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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없는 밤-33화 (33/220)

33화.

다른 생물에게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사실이었지만, ‘그것’에게는 손발을 잃은 것 보다 더 큰 결핍이었다. 죽음을 선고하는 날카로운 송곳니보다 무서운 위협이었다. 로젤린은 처음으로 인간이 된 후 벌벌 떨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이 이상 상태가 금기로부터 이뤄진 어떤 벌, 어떤 부작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호랑이의 근육조직을 빌려 온다던가, 매의 청각을 빌려 온다던가, 단단한 마수의 가죽을 빌려 온다던가 하는 부분적인 변이는 가능했다. 하지만 로젤린은 더 이상 완전한 ‘그것’의 형태로 돌아갈 수 없었다.

만약 ‘그것’이 로젤린의 껍데기를 막 뒤집어 쓴 초기에 이런 사실과 마주했었다면, ‘그것’은 거대한 공황 속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 ‘그것’, 로젤린은 인간의 삶에 점점 녹아들고 있었다. 칼릭스라는 동생이 있었고 레이몬드라는 친구도 있었다.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이 생물들의 세계에는 ‘그것’으로서, 동물로서 느낄 수 없는 다양한 감정과 강렬한 감각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것’은 그림자로서의 삶이 조금 지루했을지도 모른다. 죽은 듯이 잠들어 있다가 때가 되면 시체를 먹고 기다리고 또다시 잠이 드는 그 수백 년의 일상을 깨트린 인간의 삶이, 어쩌면 좋아지고 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것’은 제 안에 있는 마력에 희미하게 섞이기 시작한 어떤 종류의 힘을 느꼈다. 검은 머리의 인간 로젤린. 그녀의 안에 있는,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생물이 가지고 있는 어떤 종류의 힘. 생물을 살아 숨 쉬게 하는 그 원초적인 힘, 생명. 그 생명이 조금씩 제 안에 녹아들며 융화되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그것’들의 금기는 살아 있는 생물 그 자체보다는 그들의 안에 있는 생명력을 경계한 것일지도 몰랐다.

물론 로젤린도 처음에는 무척이나 당황했다. 그럼 이제 더 이상 다른 생물을 흉내 낼 수도 없고 도망갈 수도 없어? 누군가가, 어떤 무언가가 날 죽이고자 하면 그대로 죽어야만 하는 운명이란 말인가?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불현듯 치미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왜 도망을 가야 하지? 어째서 누군가를 흉내 내야만 했던 거지? 죽고 땅에 묻혀 썩어 가는 것은 자연의 당연한 섭리였다. 순환의 원리였다. ‘그것’은 그때서야 자신이, 또한 어딘가에 살고 있을 제 동족들이 이 세상의 법칙에서 벗어난 이상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죽을 것이다. 육체를 가지게 되었으니 어떤 사건 사고가 없더라도 이 몸에 담긴 힘이 닳는 날에는 숨이 끊어진다. ‘그것’은 로젤린으로서 죽을 것이다. 당연한 이치였다. 모든 생물과 생명이 그렇듯이. 그렇게 생각하니 더 이상 완전한 의태를 이루지 못하는 것도 크게 두렵지 않았다. 누군가에게서 끊임없이 도망치고자 했던 본능, 무언가를 공격하거나 죽여서는 안 될 것 같다는 거부감 또한 수그러들었다.

그 이후로 로젤린은 가끔씩 꿈을 꾸거나 어떤 기억을 떠올렸다. ‘그것’이 아닌 로젤린의 기억이었다. 열심히 공부했던 책의 내용이 떠올랐고, 까만 숲에서 누군가에게 쫓기기도 했다. 때로는 제 어린 동생을 바라보며 ‘착한 아이구나, 칼. 우리 칼릭스.’ 하고 다정하게 이야기 했다. ‘그것’은 이 기억들이 로젤린, 그녀가 가지고 있던 생명의 조각이라 생각했다.

결국 그림자라 불리는 그들의 금기는 진정한 생명을 가지는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생이라는 출발점이 있어야 죽음이라는 것에 닿을 수 있기에. 죽음을 경계했기에 생겨난 금기. 누군가는 섣부르다 말할 것이며, 누군가는 멍청하다 했지만 로젤린은 이미 생과 사의 기로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몰라도.

로젤린은 제 심장 위에 손을 올렸다. 피부 아래 심장이 거세게 맥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 * *

로젤린은 죽어 가는 검은 머리 인간을 만난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했다. 걔가 부탁을 해서, 살아 있는 걸 먹어야만 했던 거야. 여자는 예쁜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며 로젤린을 보았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뭐라는 거야. 처음부터 설명해도 전혀 이해 못하겠거든? 그래, 뭐…… 가끔 원숭이 중에도 나무 못 타는 애들이 있긴 하더라…….”

어떤 무리든 좀 덜 떨어지는 개체가 있지…… 여자가 말을 흘렸다. 자신과 로젤린이 같은 종족이라는 사실을 회피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여자는 로젤린의 모습 뒤로 오랜 과거를 떠올렸다.

여자, 또 다른 ‘그것’은 금기를 저지른 동족을 지켜본 적이 있었다. 오랫동안 굶었던 동족은 운 좋게도 죽어 있는 뱀을 발견했다. 배고픈 동족은 커다란 뱀을 흡수했다. 설마 그 배 안에 아직 살아 있는 토끼가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모른 채. 당혹스러워하며 토끼로 살아가던 그 동족은 자신의 의태의 능력이 소실되어 가고 있다고 했다. 부분적인 변이는 가능했지만, 아무리 표범의 근육조직을 빌려 온다고 한들 토끼라는 큰 틀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고. 이후, 그 동족은 사냥꾼에게 잡혀 갔다. 웃지 못 할 희극이었다.

