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28화 (28/220)

28화.

로젤린은 객관적으로 훌륭한 상급자였다. 잘 챙겨 주고, 잘 가르쳐 주고. 그럼에도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는 그녀를 좀 어려워했다. 단순히 그녀가 직속상관이라거나, 지위가 높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신비로운. 불가사의한. 그녀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를 표현하자면 얼추 그런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그들이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을 껄끄러워 하지 않던가. 그들 또한 그랬다. 로젤린의 유능한 검 실력과 기묘한 분위기 사이에서 그녀를 존경도 했다가, 조금 어려워도 했다가 하며 마구 헤매었다.

에버하르트는 흙바닥에 볼을 댄 채, 우뚝 서 있는 로젤린을 쳐다봤다. 다른 곳을 보고 있던 그녀가 에버하르트에게 눈을 돌렸다. 시선을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는 사람이었다. 눈이 딱 부딪치자 그게 신호라도 되는 듯, 로젤린은 그의 제복 목덜미 부분을 잡아 불쑥 일으켰다. 어미고양이가 새끼고양이의 목을 물고 옮기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녀는 곧 비슷한 방식으로 레티시아도 일으켰다. 공포에 후들거리던 심장과 다리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된 듯 했다. 로젤린이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의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 주었다. 둘은 경직된 자세로 상급자의 손길을 얌전히 받았다.

로젤린은 에버하르트의 엉덩이 부분에 묻어 있는 먼지들도 털어 내었다. 퍽, 퍽. 거친 손길이 거침없었다. 유독 엉덩이 부분에 흙이 많이 묻어 있어, 로젤린의 손은 오랫동안 그 위에 머물렀다. 에버하르트는 침묵하며 제 상급자를 쳐다보았고 레티시아는 고개를 돌려 로젤린의 허물을 보는 것을 회피했다. 그리고 칼릭스는 담벼락 위에서 한손으로 두 눈을 가렸다. 얼마간 겪지 못했던 두통의 재래였다.

에버하르트는 경직된 낯 안쪽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녀를 한 겹 감싸고 있는 알 수 없는 신비로움은 이렇게 미묘한 상냥함으로 중화되고는 했다. 그 때문인지, 친한 수습 기사들이 로젤린에 대해 물었을 때 자신은 “어…… 어…… 좋은 분이야?”하는 어색한 대답을 했던 지도 모른다. 레티시아는 “아! 로젤린 경 정말 좋은 분이야! 좋은 분인데…….”라는 찝찝함이 다소 묻어 있는 평가를 했지만, 뒷말을 더 이상 하지 않음으로써 어쨌든 간에 둘 다 좋은 사람이라는 결론을 냈었다.

그들의 미묘하지만 좋은 사람인 상급자가 수습생들의 몸단장을 모두 끝냈다.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는 로젤린에게 경례 후 연무장으로 떠났다. 모의 죽음에도 굴하지 않는 씩씩한 발걸음이었다.

두 남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칼릭스가 담벼락에서 내려왔다. 그는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님. 다른 사람의, 특히 이성…… 그러니까 남자의 신체부위를 함부로 만지시면 안 됩니다.”

오랜만의 “안 됩니다.”였다. 칼릭스의 타박하는 말은 그녀에게 안정감을 줬다. 인간이 된 ‘그것’ 이 최초로 뿌리를 내린 붉은수레바퀴 성. 그곳을 연상시키는 문구였다.

“안 만졌는데.”

만지지 않았다. 확실히 그 먼지를 털어 내는 매서운 손길은 ‘만졌다’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았다. 구태여 따지자면 때렸다? 쳤다? 에 가까웠다. 칼릭스는 그것을 깨닫고 “함부로 접촉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을 바꿨다. “특히 엉덩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낯부끄러워서 신체부위를 언급하는 단어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녀는 정확하게 이해를 한 것 같아 보이진 않았으나, 어찌되었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 칼릭스의 마음은 조금 편해졌다.

둘은 너른 화단을 걸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더 나눴다. 한 달여간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많은 일이 있었다. 사실 누이는 한 시간만 눈을 떼어도 이런저런 사고를 쳤다. 한 달이 지났으니 정말 무수한 일이 있었을 것이다. 로젤린은 무표정한 낯으로 끊임없이 조잘조잘 얘기했다. 색색으로 빛나는 화원의 느슨하고 화사한 공기가 누이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예전의 과묵했던 그녀의 모습과는 달랐다. 언어라던가, 행동이라던가. 하지만 무표정한 얼굴로도 주위의 공간을 따뜻하게 만드는 것이 딱 로젤린이었다. 흰색의 나비들이 그녀의 주변을 날아다녔다.

로젤린은 머리에 꽃잎이 붙던, 나비가 앉던 간에 끊임없이 얘기했다. 듣기만 해도 속이 간질간질해지는 것 같았다. 로젤린이 그에게 보낸 편지에도 똑같이 쓰여 있던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칼릭스는 무뚝뚝한 얼굴로 열심히 호응하며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레이몬드가 쿠키도 주고, 마카롱도 주고, 하급 기사랑 대련하고, 팼고, 이겼다. 병문안도 갔다. 리카르디스 전하를 만날 때는 심장이 막 뛰었다.

그게 뭐였을까. 심장이 왜 그렇게 쿵쿵한 걸까. 로젤린이 차분하게 물었다. 칼릭스는 한층 날이 선 뚱한 표정으로 “글쎄요.” 하고 대답했다. 그녀에게 처음으로 보이는 성의 없는 답변이었다. 그리고는 “저도 리카르디스 전하를 보면 심장이 쿵쿵하더군요. 그렇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라는 거짓말도 덧붙였다.

