욕하는 솜씨가 남달랐다. 찍찍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져서 로젤린은 마카롱을 다시 들여보냈다. 다행히도 이 상황을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
발타는 넓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수도의 중앙에 위치한, 화려하기 그지없는 궁에 도착했다. 사절단의 일정으로 1왕자 하카브와 만나기로 한 것은 이틀 뒤. 오늘은 막 도착한 만큼 짐을 풀고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아틸라크는 사절단을 위해 궁 하나를 통째로 비워 두었다. 기사들이 먼저 리카르디스의 방을 샅샅이 확인하고 나서야 모두가 휴식에 들어 갈 수 있었다.
로젤린도 방을 배정받아 갑옷을 벗고 무구를 손질했다. 갑옷 위에서 마카롱이 계속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쌀알만 한 눈동자가 가느스름해져 깨알만 해져 있는 걸 보니, 성질이 보통 나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이질적인 마력의 농도가 기분 탓으로 넘길 수 없을 만큼 더욱 짙어졌다. 발타의 궁전을 고요하게 둘러싸고 있는 힘은 그들을 압도하듯이 거대한 몸집을 지니고 있었다. 이 넓은 궁전 전체가 커다란 마수의 입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로젤린은 검 날을 뽑아 들어 달빛에 비춰 보았다. 검이 날카롭게 빛났다.
“위험하면 도망가, 마카롱.”
찍찍. 마카롱이 그녀를 째려보았다.
“나는 도망 갈 수 없어.”
찌치지지찍! 쥐가 펄쩍펄쩍 뛰었다.
“지켜야 하는 사람이 있어. 이번에는 반드시.”
이번에는? 마카롱이 물었다. 로젤린은 자신의 입으로 내뱉었으면서도 이게 무슨 의미인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만 했다. 그를 지키는 임무에 실패한 적은 없었는데…… 갑자기 왜 그 말이 튀어나왔을까. 로젤린과 마카롱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해답을 들려 줄 사람은 없었다. 밤이 깊어갔다.
기사단장 스타스가 하얀밤 기사단을 모두 모아 주의사항을 전달했다.
“발타까지 오느라 다들 고생 많았네.”
다들 새삼스럽게 왜 이러냐는 둥, 월급 올려 달라는 둥 농담을 했다. 스타스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로젤린이 감탄하며 그의 웃는 모습을 바라봤다. 천년 묵은 돌 같던 기사단장의 미소란 제법 희귀했다. 주머니에 들어가 얼굴만 쏙 내밀고 있던 마카롱이 꿈틀거리면서 움직였다. 잘생긴 수컷…… 어쩌고 말했는데 정확하게는 알아듣지 못했다.
“일라베니아로 귀환하는 길에 진정한 위험이 닥친다고 하더라도, 이 궁에 발을 들이고 있는 한 어떤 장담도 할 수 없다는 건…… 그대들도 잘 알고 있을 거라 믿네.”
상급 기사들이 예, 하고 우렁차게 대답했다. 스타스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한층 더 무겁게 느껴질 정도로 어두운 낯빛이었다.
“만일의 경우를 위해 미리 말해 두겠네. 기사단장인 나, 부단장 부관 레이몬드 경. 상급 기사 중에는 파르딕트 경, 카일로 경, 로젤린 경, 헤일 경. 그리고 하급 기사 중에는 네스터 경, 클로드 경, 바스티안 경, 슈텐 경, 아르만 경. 궁에서 전투가 발생할 시, 기사단장 제외 총 열 명의 인원이 2황자 전하와 5황자 전하를 모시고 발타의 궁을 탈출한다. 호명되지 않은 기사들은 무력으로 응전하며 탈출을 위한 시간을 벌어야 한다. 모두들 언젠가의 맹세를 떠올리며 목숨을,”
바쳐라.
등골을 스치는 서늘한 울림이었다. 하얀밤 기사단원의 모두가 몸을 곧게 세웠다. 강한 결의가 두려움을 억눌렀다. 어느 누구 하나 제 처지를 비탄하며 흐트러지지 않았다. 눈빛은 형형하게 빛나고 견고한 신념 아래 그들의 맹세가 다시금 새롭게 새겨졌다.
상급 기사 앞에 서 있던 부단장 나단과 그의 부관인 레이몬드가 스타스를 향해 경례했다. 이후 상급 기사 하급 기사 할 것 없이 그들과 똑같이 심장 위에 주먹을 올렸다. 스타스 또한 단단하게 굳어진 부하들을 보며 심장 위에 주먹을 올렸다. 기사단장의 낮은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정적을 깨며 방안을 울렸다.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그대들에게.”
