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콜록콜록! 리카르디스는 사레가 들려 속이 쓰린 기침을 했다. 그는 제 귀를 의심했다. 물론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찬사를 내뱉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이에게서 나온 말이었다. 급습하듯 튀어나온 미사여구의 파괴력은 컸다. 주위에 있던 다른 호위 기사들은 차마 기침을 뱉지도 못하고, 컥. 하고 목울대를 강하게 맞은 소리를 냈다.
끄, 끌어내…… 하고 속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몇년 전, 리카르디스에게 청혼서를 하루에 스무 장씩 보내며 쫓아다니던 한 영애에게 내렸던 조치이기도 했다.
“근육의 부피가 커다랗고 형태도 무척 아름다우십니다, 전하. 저도 그렇게 울퉁불퉁하게 되고 싶은데, 아무래도 신체적 조건이 남자와 다른 부분이 많아서…… 부럽습니다.”
진심으로 부러움이 가득 들어찬 눈빛이었다. 아, 경계 해제, 경계 해제. 기사들이 휴,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장면이 리카르디스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시겠지…….”
리카르디스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 그래, 이게 로젤린이다. 이 기사에게 뭘 더 바라겠는가. 잠시간 흐트러졌던 마음은 무슨 일 있었냐는 양 잔잔해졌다. 마치 잘 그려진 그림을 보면서 “색채가 아름답군요.”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감상평이었다. 딱히 기분 상할 부분이 아닌데 이상하게도 신경에 거슬렸다. 로젤린을 흘끗 바라보니 그녀는 허공에다가 유려한 손짓으로 리카르디스의 몸 라인을 그리고 있었다.
‘……너무 과하지 않나. 풍만한 몸매를 지닌 여성의 굴곡도 저만큼은 안 될 것 같은데…….’
로젤린은 곧 잇세리온에게 나쁜 손을 찰싹 맞고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그 후 성희롱이라고 엄청 혼났다. 성교육을 해야겠다며 씩씩거리던 잇세리온은 레이몬드를 불러냈다. 보호자 호출이라는 명목이었으나 레이몬드는 2황자 수석비서관의 눈을 슬슬 피했다. “우리 로젤린의 보호자는……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 누가 봐도 성교육 담당을 하고 싶지 않아 떠넘기는 거였다.
잇세리온과 레이몬드가 그녀의 성교육 문제로 아옹다옹 다투는 사이,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복근 위에 희미하게 묻어있는 핏자국을 발견했다. 그녀는 수통을 꺼내서 제 손수건을 적셨다. 로젤린의 행동을 목격한 리카르디스는 ‘설마……?’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실례합니다, 전하.”
“설마.”
그의 입에서 아까 생각했던 그대로의 대사가 나왔다. 로젤린은 성큼 그에게 다가서서 손수건으로 복부 위에 말라있는 핏자국을 문질렀다. 복부를 스치는 천의 감촉이 간지러웠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그새 피가 말랐는지 로젤린은 무릎까지 꿇어 가며 열성적으로 닦았다.
“…….”
제 앞에 무릎을 꿇고 바지춤을 잡아 가며, 열성적으로 복부를 닦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리카르디스는 하늘을 보며 조용히 생각했다. 이 감정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아연하다? 참담하다? 글쎄, 어떤 언어로도 지금 그의 심정을 표현하기에는 힘들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손에서 손수건을 모질게 팩 뺏었다. 상식을 깡그리 잊어버린 이 호위 기사의 행동은 요즘따라 그를 자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대…….” 하고 입을 다물었다가 “아니, 진짜.” 하고 답답함을 호소하려다가, 결국에는 “되었다…….” 하고 아련하게 말을 흘렸다.
로젤린은 상급 기사들이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야 본인 몫을 사냥하러 떠났다. 리카르디스는 숲속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간 지켜보다 고개를 돌렸다. 잇세리온과 레이몬드는 그 광경에 쩡하고 굳어 있다가 성교육 시간을 열 배로 늘려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 * *
한사람의 인영이 푸른 숲을 달렸다. 동물들은 바로 옆을 지나가는 로젤린의 모습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높은 나무의 나뭇가지를 타고 한 번의 발돋움으로는 닿을 수 없는 곳까지 도달했다. 풍경이 순식간에 휙휙 바뀌었다. 나무들이 높게 솟아 있는 풍경은 일라베니아와 비슷했지만 기후가 다른 탓인지 숲을 감싸고 있는 향기가 조금 달랐다.
로젤린은 나뭇가지 위를 훌쩍훌쩍 건너뛰며 사냥감을 찾았다. 저녁거리였던 토끼 고기는 리카르디스에게 주었으니 따로 먹을 것이 필요했다. 인간으로 변이한 이후의 최고의 소득은 음식이었다. 인간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고기와 과일, 채소를 조리했다. 그것은 한 가지 재료만으로 낼 수 있는 한계를 넘어 다양하고 복잡한 맛의 조화를 이뤄 내곤 했다. 로젤린은 그 조화가 놀랍고 신기하고 맛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로젤린이 된 이후에야 맛있다는 감각을 깨달았다. 한 끼를 거르는 게 아쉬운 처지였다. 그녀는 신경에 날을 세워 너른 풍경을 온몸으로 지켜보았다.
나무를 타고 넘던 그녀는 익숙한 풍경과 조우했다. 아까 길잡이와 둘러보았던 구역 근처였다. 그러고 보니 덫을 설치했었지. 문득 떠오른 기억에 로젤린은 높은 나무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쿵, 땅을 울리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작은 소음마저 흙바닥에 스며든 것처럼 고요했다.