무기가 없다면 인간은 약해 빠진 종족이다. 날카로운 손톱이나 송곳니도, 강한 근육조차 없으니. 토끼보다야 낫긴 하겠지만 여자가 보기에는 토끼나 인간이나 그게 그거였다. 여자는 마음만 먹으면 집채만 한 마수로도 변할 수 있었다. 강함의 기준이 높은 것은 당연했다.

덜떨어진 동족은 제 안위와 관련된 얘기를 하고 있음에도 너는 말해라, 나는 들을 테니. 따위의 태도를 고수하며 인간들이 세워 놓은 한 막사만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었다.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딱 봐도 세상 물정이라고는 모르는 것 같은 데다가, 금기까지 저질러 의태가 불가능한 동족이라니. ‘그것’의 머리 한편에는 과거 토끼로 살다가 사냥꾼에게 잡혀간 또 다른 동족이 자꾸만 떠올랐다. 여자는 한숨을 푹 쉬었다.

“나는 아주 오래전에 인간을 먹었거든.”

“응.”

귀담아 듣고 있지 않았다. 이걸 확 그냥…….

“그 덕에 다른 동족들보다 좀 더…… 뭐랄까. 생각이란 걸 하는 편이더라고. 인간이 동물보다는 지성이 좀 높은 편이잖아?”

“응.”

여자가 로젤린에게 조금 다가왔다. 풀 냄새가 언뜻 로젤린의 코를 스쳐 지나갔다.

“인간이랑 지내기도 해서 공동체? 같은 걸 알아. 그래서 걱정이란 것도 한단 말이지. 좀 들어, 기지배야!”

리카르디스의 막사 근처를 기사들이 지나갔다. 로젤린의 신경이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향하자 여자가 로젤린의 팔뚝을 철썩 때리며 성질냈다. 여자는 제 입술을 꾹 한번 깨물고는 로젤린의 어깨를 더럭 잡았다. 여자의 회색 눈동자에 비장함이 감돌았다.

“있잖아.”

“응.”

“금기를 저지른, 동족의 끝을 내가 지켜봐 줄게.”

겸사겸사 위험해 보이면 구해 주기도 하고. 인간 한 명 데리고 도망치는 것은 여자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로젤린은 눈을 조금 더 가늘게 뜰 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여자는 깨달았다. 얘, 못 알아듣고 있네…….

그녀는 말을 고쳤다.

“앞으로 너 따라다니겠다고.”

로젤린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래.” 하고 간단한 대답을 했다. 누구는 일생일대의 결정이었건만. 얘, 생각이라는 것은 하고 사는 거겠지? 여자는 다시금 제 선택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여자는 한숨을 푹 쉬었다.

“어쨌거나…… 잘 부탁해.”

“응.”

로젤린이 손을 내밀었다. 여자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꼴에 이런 인사는 또 배운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온기였다.

* * *

“다람쥐?”

“이상하잖아. 다람쥐를 대체 왜 데리고 다녀.”

“사슴?”

“사슴이랑 같이 다니는 사람을 보기는 했지. 사냥꾼이 죽여서 어깨에 매달고 있더라고.”

“……곰?”

“사람이랑 같이 다니긴 하겠지. 곰의 위장 안에 사람이 잘 있겠지.”

두 여자는 여전히 나무 위에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여자는 로젤린을 따라가기로 했지만 인간의 모습으로 따라갈 생각은 없었다. 인간이건 동물이건, 같은 종족이라고 해도 갑자기 나타난 바깥의 존재는 크게 배척하는 경향이 있었다. 더군다나 인간의 지능은 다른 동물들보다 높은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어설프게 인간을 흉내 내는 제 모습에 의문을 금방 가질 것이다.

여자는 자신이 과거에 먹은 동물들의 종류를 나열했고, 로젤린은 하나씩 짚어 가며 선택했다. 하지만 다람쥐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 사슴을 데리고 다니는 사람. 곰과 마수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 세상 어딘가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굉장히 희귀한 상황임이 분명했다. 여자는 로젤린이 그랬듯이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 싶은 습성이 있었다.

이후에도 뱀, 흑표범, 사슴벌레, 너구리 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지만 전부 기각되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여자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예전에 할매랑 살 때, 동물 데리고 다니는 사람 봤어!”

그녀는 간신히 떠올렸다. 산 중턱에 위치한 작은 오두막에 살던 늙은 여자. 그녀의 오두막에는 가끔씩 사냥꾼들이 들려서 비를 피하고 갔다. 활과 덫을 위한 재료만 들고 다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나, 간간히 사냥개나 매를 데리고 다니는 사냥꾼들도 있었다. 후보가 두 개가 생겨났지만 여자는 개도 매도 먹은 적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씩 웃었다.

“독수리는 먹은 적 있어.”

로젤린은 오오,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확실히 매나, 독수리나. 둘 다 맹금류의 커다란 날짐승이다. 그게 그거지 뭐. 여자는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더니 의태를 시작했다. 여자의 형체가 검게 물들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여자는 온전한 독수리의 모습이 되었다. 덩치가 예상한 것보다 제법 컸다. 로젤린은 그 어마어마한 크기에 감탄했다. 독수리는 태평하게 인간의 언어로 이야기했다. 성대만 인간의 것으로 변이한 모양이었다.

“이 근처 왕이라고 불리던 독수리였거든. 마수랑도 싸우던 애야. 안타깝게도 수리부엉이가 저녁에 기습해서 죽었지. 밤의 수리부엉이는 낮의 독수리만큼 강하거든.”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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