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27화 (27/220)

27화.

“절벽에서 떨어졌다고 레이몬드에게 들었습니다. 정말 이만하길 다행이군요. 이델라브힘께서 로젤린을 도우셨나 봅니다.”

“네.”

“전투가 막 일어났을 때, 제가 당신을 찾고 있었습니다. 안 보여서 걱정을 많이 했어요. 막사와 그렇게 멀리 떨어진 절벽에 있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제가 발견되었던 절벽이 막사와 많이 떨어져 있었습니까?”

네, 아니오, 괜찮습니다. 세 가지 답변을 돌려 가면서 사용하던 로젤린의 새로운 대답이었다. 디에즈는 그녀의 반응에 들뜬 듯 보였다.

“네, 정 반대 방향이었습니다. 그래서 찾는 게 좀 더 늦었다고 하더군요.”

“그랬습니까.”

“도움이 못되어 미안합니다. 돌아온 이후로도 줄곧 바빠서 한번을 찾아오지 못했는데, 건강한 모습을 봐서…… 음, 기쁩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로젤린.”

디에즈의 눈이 둥글게 휘어지며 곡선을 그렸다. 디에즈는 그녀가 봐 온 사람들 중에 가장 잘 웃는 사람이었다. 그의 미소를 따라 로젤린도 입꼬리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그녀의 짧은 대답에도 그는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디에즈는 곧 로젤린에게 인사하고 돌아섰다. 아까의 마지막 안부 인사가 그의 진짜 목적인 듯 했다.

로젤린은 지금까지 줄곧 가지고 있었지만, 잠시 잊고 있던 의문을 떠올렸다. 레이몬드에게도 들었던 적 있었다. 암살 부대가 새벽에 막 습격했을 당시에는 그녀의 모습을 보지 못했노라고,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보지 못했다고. 그때는 단순히 인원이 많아서 확인하지 못했던 건가? 하고 두 사람 다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었다. 하지만 오늘 5황자의 말로써 그 전투 당시, 또는 이전부터 로젤린이 현장에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처음 로젤린의 몸을 구성하자마자 몸을 치유하는 것에 많은 힘을 썼다. 추락했을 당시에 발생했으리라 유추되는, 부러진 뼈들. 그로 인해 압박되고 손상된 장기들. 가장 큰 치명상이 그것이었기에 살갗이 찢어지거나, 벌어진 외부적인 상처는 크게 신경 쓰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자니 등에 새겨진 상처도 범상치 않았다. 살가죽은 물론이거니와 근육까지 벌어져 뼈가 다 드러날 정도였으니. 만약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상처 하나로 충분히 사망에 이르렀을 것이다.

암살 부대의 습격 당시 그녀의 부재. 막사와는 한참 먼 곳에 위치한 그때의 절벽. 등 뒤에 깊게 찢겨 있던 상처. 몇 가지 사실이 얼기설기 맞춰지며 여태껏 로젤린이 알고 있던 사실을 비틀었다.

어쩌면 그녀는 암살 부대의 습격 이전에 사고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 * *

“칼릭스.”

칼릭스는 멍한 눈길로 제 누이를 바라보았다. 웃는 얼굴이 봄바람만큼 부드러웠다. 안 본 사이 그녀는 더욱더 ‘로젤린’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로젤린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칼릭스를 와락 껴안았다. 그는 흠칫 몸을 떨다 곧 그녀를 마주 안았다. 뭔가 좀 쑥스러웠지만 손은 어느새 제 누이의 등을 도닥이고 있었다. 칼릭스의 입가에도 미소가 살짝 떠올랐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누님.”

“응.”

햇빛을 받는 로젤린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반가워하는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가면같이 온도 없는 표정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안본사이 많이 사회화된 모양이었다.

