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해가 저물기 시작한 숲은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했으나 로젤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숲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뒤를 따르고 싶은 네스터가 “방해가 안 된다면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라고 물었지만…….
“방해됩니다.”
라는 로젤린의 한마디에 축 처져서 멧돼지를 손질하러 갔다. 얼마 뒤 숲에서 나오는 로젤린의 어깨에는 커다란 사슴 한 마리가 들려 있었다. 사냥꾼 출신의 길잡이는 감동의 물결에 허우적거리며 차마 말을 잇지도 못하고 그저 엄지손가락만 치켜세웠다.
많은 사람들이 로젤린과 한마디 얘기라도 나누고자 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잡아 온 사슴을 샅샅이 살필 뿐이었다. 이후에 약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데,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무엇 때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로젤린은 그 이후로도 토끼와 날아가던 새, 야생 산닭을 몇 마리 더 잡았다. 그것에 더해 사냥에 성공한 자가 몇 명 있었다. 리카르디스 배 사냥 대회는 막사의 모든 인원이 풍족한 식사를 할 정도의 수확을 얻으며, 성공리에 마무리 되었다.
리카르디스도 야영치고는 호화로운 식단에 흡족해했다. 지쳐 가던 이들에게 활력을 불어 일으키는 좋은 밤이었다. 몇 없는 여기사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고기를 구웠다. 로젤린도 그 무리에 끼어 있었다. 적당히 가죽만 벗겨 구워 먹는 남자 기사들에 비해, 여자 기사들은 소금과 후추를 뿌려서 지글지글 달궈진 돌판 위에 고기를 굽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 공수한 것인지 모를 허브 따위도 보였다. 사절단에 포함된, 황족들의 식사를 담당하는 요리사만큼이나 정성을 들이는 듯 했다. 리카르디스는 아마 제 접시 위에 있는 고기나 여기사들이 먹는 고기나 크게 차이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여기사들은 다 구워진 고기를 가장 먼저 로젤린에게 건넸다. 구워진 마늘의 고소한 향기와 허브의 향긋한 냄새가 자꾸만 식욕을 자극했다. 그녀는 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눈을 떼지 못했다. 무뚝뚝하던 그녀의 얼굴에는 격렬한 환희의 감정이 서려 있었다. 단검으로 고기를 조금씩 베어 먹는 자들이 대다수였으나, 로젤린은 고기를 통째로 들고 와구 씹었다. 그녀가 한입 크게 베어 물자 입안에 육즙이 탁 퍼졌다. 로젤린은 최선을 다해 열심히 먹었다. 여자 기사들이 까르르 웃었다. 임무 중일 때나 남자 기사들을 대할 때보다 세 톤 정도 높은 목소리였다.
로젤린은 눈을 감고 고기를 뜯으며 한껏 음미했다. 주변의 흐뭇한 시선이 그녀에게 쏟아졌다. 볼에 홍조가 띈 것 같은 착시가 보일 정도로 그녀는 행복해했다.
“맛이 어떠십니까, 로젤린 경?”
“매우, 매우 맛있습니다.”
“다행입니다. 20분 전에 라임과 로즈마리로 마리네이드했습니다. 구울 땐 레몬 밤과 마늘 가루를 섞은 허브 버터를 사용했고요.”
로젤린은 다소 충격 받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리카르디스도 충격 받았다. 이 와중에 마리네이드까지 했어……?
“과연…… 그래서 이런 맛이…… 대단하십니다, 경.”
알 수 없는 공감대가 형성된 여자 무리에서 다시 한 번 까르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순간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멍하니 여자 기사들, 특히 로젤린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게 무슨…… 15살 먹은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리카르디스는 츳, 혀를 차고 접시 위의 고기를 씹는 것에 전념했다. 어느 정도 접시를 비운 리카르디스는 풍경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자리와 멀지 않은 곳이었다. 5황자인 디에즈 또한 식사 중이었다. 그는 고기를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어딘가를 열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닿아있는 방향이 익숙했다. 그녀들이 앉아 있는 모닥불 쪽이었다. 여기에 또 다른 사춘기 소년이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피식 웃었으나 곧 표정을 굳혀야만 했다. 디에즈의 눈길이 로젤린에게서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리카르디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입안의 혓바늘이 돋은 것처럼 거슬렸다.
* * *
소란스러웠던 저녁 시간이 끝났다. 다들 막사로 들어가 고단한 여정으로 쌓인 피로를 풀었다. 머리를 대자마자 잠에 드는 자도 많았다. 몇 조는 경계 보초 서며 조용한 막사를 지켰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막사 근처, 높게 자란 나무 위에 자리 잡았다. 2황자의 막사를 지키고 있는 상급 기사는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로젤린은 굵은 나뭇가지에 머리를 기대고 꾸벅꾸벅 졸았다. 예전에는 그다지 수면을 취하지 않아도 괜찮았는데 요즘은 일주일에 한번 꼴로는 반드시 자야 했다. 그것도 작은 소음과 미세한 살의에도 금방 깨어날 수준의 아주 얕은 잠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눈을 감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피로가 풀렸다.
토도도.
잠든 육체를 대신해 날카로운 감각이 나무를 타고 오르는 작은 생물의 발걸음 소리를 감지했다. 깃털 같은 무게에서 발생한 아주 작은 진동이었다. 로젤린은 눈을 번쩍 떴다.
“…….”