* * *
일라베니아의 사절단 일행이 머무르는 궁에는 많은 눈이 붙어 있었다. 하녀와 하인들, 천장 위, 바닥 아래, 나무 위 등. 그러나 그저 사절단의 동향을 감시할 뿐, 어떠한 살의도 비치지 않았다. 의뭉스러운 타국의 시선은 로젤린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있었다. 죽여야 하나? 아니, 발타에서는 함부로 사람 죽이면 안 된다고 칼릭스가 그랬는데. 어쩌면 좋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이 행동은 해도 되는 것인가? 아닌가? 헷갈리신다면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행동하셔야 합니다. 반. 드. 시. 누님과 가깝다거나, 누님이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반. 드. 시.]
로젤린은 우물쭈물 망설이다가 기사단장의 방문을 노크했다. 가까운 사람이라 하면 레이몬드지만, 최근에는 같은 집단 내에 있으면서도 거의 마주치지 못했다. 사절단 책임자 중 한 명으로 여기저기 바쁘게 다니는 걸 봤을 뿐이었다. 이후 믿을 만한 사람이 누군가 생각해 보았더니 기사단장 모습이 딱 떠올랐다.
“들어오게.”
임시 배정된 기사단장실에 들어가니 스타스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도 많았다. 부단장 나단과 부단장 부관 레이몬드, 상급 기사 몇이 지도를 펼쳐놓고 무언가를 회의 중이었다. 레이몬드가 눈웃음치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로젤린도 살짝 웃었다.
“무슨 일인가, 로젤린 경?”
로젤린은 머뭇거리다가 기사단장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생각보다 더 가까이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에 스타스는 답지 않게 당황했다. 레이몬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로젤린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봤다. 언제든지 달려가서 로젤린을 막을 준비가 되어 있는 비장한 눈빛이었다.
로젤린이 스타스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하듯 한쪽 손으로 입을 가렸다. 레이몬드는 고개를 쭉 내밀어서 그 근처에 귀를 두었다. 그녀가 어떤 폭탄 발언을 할지 매우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로젤린,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배가 고픕니다? 내일 아침은 뭐가 나옵니까? 집에 돌아가도 됩니까? 뭐가 나와도 상사의 귓가에 남모르게 속삭일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레이몬드는 고개를 쭉 빼고 있어서 조금 흉한 몰골이 되어 버렸지만 그 덕에 그녀가 하는 말을 전부 엿들을 수 있었다. 곁에 서 있던 부단장 나단이 질색하는 표정으로 레이몬드를 쳐다보았다. 아이를 과보호하는 부모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사이 로젤린의 질문이 레이몬드와 스타스의 귓가로 흘러들어 갔다.
‘궁을 주시하는 자들이 있는데 죽여도 됩니까?’
“…….”
“…….”
스타스는 조용히 음…… 하며 신음하더니,
“안 된다.”
라고 했다. 레이몬드도 “안 돼, 로젤린.” 하고 딱 부러지게 대답했다. 로젤린은 칫, 혀 차는 소리를 냈다. 어지간히도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그녀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나름 평화 사절단이라는 이름으로 방문한 상태였다. 발타에서 전쟁을 일으킬 만한 명분을 일라베니아 측에서 먼저 제공할 수는 없었다. 궁을 주시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공격한 것은 아니었다. 이쪽에서 먼저 그들의 목숨을 끊으면 도리어 사절단 쪽의 입장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지금은 인내해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로젤린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 기사단장의 귀로 돌진했다. 레이몬드도 다시 그 공간 사이에 파고들었다. 아까보다 더 가까운 거리였다. 부단장 나단은 전보다 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죽이지만 않으면 됩니까?’
“안되네.”
“안 돼!”
전혀 알아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로젤린의 볼이 부루퉁해졌다. 그녀는 기사단장과 레이몬드에게 혼났다. 절대, 절대 절대로 손끝 하나 대지 말라고, 먼저 덤벼 오지 않는 한은 절대로 안 된다고 했다. 로젤린은 그 짧은 사이에 ‘절대’와 ‘안 된다’라는 말만 수십 번을 들었다.
그녀는 결국 수긍의 표시로 고개를 위 아래로 천천히 움직였다. 그들 사이에서 커다란 한숨이 나왔다. 어찌 되었거나 궁을 지켜보는 시선을 눈치챈 일만은 칭찬할 만했다. 로젤린은 기사단장에게 눈의 위치를 낱낱이 알려 주고 방을 나섰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