칼릭스는 로젤린에게 슈크림이 들어간 상자를 건넸다. 로젤린은 상자를 열어 보지도 않고 활짝 웃었다. 예민한 후각으로 내용물을 파악한 듯 했다. 로젤린이 좋아하는 음식이라 하면 단연코 고기라 말할 수 있으나, 디저트 계열 또한 뺄 수 없었다. 처음 생크림을 먹은 로젤린이 눈을 부릅뜨고서 몸을 뻣뻣하게 굳히던 모습은 아직까지도 칼릭스의 뇌리에 깊게 박혀 있었다.

로젤린은 냄새를 킁킁 맡으며 기뻐했다. 칼릭스는 제 누이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곧 상자를 열어 슈크림 하나를 칼릭스에게 건넸다. 그는 제 손바닥 위에 덩그러니 놓인 슈크림과 누이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설마 나에게 주는 건가? 음식을 나눠먹는 수준까지 도달했단 말입니까 누님? 칼릭스는 제 지난날 폭풍 같던 고난의 나날을 생각하며 눈물을 찔끔 흘릴 뻔 했다. 칼릭스가 감격스러움에 그녀를 아련하게 쳐다보자 로젤린이 조금 시무룩한 기색을 띄웠다. 그녀의 모습에 의문을 가질 찰나, 로젤린이 박스에서 슈크림을 하나 더 꺼내어 칼릭스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 감격의 눈빛을 하나 더 달라는 재촉으로 봤던 모양이었다.

칼릭스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슈크림을 먹었다. 그리고 남은 하나는 로젤린의 입에 넣어 주었다. 수도에서 유명한 제과점이라더니, 슈크림을 음미하는 그녀의 눈이 잔뜩 가늘어져 있었다. 무척이나 만족스러워보였다.

“그런데 누님. 지금은 황자 전하를 호위하는 시간이 아닙니까?”

“응.”

“그런데 여기에…… 이렇게 계셔도 됩니까?”

“응. 전하가 허락했어.”

로젤린이 말을 덧붙였다.

“죽기 전에 가족은 한번 봐야 하지 않겠냐하시던데.”

“……여전하시군요, 리카르디스 전하께서도…….”

리카르디스가 발타로 떠나는 사절단의 총 책임자가 되었다는 소식에, 칼릭스는 먼 황성까지 와야 했다. 2황자의 위험에는 당연히 제 누이의 위험이 따랐기 때문에. 물론, 칼릭스의 예상과 한 치도 다름없이 로젤린은 태평하기 그지없는 상태였다.

복잡한 마음이 한층 더 커졌다. 누이를 잃는 심정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고통스럽게 조각난 마음을 이제야 허술하게라도 이어 붙였건만, 또다시 그녀를 잃게 될 수도 있었다. 칼릭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직접적으로 황자 곁을 지켜야만 하는 상급 기사이니만큼 큰 위험에 노출될 것이다. 하필이면 승급하자마자 발타로 가야하다니. 칼릭스는 목소리를 낮췄다.

“발타를 통치하는 1왕자 하카브는 분명 검은달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발타의 최고 통치자가 검은달이니, 발타 왕국 그 자체가 2황자 전하의 적이라고 보셔야 합니다.”

“응.”

“……위험…… 하실 겁니다. 폐쇄적인 기질을 가진 곳이라 밝혀지지 않은 부분도 많습니다. 새로 합성해 낸 마독 이외의 다른 위험 요소들도 많을 겁니다. 정말 조심하셔야,”

“잠깐.”

로젤린은 한쪽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끊어 내었다. 그녀는 야생동물같이 고개를 휙 돌리며 높게 세워진 벽 너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로젤린은 곧 능숙하게 벽을 타고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칼릭스의 귓가에 “으아악!” “꺄악!”하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사람을 덮친 건가! 다행히도 아직까지 제 누이가 지나가는 인간을 덮친 적이 없긴 하지만 칼릭스는 잘 알고 있었다. 아직까지 그녀의 야생성이 완전히 죽지 않았음을. 그 야생성은 어느 방향으로 튈지 모르는 울퉁불퉁 구겨진 공 같은 것이었다. 왼쪽으로 굴렸더니 오른쪽으로 튀어 오르고, 오른쪽으로 던졌더니 아래쪽으로 굴러가 버리고, 화가 나서 버리면 골 안으로 들어가 점수를 얻게 되는 그 미묘한 불규칙성.

