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30화 (30/220)

30화.

‘이 여자는 죽을 것이다.’

나를 위해서 언젠가 목숨을 바치고 죽을 자다. 그 사실이 못내 견디기 힘들었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수많은 시체 위에 서 있음을 알았다. 자신이 원했든 아니든 간에 제국의 2황자라는 고귀한 자리를 위한 희생은 불가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죄책감은 쌓여 갔다. 벗어나고 싶다고 벗어날 수 있는 종류의 감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래도 이따금 눈을 감기라도 하고 싶었건만. 로젤린의 존재가, 그녀의 눈빛이 끝없이 그 죄책감을 상기시켰다.

2황자 리카르디스를 지킨다. 로젤린이 바라는 것은 오직 그뿐이었다. 어떤 영광도, 기사로서의 명예도 바라지 않았다. 고요하게 들끓는 그녀의 감정이 버거웠다.

리카르디스는 다시금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그때와 같지만 그때와 같지 않았다. 그녀가 지금 하는 행동의 본질도 지킨다는 맹세 하에 이루어 진 것이었다. 하지만 전과 달리 눈 어딘가에 서려 있던 비장한 결의 따위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조금 더 사무적이라고 해야 할지, 받는 돈만큼 일하겠습니다. 같은 느긋한 표정이었다. 물론 새벽까지 제 방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행동력만큼은 예전의 로젤린을 떠올리게 했지만. 어쨌거나 리카르디스는 그녀를 조금 더 편하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첩자 역할로 따라붙은 5황자 디에즈, 클수록 무거워지는 환성의 중압감, 수많은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땅으로 들어가야 하는 제 엿 같은 심정까지. 시종일관 그의 표정이 뚱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좋은 표정이 나올 만한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그럼에도 말 위에서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따끈한 햇빛을 받고 있는 제 호위 기사를 보노라니 몸이 노곤 노곤해지는 기분이었다. 옆에서 잇세리온이 부지런히 그의 기분을 풀기 위해 말을 걸어 왔다.

“날이 참 좋지 않습니까, 전하? 그저께까지만 해도 비가 많이 내렸는데, 이델라브힘께서 전하의 앞길을 굽어 살피시나 봅니다!”

그저 혼잣말처럼 한번 말해 본 것에 불과했는데, 그 순간 리카르디스의 무거운 입술이 열렸다. 턱을 괴고 있는 그의 자세만큼이나 나른한 목소리였다.

“날이 좋긴 하군.”

잇세리온이 신나서 더욱 떠들었지만 시끄럽다는 타박만 돌아왔다. 하늘을 보니 구름 한 점 없는 정말 좋은 날이었다.

* * *

순조로운 여정이었다. 밤을 보낼 만한 마을 한두 군데는 항상 있었고 큰 영지를 지날 때면 영주의 성에 머무르며 피로를 풀었다.

리카르디스는 오랜 시간 엘피디오와 부딪친 만큼 그의 성격을 질릴 만큼이나 잘 알고 있었다. 앞뒤 잴 줄 모르고 무작정 밀어붙이는 멍청함과 무식함. 분명 가는 길 또한 온갖 암살자며 함정을 풀어 놓아 험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폭풍 전의 하늘처럼 고요할 뿐이었다.

최후까지 기다렸다가 가장 성공 확률이 높을 때 목을 물어뜯는다. 사냥의 기본 방법이었다. 이때까지 엘피디오는 그 기본조차 갖추지 못해서 사냥감을 번번이 놓치는 부류였으나, 이번만큼은 조금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이 기회의 가치를 높게 치는 듯 했다. 말인즉슨 생각보다 더 위험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였다.

기다림의 미학을 깨달았으니, 본격적으로 싸움을 걸어오는 순간은 발타에서 일라베니아로 돌아오는 길이 될 것이다. 발타 왕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금 당장의 전쟁은 하카브도 바라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더더욱 2황자의 죽음은 그들과 관련이 없어야만 했다. 발타를 떠난 뒤 우연히 도적을 만나서 사망했다던가, 우연한 사고에 휘말렸다던가. 어떤 죽음이 되건 그 앞에는 ‘우연히’라는 단어가 붙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가는 길만이라도 편하겠군. 리카르디스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들은 이제 일라베니아의 영토를 벗어나 발타의 끝자락에 발을 들인 상태였다. 길이 험하고 복잡한 탓에 길잡이 몇 명을 고용해 빠르게 이동하고 있음에도, 앞으로 하루 이틀간은 산에서 야영을 해야만 했다.

리카르디스는 야영, 노숙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듣고 있음에도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상급 기사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들은 기사이긴 했지만 그 이전에 귀족이었다. 야영의 경험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렇다 해도 두 손 들어 반길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주군인 리카르디스조차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데 그들이 나서서 불만을 표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급 기사들은 부지런히 막사를 세웠다. 리카르디스는 그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조금 더 더워지고, 습해졌다. 발타의 기후는 일라베니아의 사람들에게 혹독했다. 기사들이 지쳐 가고 있는 것이 보여서 해가 지기도 전에 행군을 멈추라 명령했다. 이틀째 야영이었지만 빨리 쉴 수 있어서인지 날카로워진 기색들이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물을 좀 드시지요, 전하.”

일곱 번째였다. 충신 잇세리온이 끊임없이 물을 권했다. 더워지는 기온을 염려한 탓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그의 말을 무시했다.

“기사들이 마실 물은 충분한가?”

“아까 로젤린 경이 작은 샘을 발견했습니다. 막사가 세워지면 다들 수통을 채우라 하겠습니다. 전하, 물을 드시지요.”

잇세리온의 말은 또 한 번 무시당했다.