이야기는 흘러 흘러 암살자 몇을 때려잡았다는 얘기까지 도달했다. 칼릭스의 눈이 번쩍 빛났다. 사나워진 기세에 비해 목소리는 더욱 조용해졌다. 칼릭스의 얼굴이 그녀에게 가까워졌다.

“암살자요?”

“응. 내가 다 잡았어.”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껏 뿌듯해하는 중이었다. 참새를 잡아 온 붉은수레바퀴 성의 고양이같이 가슴을 쭉 피고서.

“그건 왜 편지에 안 쓰셨습니까?”

“썼는데…….”

걸렸다. 월장석 성은 인간뿐 아니라 물품과 서류 따위에도 엄격한 경비가 적용되었다. 외부와 연락을 주고받는 편지는 내용까지 전부 확인한 후 들어오고 나갔다.

로젤린의 편지도 당연히 확인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월장석 성 내부의 사정, 심지어는 2황자의 안위와 관련된 내용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몰수였다. 암살자 둘을 때려잡았다는 편지의 내용 때문에 로젤린은 2황자의 비서인 잇세리온에게 까지 불려가 혼났다.

안 그래도 1황자파인 붉은수레바퀴 가문이라 주시하고 있었건만, 이런 내부 사정까지 제 집안에 흘리려고 해? 내 이 기사를 요절을 내 버리고 말리라! 하고 마음먹고 그녀를 불렀지만…….

[이런 내용을 쓰시면 곤란합니다, 로젤린 경.]

[어떤 내용을 말하시는 겁니까.]

[제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암살자라는 단어가 있군요. 문제를 모르시겠습니까?]

잇세리온의 삐딱한 말에 로젤린은 무표정한 낯으로 “그럼 암살자를 나쁜 사람이라고 쓰면 보내도 됩니까.”라고 되물었다. 잇세리온은 입을 합 다물었다. 그때 잇세리온의 눈빛은 여름에 겨울옷을 꼭꼭 껴입은 사람을 보는 것과 흡사했다. 저 사람 왜 저러는 거지? 미쳤나? 적당한 의문과 의심이 섞여 있었다.

그는 회수한 로젤린의 편지를 다시 읽었다. 8살 수준의 어휘력으로 구성되어 있는 데다가 철자도 조금씩 틀리고, 필체도 완전 어린아이 같았다. 기억을 잃었다더니…… 혹시 근 십여 년 간의 기억이 다 날아간 것일지도 몰랐다.

잇세리온의 화는 로젤린이 잃어버린 세월에 대한 안쓰러움으로 인해 누그러들다 못해 쪼그라들었다. 그렇게 총기가 넘치던 이였는데…… 잇세리온은 연민의 감정을 연보랏빛 눈동자에 한가득 담고는,

[안 됩니다.]

라고 했다. 연민이고 뭐고 간에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이후 로젤린은 암살자를 ‘검은 옷을 입은 인간’, ‘전하를 공격하는 사람’, ‘독을 들고 다니는 남자’ 등 다양하게 표현하며 잇세리온에게 번번이 불려 갔고, 지금은 대충 어떤 내용이 안 되는지 맥락을 파악하게 되었다.

칼릭스는 흐음 하고 목 안쪽을 울렸다. 확실히. 황자의 안위와 관련 있는 중요한 내용을 외부로 반출할 수 있을 리 없다. 제 누이만 걱정하다 보니 그런 기본을 망각했던 것이다.

편지로 얘기하지 못했던 수많은 그녀의 활약은 실로 대단했다. 로젤린은 왼손을 들면서 “이게 나야”라고 하고, 오른손을 들면서 “이건 암살자.”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왼손이 재빠르게 움직이며 오른손을 제압했다. 이렇게, 이렇게 잡은 거야. 하고 2황자를 호위하며 잡았던 수많은 암살자를 하나하나 설명했다.

지금의 그녀에게야 간단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검은달의 암살자들은 은밀하고 강하기로 유명했다. 예전의 누이라면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 어쩌면 사고에서 정말 살아 돌아왔다고 해도 이 성에서 죽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칼릭스가 먼 황성까지 온 이유는 간단했다. 그만두시라. 힘들고 모진 시련만 가득한 그 길을 걷는 것을 그만두시라, 그 말만을 전하기 위해 왔다. 베이고 다치고 죽는 것이 기사의 숙명이라지만 가족으로서 그 모든 일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매우 힘들었다. 지금의 ‘로젤린’이 진정 무엇이건 간에 그녀는 제 누이였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나무만큼 높게 쌓아져 있는 담을 소리 없이 올라갔다. 악의의 냄새를 맡고, 타인의 얼굴거죽을 뒤집어 쓴 자를 한눈에 알아봤다. 뜻이 있다면 눈앞에 있는 것이 바위이건 강철이건 간에 그 얇은 검으로도 베어 낼 수 있었다.

로젤린이 그녀의 수습 기사들을 덮치는 모습에서, 칼릭스의 머릿속에 있던 무언가가 와장창 깨졌다. 떨어져 있는 사이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 그러고 보면 그녀는 강했다. 맨손으로 성인 남자의 목을 비틀어 놓을 만큼. 그녀를 걱정했던 이유는 어쩌면 그녀가 ‘로젤린’이라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눈앞의 로젤린이 제 누이기에. 하나밖에 없는 나의 소중한,

“누님.”

로젤린의 왼손은 여전히 오른손을 다양한 방식으로 제압하고 있었다. 칼릭스가 그녀의 왼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싸 쥐었다. 닿아오는 따듯한 온기에 로젤린이 그를 쳐다보았다.

“꼭 무사히 돌아오셔야 합니다. 누님이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겠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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