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34화 (34/220)

34화.

독수리는 제 날개깃을 부리로 정리했다. 로젤린은 그 날개를 손으로 쓸어보았다. 빠듯하면서도 매끄럽고 탄탄한 갑옷 같은 감촉이었다.

“매를 데리고 다니는 사냥꾼은 장갑이랑 팔 보호대 같은걸 하고 있었어. 발톱이 날카로우니깐.”

독수리는 제 한쪽 발을 들어서 까딱거렸다. 송곳같이 날카로운 발톱이 보였다. 사냥꾼이 온갖 가죽을 가지고 있는 걸 본 적 있다. 그것을 대충 잘라서 두르면 될 것 같았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말하면 안 돼.”

독수리는 조류의 대가리를 하고도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너냐’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쨌거나 인간이 데리고 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완벽한 동물을 찾아내어 한 사람과 한 마리는 매우 만족했다.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 왔다. 막사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이른 아침부터 사절단 일행이 있는 장소를 덮친 커다란 동물 때문이었다. 사냥꾼이 활을 쏘려고 했지만 로젤린이 황급히 나서서 만류했다.

영역을 침범한 인간을 공격하러 왔으리라 추측했으나 독수리는 얌전히 로젤린의 팔 위에 앉아 있었다. 마수라고 봐도 될 정도로 체구가 큰 독수리였다. 로젤린은 무겁지도 않은지 그 무게를 잘 지탱하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그녀에게 질문했다. 조금 피곤해 보였다.

“……그건…… 또 뭐지, 로젤린 경?”

리카르디스는 어쩐지 어제가 떠올랐다. 대체 토끼를 어떻게 잡아 왔느냐는 뜻으로 그게 무엇이냐 물었더니 “토끼입니다…….”라는 대답을 했던 그녀의 모습이.

“독수리입니다.”

리카르디스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예상은 했지만 짜증났다.

“독수리가 왜 경과 함께 있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건가?”

독수리와 로젤린은 조용히 당황했다. 사냥꾼들이 매를 데리고 다닌다고 했는데, 매나 독수리나 그게 그거인 거 같은데, 이상한 거 아니라 했는데. 왜 다들 저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지?

리카르디스가 대답을 재촉했다.

“경?”

로젤린은 독수리를 쳐다보면서,

“아는 독수리입니다.”

라는 대답을 했다. 리카르디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당최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독수리는 그녀의 말을 입증이라도 하는 듯, 부리의 넙적한 부분을 로젤린의 머리에 부비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여전히 사나운 표정이었다. 로젤린은 예전에 칼릭스에게 배운 마법의 말을 또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모릅니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정확한 건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리카르디스는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래, 살다보면 아는 독수리 한 마리쯤은 있을 수도 있지. 그 독수리가 몸집이 어마어마하게 크다던가, 일라베니아에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발타의 땅에서 갑자기 튀어나왔다던가하는 문제는 딱히 신경 쓸 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리카르디스는 결국 또 “그래…….”라는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더 이상 깊게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

동료 기사들도 처음에는 이 상황에 의문을 가졌지만 독수리가 첩자나 암살자일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다들 로젤린의 곁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독수리의 날개를 한 번 만져 보기도 하고, 그 크기에 감탄도 하면서 나름 즐거워했다.

사냥꾼은 독수리가 얼마나 위험한 동물인지 알고 있어, 다가오지 못하고 한참을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하지만 곧 독수리가 위험하지 않다 못해 온순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조심스럽게 로젤린에게 접근했다.

“덩치도 크고, 부리도 튼튼해 보이고. 굉장히 멋진 독수리로군요. 언제부터 기르게 되신 겁니까, 로젤린 경?”

어제 만났다.

“……최근입니다.”

“몇 살이나 되었습니까?”

한 몇백 년 될 것이다. 정확한 나이는…….

“모릅니다.”

“이름은 뭔가요?”

아, 이름. 독수리와 로젤린이 시선을 교환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름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로젤린은 잠시 고민했다. 이름을 알지 못하니 적당히 붙여야 할 텐데. 그 순간 그녀는 누군가가 바삭하게 마른 낙엽을 밟고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로젤린의 의식은 자신도 모르게 흘러갔다. 바삭하는 음식 중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마카롱.”

“……네?”

“마카롱입니다. 이름.”

독수리는 마카롱이 대체 무엇인지 가늠해 보는 표정이었다. 사냥꾼이 조금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나쁜 이름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로젤린은 어쩐지 뿌듯해보였다. 사냥꾼은 마카롱이라는 이름이 독수리에게 붙여지기에는 지나치게 달콤하고 귀엽다고 생각했지만 뭐, 주인이 그렇다니 그런 거겠지. 가볍게 넘어갔다.

마카롱을 먹어 본 마카롱은 제 이름을 매우 흡족하게 생각했지만, 그것은 조금 더 후의 일이다.

6

여정은 순탄했다. 암살자나 함정 따위를 찾아볼 수 없었을뿐더러 날씨도 좋았다. 일행은 일라베니아의 영토 내에서는 여러 마수들과 잦은 전투를 치렀지만, 발타에 들어서며 한결 여유로워졌다. 누군가가 미리 처리라도 해 놓은 듯이 마수를 발견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위험이 도사리는 나라에 발을 들여 놓은 것치고는 순탄하다 못해 지루할 정도였다.