“수질은 괜찮고? 병이라도 걸리면 곤란한데.”

“로젤린 경이 마셔 보더니 괜찮다고 하더군요. 흙과 자갈에 걸러진 깨끗한 물이라고 합니다.”

“……그런 걸 로젤린 경이 어떻게 알지? 귀하게 자란 귀족가의 여식이 아니었나?”

글쎄요? 포기하지 않는 집념의 사나이 잇세리온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리카르디스의 입가에 수통을 들이댔다. 리카르디스는 짜증내면서도 한 모금 마셨다. 이후 곧바로 수통을 밀어내긴 했으나 잇세리온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기사 생활을 한지 제법 되니, 훈련하면서 여기저기서 배웠지 않겠습니까?”

훈련하면서 여기저기에서 배웠다는 기사가 사냥꾼 출신의 길잡이보다 더 샘을 빨리 발견한다고? 그녀의 유능함 덕인지, 길잡이의 무능함 탓인지. 아무튼 간에 어이없는 일이었다.

얼마 후, 리카르디스의 곁으로 다가오는 로젤린의 손에는 토끼 세 마리가 들려 있었다. 그는 아까와 비슷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보았다.

“그게…… 뭐지……? 로젤린 경?”

로젤린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토끼입니다.”

리카르디스는 한층 더 어처구니없어졌다. 토끼인 것은 보면 알았다. 그녀는 그의 표정을 뭐라고 해석했는지 “토끼…… 세 마리입니다.”라는 말을 덧붙여서 리카르디스의 입을 기어코 다물게 했다.

어떻게 토끼를 잡았는가에 대한 의문은 로젤린의 뒤를 따르던 길잡이에 의해 풀렸다. 그녀의 어마어마한 사냥 솜씨에 대해 극찬을 늘여 놓는 중이었다. 번개와 같았느니, 사냥의 신이니, 토끼가 아니라 호랑이라도 잡을 수 있을 것이니 뭐니. 확실히 토끼야 약한 초식동물의 대표로 꼽힌다지만, 산에서 사는 토끼들은 재빠르기가 바람과 같았다. 활과 덫이 없다면 사냥꾼들도 잡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사냥 경험도 별로 없는 기사가 떡하니 세 마리나 잡아왔다. 심지어는 돌팔매질로.

로젤린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토끼와 리카르디스를 번갈아보다가 그에게 토끼 사체를 더럭 안겼다. 리카르디스의 옷이 피로 축축하게 젖어 갔다. 잇세리온이 짧게 비명을 지르며 경악했다.

이후 그녀는 잇세리온, 호위 기사 카일로, 기사단장 스타스, 부단장 나단, 레이몬드에게까지 불려 다니며 혼났다. 건량보다 막 잡은 고기가 맛있겠지라는 갸륵한 마음에 리카르디스에게 넘긴 것이었는데 억울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뚱한 표정을 보면서 잇세리온에게 명령했다.

“다들 육포 씹느라 힘들지 않나? 낮부터 자리도 잡았겠다. 사냥 대회라도 간단하게 여는 게 좋겠군.”

“명 받들겠습니다.”

“그리고 이, 토끼는 내 저녁으로 할 테니 손질해 오고.”

리카르디스의 말에 로젤린이 그를 향해 획하니 고개를 돌렸다. 부루퉁하던 낯이 어느새 활짝 펴 있었다. 그 재빠른 표정 변화에 리카르디스가 웃었다.

잇세리온의 명령이 하달되자마자 기사들은 삼삼오오 조를 꾸렸다. 몇 조는 남아서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했고 몇 조는 사냥을 하러 떠났다. 그들이 돌아오고 나면 교대로 사냥을 나가는 방식이었다. 상급 기사들도 숲속으로 많이 떠났지만 로젤린은 멀거니 리카르디스의 곁을 지켰다.

잇세리온이 새 옷을 건네자, 리카르디스는 토끼의 피로 젖은 상의를 훌쩍 벗었다. 강하게 내리쬐는 햇살 아래 그의 상반신이 드러났다. 헉, 헉! 막사 주변을 호위하던 하급 기사들이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로젤린도 눈앞에 드러난 백옥같이 투명한 피부를 눈으로 훑었다. 이델라브힘이 정성스럽게 한 올 한 올 뽑아낸 듯한, 은사 같은 머리카락이 빛을 반사하며 몸을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그녀의 시선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머리카락이 채 가리지 못하고 드러난 하얀 목덜미, 툭 도드라진 날개 뼈. 울퉁불퉁하게 곡선을 그리며 날렵하게 붙어 있는 가슴과 등의 근육, 척추를 따라 옴폭 들어간 허리선까지.

“…….”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이 멀뚱히 쳐다보는 시선을 눈치챘다. 그녀의 직업 특성상 남자들의 벗은 몸을 자주 보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쳐도 미세한 동요조차 없는, 그야말로 무심의 눈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다른 여자들이 어떤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같은 성별이어도 가끔 얼굴을 붉히는 경우가 있을 정도였으니 그런 그가 보기에 로젤린은 아주 희귀한 생물이나 다름없었다. 뭐, 호위 기사로써는 백점 만점에 백점을 줄 수 있는 좋은 태도였다.

다만 굳이 문제점을 꼽자면, 한 가지. 로젤린이 눈을 빛내며 제 몸을 계속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시선이 리카르디스에게 수치심의 정의를 일깨웠다. 묘하게 추행당하는 기분을 지울 수 없어서 그가 한마디 하려고 할 찰나, 로젤린이 더럭 입을 열었다. 그녀는 내내 무심했던 표정을 지우고 눈매를 부드럽게 휘면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름다우십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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