비이이- 피이이-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여러 동물을 먹어 본 적 있는 로젤린은 그 소리가 무엇인지 눈치챘다. 사슴이었다. 그녀는 그 소리의 주인을 곧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사냥꾼이 설치해 놓은 덫, 그물에 걸려 있는 어린 사슴이 눈을 끔벅이고 있었다. 까만 눈동자에 물기가 어려 반짝였다. 사슴은 꾸물거리며 그물에서 벗어나려다가 그녀를 발견하고는 뻣뻣하게 몸을 굳혔다. 나쁜 짓을 하다가 걸린 아이 같았다. 로젤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어린 사슴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옅은 갈색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그 안쪽. 사슴의 형태 안에서 대류하고 있는 마력의 기운을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로젤린은 이 존재가 무엇인지 금방 알아보았다. 지성을 가진 이후, 자신의 존재를 자각한 이후로 처음 만나는 동족이었다. 마력은 운용하지 않는 한 감지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그녀가 지금 동족을 만난 것 또한 우연의 산물이었다.
사슴 안에서 힘차게 대류하고 있는 마력은 의태 직전의 징후였다. 아마 자신이 이곳을 찾지만 않았더라도 그물보다 작은 생물로 변해서 빠져나갔으리라. 그렇다면 그냥 자리를 피하면 되는 건가?
그녀가 몸을 일으킬 찰나,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금속음. 일정한 보폭. 단련된 자의 숨죽인 발걸음. 같은 사절단 일행이었다.
로젤린은 쪼그려 앉아 그녀의 행동을 주시하는 어린 사슴과 눈을 맞췄다.
“도망가.”
사슴은 그녀를 째려보는 것 같았다. 네가 사라져야 도망가지. 책망의 눈길이었다. 눈앞의 어린 사슴은 동물의 대가리를 하고도 굉장히 다양한 표정을 지었다. 로젤린은 한쪽 팔을 들어보였다. 그녀의 손등 위로 파충류의 비늘 같은 것이 토도독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예전에 먹은 악어의 특성이었다.
사슴은 더욱 동그래진 눈으로 그녀의 손을 주시했다. 파충류의 거죽이 아닌, 그 형태 안에서 막 대류하기 시작한 마력의 기운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사슴은 그제야 눈치챘다. 눈앞의 여자는 자신과 같은 종족이었다. 로젤린은 재차 다시 말했다.
“가.”
사슴의 눈에 결의의 빛이 스쳤다. 그물에 얼기설기 얽혀 있던 어린 짐승의 다리에서 색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옅은 갈색에서 나무의 색으로, 그리고는 완전한 검은색으로. 그것은 점차 퍼져서 사슴의 온 몸을 뒤덮었다. 사슴의 그림자처럼 온통 어둡던 형태가 조금씩 부스러졌다. 모래처럼, 연기처럼 퍼지고 흘렀다. 로젤린이 눈을 깜박 하는 짧은 사이 어둠이 걷혔다.
사슴이 있던 자리에는 자그마한 다람쥐 한 마리가 대신 남아 있었다. 그 작은 동물은 연신 코를 씰룩거리며 로젤린을 한참을 쳐다보았다. 까맣고 반질반질한 눈에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기사들의 발걸음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자 다람쥐는 재빨리 그물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나무로 올라가기 직전 다시 한 번 그녀를 돌아보았다. 사람들이 얼마 후 덫을 확인하러 왔을 땐, 다람쥐나 사람의 흔적은 숲속에 스며들어 찾을 수 없었다.
* * *
산 중턱에 위치한 막사가 들썩였다. 여기저기 타오르는 모닥불에서 황홀한 고기 냄새가 퍼졌다. 다들 물이 가득담긴 수통을 들고 마시면서도 잔뜩 취한 것처럼 행동했다. 축제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흥겨운 분위기였다.
“로젤린! 로젤린!”
“로젤린!”
“최고다, 로젤린!”
“멋있다, 로젤린!”
상급 기사들이 와하하 웃으며 그녀의 등을 퍽퍽 두드리고 지나갔다. 로젤린도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이 많은 인원이 먹고 있는 고기의 5할이 로젤린의 성과였으므로, 이 축제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에도 그녀가 큰 기여를 한 셈이었다.
마른 건량과 육포 따위로 배고픔만 간신히 달랜지 벌써 이틀째였다. 검과 갑옷의 무게를 감내하며 산을 오르는 자들에게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주인인 리카르디스가 사냥해서 알아서 잘 먹어 보라고 했지만, 대다수의 기사들이 훌륭한 검술 실력에 비해 사냥 솜씨는 형편없었다. 누구는 개구리를 잡아 왔고, 누구는 무언가가 먹다 남긴 동물의 사체 따위를 들고 와 야유를 받았다.
그런 때에 로젤린이 어깨에 멧돼지를 지고 어두운 숲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성인 남성만 한 크기에 무게는 크기의 배가 될 것이 분명한 두툼한 멧돼지였다. 그녀는 막사에 멧돼지를 툭 떨치고는 하급 기사들에게 손질하라 했다. 가장 좋은 부위를 전하께 바치고 나면 알아서 먹으라고도 했다. 많은 자들이, 특히 개구리도 고기랍시고 잡아 온 네스터가 그녀를 몽롱하게 바라보았다. 너무 멋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