그러므로 누이가 무언가를 뺏어 먹기 위해 누군가를 덮쳤다고 해도 그다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도리어 착실히 사회화가 되어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누이의 모습이 낯설 뿐이었다. 울퉁불퉁 공 같은 그녀를 알게 된지는 고작 몇 달에 불과했지만, 어떠한 면에서는 스무 몇 해를 보아 온 로젤린보다도 더 강렬한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깊게 새겨졌다. 이 안정적인 불규칙성. 칼릭스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칼릭스는 로젤린을 따라 벽을 타고 올라갔다. 그녀가 오를 때에는 손바닥으로 가볍게 벽을 치는 소리가 났었다. 칼릭스는 도움닫기부터 땅이 파일정도로 깊고, 무겁게, 그리고 쿵쿵 두드리는 거친 소리가 났다. 극명하게 비교되었다.

칼릭스가 높은 담벼락 위에 올라서서 아래를 바라볼 쯤엔, 로젤린이 한 남자를 제압하고 있었다. 칼릭스는 “죽이면 안 됩니다!”라던가 “다른 사람의 음식을 뺏어 먹으면 안 됩니다!”라고 급히 말하려 했다. 하지만 로젤린에게는 딱히 살의가 없어 보였고 그들의 손에도 먹을 것이 들려 있지 않았다. 칼릭스는 담 위에서 잠자코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군청색 머리카락을 묶은 남자는 바닥에 엎어져 로젤린의 밑에 깔려있었다. 또한 적갈색 머리의 여자는 무릎걸음으로 도망가는 중이었다. 로젤린은 멋지게 공중제비를 돌아 도망가던 여자의 앞에 탁 착지했다.

도망가던 여자, 레티시아는 고요하게 강림한 로젤린의 바지 자락을 보고 경기했다.

“히익!”

로젤린이 쭈그려 앉아 레티시아의 이마를 톡 건드렸다.

“또 죽었습니다. 레티시아. 에버하르트.”

“흐아…….”

“하아아…….”

로젤린의 선고에 두 남녀가 풀썩 바닥에 누웠다. 그들의 등과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며 급박했던 순간의 심정을 대변했다.

“벽을 타고 오르는 소리도 못 들으면 어떻게 합니까.”

“못 들었습니다…….”

“심각하군요, 레티시아.”

“작게 듣긴 했는데, 그냥 벽을 콩콩 치는 소리인 줄 알았습니다…….”

“벽을 디디며 올라오니 소리의 위치도 다르지 않겠습니까? 벽의 상단 부분에서 소리가 나면 당연히 경계를 했어야 합니다, 에버하르트.”

칼릭스는 그 알 수 없는 상황을 인지하기도 전에 제 누이의 깔끔한 존댓말에 감격했다. 영명 하십니다 누님……!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억울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보았다. 모의로 몇십 번씩 죽어가며 습격당해서 이제는 어느 정도 바람을 읽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자신만만해하던 것이 어제였는데, 바로 오늘. 그녀의 발소리가 한층 더 조용해졌다.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그녀의 전력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로젤린의 습격을 못 막을 시, 혹독한 체력 단련 10세트를 해야 하는 것이 그들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체력 단련을 할 때마다 그녀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적이 없었기에, 한번은 에버하르트가 ‘단련을 했는지 안했는지 어떻게 아십니까? 혹시 저희가 거짓말을 한다던가…….’ 하는 소심한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었다. 그의 물음에 로젤린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살짝 웃었다. 그리고는.

[어디 한번 해 보시죠]

라는 대답을 했다. 에버하르트는 순간 그녀가 화난 어머니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다. 대놓고 널 죽이겠다고 말하는 암살자보다 훨씬 두려웠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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