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로젤린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제철과일이 들어간 타르트나 케이크도 좋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칼릭스도 무뚝뚝한 낯을 무너뜨려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착한 아이구나, 칼.”
신나서 맞잡은 손을 붕붕 흔드는 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지독하게 쓰리기도 하면서, 상처를 순식간에 아물게 하는 그리운 울림이었다.
* * *
헉, 헉, 헉!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달리는 중에도 몸에서 흐르는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등에서 느껴지는 강한 통증이 아니더라도 상처의 깊이를 짐작 할 수 있을 만큼 진했다.
‘…….’
그자는 내 얼굴을 보지 못했다. 비가 내려 망토를 입고 있었음에 감사했다. 어느 기사단 할 것 없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밋밋한 무늬의 망토였다. 그것만으로는 누구인지 판별하지 못할 것이다. 멀리서 쫓아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목 뒤로 소름이 돋으며 핏기가 가셨다. 떨리는 몸을 가까스로 추슬렀다.
냉정하게 생각해야 한다. 막사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살고자 하얀밤으로 돌아간다면, 그가 위험해질 수도 있을 테니. 하지만 알려야 했다. 알려야만 하는데! 생각해야 해. 그를 지킬 방법을!
“!”
달리던 도중 순식간에 발밑이 꺼졌다. 어두운 밤이라 풀숲에 가려진 절벽을 보지 못한 탓이다. 비명을 지를 뻔 했지만 입술을 깨물어 겨우 삼켜 내었다. 피 맛이 진득하게 입안에 달라붙었다. 깜깜한 공간 속에서 부유하는 것도 찰나.
우드득.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아프다고 인식하기 전부터 온 몸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세게 부딪힌 탓인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묵직한 죽음이 온 몸을 짓눌러 왔다. 소리와 색이 점차 사라졌다.
“아…….”
이내 시야가 점멸했다.
“!”
어둠에 물든 나뭇잎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로젤린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저녁의 찬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었다. 꿈에서 깨어났지만, 몸이 으스러지는 감각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지금 앉아 있는 곳이 그 꿈의 환경과 많이 흡사하기 때문일까. 피비린내 대신 느껴지는 산뜻한 밤공기가 낯설게 느껴졌다.
로젤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둑한 밤이었다. 그녀는 늘 그렇듯이 리카르디스의 방, 발코니 앞의 나무 위에서 그를 호위하고 있던 중이었다. 며칠 몇 주 동안 신경을 곤두세워 호위 했던 탓에 깜빡 선잠에 들었던 듯 했다.
리카르디스의 방을 바라보니 창을 통해 촛불이 아른거렸다. 초의 길이가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시간이 별로 흐르지도 않은 것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로젤린은 긴 꿈을 꾸었다. 누군가의 기억이었다.
꿈속의 ‘나’는 도망쳤다. 등에서 느껴지는 고통으로, 이미 상처를 입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쫓아오는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한계까지 달음박질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젖은 흙, 스치는 풀과 나무의 냄새가 아주 뚜렷했다. 등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눈앞에 그려진 풍경 또한 현실과 다름이 없었다. 마치 실제로 겪어 본 것만 같은 생생함이었다.
‘그것’은 깨달았다.
‘로젤린…….’
‘로젤린’의 기억이었다. 쫓아오는 자는 보지 못했지만 도망치던 ‘내’가 몸서리치며 두려워했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검은달의 암살자? 아니다. 암살자였다면 로젤린은 도망치기보다 검을 들었을 것이다. 그것이 기사였던 그녀의 본분이기도 했으니. 그래서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외에 그녀가 두려워할 만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 스쳐 지나가는 나뭇가지에 하나둘 생기는 얕은 생채기들, 비구름에 가려진 달. 어둠이 내려앉은, 괴물의 아가리 안쪽 같이 깊은 숲. 나뭇가지를 우악스럽게 밟고 꺾으며 무섭게 쫓아오는 정체 모를 자의 발소리.
대체 누구였기에.
대체 무엇이었기에.
5
일라베니아의 수도, 티가드를 떠나는 사절단의 모습에는 비장함이 깃들어 있었다. 빛나는 갑옷과 무구를 장착한 기사들. 갈기를 휘날리며 지나가는 백마 무리.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치솟아 있는 하얀밤 기사단의 깃발들. 그 웅장하고도 위압감이 드는 한가운데, 화려한 마차에 몸을 실은 리카르디스의 모습이 보였다.
사절단의 앞길에 꽃과 색색의 종이조각이 뿌려졌다. 여인들은 창문으로 몸을 불쑥 내밀고 손수건을 던졌다. 누가 보면 큰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것처럼 보일 정도의 커다란 환성이었다.
일라베니아의 백성들은 리카르디스의 찌푸린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축제보다도 흥겨운 분위기였다. 리카르디스가 하얀밤 기사단을 이끌고 출정할 때면, 그곳이 어디든 어김없이 좋은 결과를 쟁취해 왔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발타를 향하는 목적이 전쟁이 아닌, 친교를 위함이라는 사실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전쟁 못지않게 중요하고 위험한 여정일 것이다.