가끔 여우 같은 자그마한 마수가 막사를 덮치고는 했지만 하늘에서 빠르게 하강한 마카롱에게 번번이 공격당했다. 기사들은 그들보다 훌륭한 경비를 서는 마카롱에게 경의의 뜻을 담아 ‘마카롱 경’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경’이라는 것은 기사를 뜻한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기사는 ‘약한 자를 보호하고 명예를 알며, 강한 신념을 가진 높은 지위의 인간’이라는 것 또한 알려 주었다. 그 후부터 마카롱은 기사들이 ‘마카롱 경’이라고 부를 때마다 그들을 내려다보며 우쭐거렸다. 매우 고압적인 태도였으나, 동물의 몸이라 티가 잘 나지 않았다.

바쁘게 움직인 덕에 어느덧 발타의 수도 ‘리비타’에 근접했다. 반나절도 걸리지 않을 거리였다. 발타의 궁은 일라베니아의 순백의 성과는 매우 달라 보였다. 여러 가지 색의 화려한 문양과 금이 조화롭게 섞여 궁을 뒤덮고 있었다.

사절단 일행은 외벽에 들어섰다. 열린 성문 안쪽에는 경비대가 대거 서 있었다. 붉은 흙 같은 갈색 피부의 남자들이었다. 로젤린은 발타인의 머리카락이 모두 검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하얀 피부에 다양한 머리 색을 가진 일라베니아의 사람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생김새였다. 그들은 갑옷이 아닌 가죽을 무두질해서 만든 보호구를 주로 입고 있었다. 우거진 숲과 늪, 험난한 지형으로 둘러싸인 발타에서는 활동성을 더 중요시 여겼다. 갑옷같이 무거운 장비를 착용하고 느릿느릿 움직이다간 화살 맞아 죽기 십상이었다.

경비대를 마주한 이후, 하얀밤 기사단의 분위기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상급 기사들이 리카르디스의 마차에 더 가까이 붙어 섰다. 하얗고 검은 집단의 사이에 이상한 기류가 맴돌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경비대가 양 옆으로 갈라지며 중앙에서 금색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뚱뚱한 남자가 나타났다. 잇세리온은 몇 년 전 일라베니아에 방문했던 그와 만난 적 있었다. 발타의 재상, 아틸라크였다. 아틸라크는 두 무릎을 꿇고 발타식으로 그들에게 인사했다. 경비대의 많은 인원도 그를 따라 절도 있게 두 무릎을 꿇었다.

“오오, 일라베니아의 귀빈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힉살라 아돈의 충실한 종인 아틸라크입니다. 부족하나마 발타의 재상직을 맡고 있습니다.”

아틸라크가 인사함으로써 사람들 사이에 감돌던 긴장감이 이완되었다. 지금 당장의 위험성은 없다고 판단한 기사단장 스타스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리카르디스가 긴 은발을 손으로 정리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햇살이 강한 날이었던 만큼 그의 머리칼이 발하는 빛 또한 평소보다 눈부셨다. 아틸라크는 일라베니아 2황자의 뒤에서 후광 따위가 비춰지는 것에 잠시 말을 잃어버렸다. 햇빛이 그의 뒤에서 찬란하게 산개하는 모습이 어찌나 신성하고 아름다운지.

“오랜만이군, 재상.”

리카르디스가 그에게 아는 척하자 재상이 호들갑을 떨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다. 덥지는 않으신지, 힘드시지 않으신지, 배고프지는 않으신지. 누가 보면 발타의 왕 힉살라의 종이 아닌 리카르디스의 종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사절단 일행은 곧 궁으로 안내되었다. 무장하고 있던 경비대가 하얀밤 기사단원들을 둘러싼 채로 이동했다. 한 나라의 수도답게 높고 화려한 건물들이 많았다. 비록 보이지 않는 안쪽에 빈민가가 위치하고 있어도, 궁으로 가는 길만큼은 반짝반짝하게 잘 닦여 있었다. 하지만 그 풍경을 음미하며 지나가는 기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오랜 숙적의 나라에 발을 들인 만큼 당장 위험하지 않더라도 경계하게 되는 것이었다. 로젤린도 리카르디스의 마차에 말을 가까이 붙여 몰며 주위를 경계했다.

“마카롱 경은?”

레이몬드가 골목을 주시하며 물어왔다. 항상 가까이 붙어서 날던 거대한 독수리가 사라지니 그 공백이 여간 커 보이는 게 아니었다. 로젤린은 잠시 하늘을 한 번 봤다가, 제 가슴을 한 번 내려다보며 우물쭈물했다.

“가까이에 있어.”

레이몬드는 넓은 하늘을 쭉 살펴보았다. 가까이에 있다더니 하늘은 구름 한 점, 독수리 한 마리 없이 푸른빛 일색이었다. 곧 궁의 모습이 보이자 레이몬드는 다시 경계 태세로 돌입했다.

레이몬드를 바라보던 로젤린이 눈동자를 아래로 떨어트렸다. 가까이에 있는, 정확히는 심하게 가까이에 있는 마카롱이 보였다. 제복과 가슴 갑옷 사이에 들어갈 만큼 작은 생물이었다. 회색 털을 가진 쥐가 쌀알 같은 앞발로 잘 매달려 있었다. 궁 안에서는 독수리 같이 커다란 생물이 활동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리비타에 들어서기 전, 마카롱은 하늘 높이 날아가는 척하며 곧바로 쥐로 변해 그녀에게 돌아왔다. 마카롱은 주머니를 발견해 들어가서는 찍찍, 소리를 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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