다람쥐였다. 또한 그녀가 구했던 사슴이기도 했다. 로젤린이 코앞에 있음에도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이상하고 작은 생물이었다. 다람쥐는 폴짝폴짝 뛰어서 그녀의 무릎 위로 올라왔다. 그 덕에 눈높이가 어느 정도 맞춰졌다. 다람쥐가 코를 씰룩이면서 쥐 같은 소리를 냈다. 찌치 찍- 뭔가를 말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로젤린은 인상을 찌푸렸다.
“나 다람쥐는 먹은 적 없어서.”
다람쥐 말은 못 알아들어. 생략된 뒷말을 눈앞의 작은 동물은 알아들었다. 동그란 눈을 날카롭게 세우며 ‘귀찮게 하네.’라는 듯 팩 쳐다보더니 그녀의 무릎에서 내려갔다. 다람쥐의 털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기처럼 흩어지며 넓게 퍼졌다. 검은 모래의 집단은 점차 몸을 불려 사람 한 명 만큼이나 커졌다. 흐물거리는 검은 형태의 안쪽에서 마력이 세차게 대류 했다.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 때부터 눈치채긴 했지만, 이 동족도 인간을 먹은 적 있는 듯 했다. 서서히 인간의 형태가 갖춰지기 시작했다. 갈색 머리를 늘어트린, 젊고 예쁜 여자였다. 옷을 입고 있지 않아서 그녀의 풍만한 굴곡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로젤린은 조금 떨어진 리카르디스의 막사를 내려 보았다. 상급 기사도 저 멀리 있었고, 그들의 얘기를 들을 만큼 귀가 좋거나 가까이 있는 사람 또한 없었다. 갈색 머리의 여자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몸을 움직이기 위한 시동을 걸었다. 어색한 몸짓이었다. 그녀는 아, 아. 하면서 목소리를 확인하더니, 부드러운 눈매로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인간의 몸은 역시 영 별로야. 근육이 허접해.”
“말 잘하네.”
로젤린은 자신이 막 인간이 되었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들리는 단어를 어설프게 흉내 낼뿐으로, 지금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눈앞의 여자는 지금의 자신보다도 훨씬 능숙하게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여자는 로젤린의 눈에 담긴 존경의 빛을 눈치채고 웃었다.
“인간으로 살아 본 적 있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할매랑 살았지. 나를 손녀딸로 착각하더라고.”
맨 처음은 아예 말을 못하는 벙어리 흉내를 내었다고 했다. 어느 정도 입이 트일 때까지 기다리기만 했다고. 세상에 그런 방법이. 로젤린은 감탄했다.
“그래도 인간이 되면 귀찮은 일이 많아서. 동물로 사는 게 훨씬 편하고 좋아. 그래서 좀 신기하네. 너 인간들 사이에서 살고 있어? 안 불편해? 우리는 태생적으로 인간을 꺼려하는데 말야. 개체마다 좀 다른가?”
태생적으로 인간을 꺼려한다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확실히 비스타의 깊은 숲에서 살 때만 해도 인간들을 피해 다니곤 했다. 인간보다 훨씬 강한 마수와 동물들은 무섭지 않았지만, 인간들에게는 알 수 없는 원시적인 공포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로젤린이 된 이후로 서서히 망각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혹시 금기를 저지른 탓인가? 로젤린은 자기도 모르게 생각하던 말을 그대로 흘렸다.
“금기 때문인가?”
여자가 눈을 부릅떴다. “금기?”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로젤린은 검지를 입술 앞에 세웠다. 조용히 말하라는 뜻이었다. 여자는 로젤린의 검지를 손으로 찰싹 쳤다. 조용히고 뭐고.
“설마 살아 있는 인간을 먹은 거야, 너?”
“응.”
여자는 로젤린의 팔뚝을 한 대 더 쳤다. 찰싹하고 매서운 소리가 났지만 그다지 아프진 않았다.
“돌았어? 우리들 중에 암만 생각 없이 사는 애들이 많다지만 너는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냐? 본능조차 거스를 정도로 멍청한 건가? 대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거야, 너?”
로젤린은 조금 뚱해졌다. 자신도 다 사정이 있었다. 여자는 로젤린의 억울한 표정을 보고도 그녀를 한 대 더 찰싹 쳤다. 로젤린의 어미, 에델바이스에게도 이렇게 혼난 적 없는데…….
“도망치지도 못하잖아 이 기지배야! 너 이제 그 몸으로 죽어야 돼!”
“음.”
“음. 같은 소리하고 앉아 있네! 알고는 있었던 거야?”
본능은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이미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동물이 독버섯을 본능적으로 기피하는 것과 같았다. 저 독버섯은 위험해. 먹으면 안 돼. 먹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먹으면 위험할 것이다. 피에서 피로 전해지는 기억이었다. ‘그것’들의 금기 또한 그런 본능의 영역이었다.
‘살아 있는 것을 흡수해서는 안 된다.’
그녀가 금기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은 최근이었다. 로젤린의 육체로 생활한 것이 벌써 2개월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인간세계의 음식은 맛있지만 그것들은 인간의 육체를 이루는 영양분이 되어 줄 뿐이었다.
슬슬 본체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그것’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원래의 형태로 돌아가 시체를 흡수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녀는 조용한 밤. 미리 동물 사체를 준비해 놓고 의태를 풀었다. 아니 풀고자 했지만, 마력만 그녀의 껍질 안에서 고요하게 대류 할 뿐 어떠한 변화도 생겨나지 않았다. 로젤린은 번개를 맞은 듯 충격 받았다. 변화를 하지 못해?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