이델라브힘의 나라를 호시탐탐 넘보는 더러운 들개의 집단. 검은달. 최근 변경에서 잦은 전투가 일어나 민중 사이에서도 많은 동요가 있는 상태였다. 그런 때에 고귀한 황자의 몸으로 멀고 험난한 길을 떠난다고 하니, 어떤 이가 그 길을 환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황성에서부터 티가드를 벗어나는 모든 길에 인파가 빼곡히 들어앉아 있었다.
와아아-
함성소리에 리카르디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영 시끄럽고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듯 보였다. 잇세리온이 옆에서 한숨을 푹 쉬었다. 황성을 떠나기 직전에 1황자 엘피디오가 찾아온 이후로 줄곧 이 상태였다.
[길고 위험한 여정이 되겠구나. 무사히 돌아오기를, 이델라브힘께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겠다. 리카르디스.]
입에서 나오는 내용과 다르게 엘피디오의 히죽거리는 낯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 속내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 리카르디스는 화사하게 웃어보였다.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릴 수 있도록, 이 동생이 열심히 하겠습니다. 형님.]
네가 검은달과 손잡았다는 증거를 열심히 찾아내서 널 엿 먹이고야 말겠다, 멍청아. 라는 리카르디스의 뜻이 잘 전해졌는지, 엘피디오의 히죽대는 낯이 굳어 버렸다. 두 형제는 그 후로도 웃는 얼굴로 덕담을 몇 번을 더 주고받았다.
엘피디오의 덕담대로 위험한 길이었으나 본격적인 위험은 아직 형태조차 드러나지 않았다. 사람들의 함성소리는 그를 더욱 가라앉게 만들었다. 흩날리는 종잇조각 몇 개가 리카르디스의 얼굴에 착 붙었다. 그의 인상이 한층 더 사나워졌다. 잇세리온이 종잇조각을 그의 얼굴에서 떼어 내었다.
“어휴 우리 전하, 더우시죠?”
잇세리온이 열심히 손부채질을 하며 리카르디스를 달랬다.
사절단에는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 또한 기사단장 스타스는 가을안개 백작으로서. 푸른등불 후작의 차남, 호위 기사 카일로는 후작 대리로서 사절단의 일을 도울 예정이었다.
하얀밤 기사단 이외에도 리카르디스 휘하의 가문들이 기사단의 인원을 몇 명씩 추려서 사절단에 동행시켰다. 모두가 2황자파라 불리는 세력들이었지만 그 울타리 안에서 비껴나간 인물이 한명 있었다.
설원의 월계수 5황자 디에즈. 예정에도 없었는데 어느 순간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발타의 1왕자, 하카브와 타국에서 교류한 적 있다는 명분에서였다.
디에즈는 굳이 분류하자면 엘피디오의 세력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욕심이 없고 원체 성정이 순해 적극적으로 권력 다툼에 끼어든 적은 없었다. 그저 성 한 구석에서 차를 마시고 책을 읽으며 조용하게 살았을 뿐이었다. 그런 디에즈를 사절단이라는 지저분한 권력 다툼의 최전선으로 끌어낸 자는 엘피디오가 분명했다. 물론 디에즈가 물질적인 무언가를 얻고자 그를 따른 것은 아닐 테고, 그저 엘피디오에게 이용당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엘피디오가 검은달과 손을 잡았다고는 하지만, 결코 그 동맹은 끈끈한 신뢰로써 형성되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날카로운 이빨을 감추고 있으리라. 여기서 서로의 이익이라 함은 리카르디스, 자신의 죽음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들이 일라베니아 2황자의 죽음이라는 뜻을 이뤄내고 난 후에는 토사구팽의 시간이 분명히 온다. 누가 누구를 잡아먹는지는 미지수라 하더라도.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관계 위에 믿음이 있을 리 만무했다. 위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이상 엘피디오는 결코 발타에 발을 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디에즈가 필요했다. 죽어도 상관없는 일회용 눈. 겸사겸사 하카브와의 연락책이기도 할 테고.
엘피디오가 자신을 곱게 보내 주리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선언이라도 하는 듯 디에즈를 붙여 놓은 모양새가 의심스러웠다. 하기야 디에즈가 엘피디오 측의 사람이라고 한들 리카르디스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저 여태 그래 왔듯,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는다. 리카르디스에게 깊게 박혀 있는 최초의 맹세였다.
리카르디스는 크게 숨을 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호위 중인 상급 기사들 몇 명이 눈에 들어왔다. 말 위에 앉아서 권태롭게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검은 머리의 기사 또한 그 속에 있었다. 햇빛이 눈부신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는 손수건과 꽃송이를 머리에 잔뜩 달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를 향해 날아가는 것은 종이 쪼가리 하나라도 전부 쳐내고 있는 반면에 본인의 몰골은 생각도 하지 않는 듯 보였다.
리카르디스가 웃었다. 저 우스꽝스러운 꼴의 기사 덕에 여러 번 살아남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위기에서 자신을 몇 번이고 건져 올리곤 했던.
[전하. 제가 꼭 지켜 드리겠습니다. 전하만은 제가…… 꼭…… 목숨을 바쳐서라도…….]
로젤린은 조용하게 숨을 죽이고 있는 불꽃같은 자였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아른거리는 불티를 보았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맹세가 단순히 형식적인 언어에 불과하다던가, 금방 사그라들 종류가 아님을 알았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