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2황자 리카르디스가 발타로 떠나는 사절단의 총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월장석 성은 낮게 가라앉았다. 몇 달 전 사냥 대회에서 수많은 하얀밤의 기사단원들이 사망했을 때만큼이나 어두운 분위기였다. 단순히 월장석 성의 주인이 오랜 기간 자리를 비우리라는 사실 때문은 아니었다.
일라베니아 제국과 검은달. 국경을 두고 나란히 있는 두 세력 간의 분쟁은 오랜 기간 지속되어왔다. 검은달이 발타 왕실의 수족임을 모르는 자는 대륙 어디에도 없는 관계로, 일라베니아와 발타. 두 나라간의 분쟁이라 말해야 정확할 것이다. 이 상황에서 사절단이라는 책무는 그저 이름만 평화로울 뿐, 단두대에 목을 들이미는 행위나 진배없었다. 심지어 리카르디스는 검은달과 분쟁이 있을 때마다 선두에 서 있었으며, 또한 언제나 승리해 왔다. 발타의 입장에서 그보다 더한 원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공이 빛나는 만큼이나 단두대의 칼날 또한 번쩍번쩍 빛나고 있으리라.
수많은 하인과 하녀들의 얼굴에 칙칙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누가 보면 월장석 성벽에 장례 중이라는 표식의 하얀 천이라도 걸렸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얀밤 기사들 또한 주인의 처지에 분노함과 동시에 그들 자신의 미래에 깊은 애도를 보냈다. 바람 앞의 촛불보다 아슬아슬하고 보잘 것 없는 목숨. 누군가는 체념했고 누군가는 결의를 다졌다.
12월의 눈 쌓인 숲만큼 고요했던 월장석 성이 잠시간 떠들썩거렸다. 성을 방문한 손님 때문이었다. 리카르디스가 사절단의 총책임자로 임명된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월장석 성을 향하던 발길을 끊었다. 행여나 그의 눈에 들어 발타로 같이 먼 길을 떠나야 할까, 하는 걱정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누군가는 간사하다고 비난하는 행동이었지만 리카르디스는 그들을 이해했다. 자신이라 하더라도 얼씬도 안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오랜만의 손님이었다. 게다가 풍족한 선물과 함께였다. 발타의 왕자, 하카브가 좋아한다던 일라베니아 명장의 술과 각종 진귀한 보석, 산해진미, 아름다운 예술품이 늘여진 풍경이 장관을 이루었다.
로젤린은 호위 임무를 위해 월장석 성으로 향하다 그 광경을 보았다.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던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입을 떡 벌리고 산처럼 쌓이는 진귀한 선물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새벽부터 로젤린의 습격을 두 차례나 받아서 매우 피곤했지만 그것을 잊을 만큼 놀라워했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그들의 귓가를 스쳤다.
“로젤린 경.”
밝은 금발의 남자가 인파 속에 묻혀 있다가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리카르디스에 비견할 만큼의 장신이었다. 그의 유순한 인상이 단단한 체격에서 풍기는 위압감을 어느 정도 상쇄했다. 로젤린이 멀뚱히 그를 바라만 보고 있자 뒤에서 레티시아가 속삭였다.
‘설원의 월계수, 5황자, 디에즈 전하이십니다.’
로젤린이 그녀의 말을 듣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레이몬드로부터 그녀가 기억상실로 인해 지식과 상식을 깡그리 잊어버렸다는 말을 들었다. 이후로 고위 귀족과 황족들의 인상착의와 이름, 작위와 직위 등을 다급히 암기해 둔 상태였다. 그들의 독특한 상급 기사를 보필하기 위한 업무의 일환이었다.
로젤린은 검술을 익히는 데에는 빠른 습득 속도를 자랑했으나, 책상에 앉아 하는 모든 작업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기사가 검을 잘 쓰면 됐지, 사람들의 얼굴이나 직위를 외우는 것이 뭐가 중요한 거지? 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물론 그 사실을 알 도리 없는 두 명의 수습 기사들은, 황족과 고위 귀족은 고사하고 황제의 얼굴도 모를 것이라는 레이몬드의 말에 농담이 과하다며 웃어 넘겼으나…….
이후 곧바로 남자 기사들의 공용 목욕탕에 태연하게 들어가려던 로젤린을 목격해, 웃음기를 얼굴에서 지워야 했었다. 그 아찔한 순간 덕분에 레티시아는 제 상급자의 상식 수준이 어느 정도에 머무르고 있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하얀 밤을 부르는 일라베니아의 축복을. 하얀밤 기사단의 상급 기사 로젤린이 설원의 월계수 5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로젤린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 또한 그녀를 따라 무릎 꿇었다.
“이런. 일어나세요, 경. 오랜만입니다.”
로젤린이 수습 기사 두 명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이 ‘저랑 5황자 알던 사이입니까?’ 하고 묻고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가 요동치며 흔들렸다. 모…… 모르는데…… 모릅니다…… 그들이 고개를 살짝 저어 보였다.
인상착의와 장신구를 보고 인물을 파악해 내는 능력과, 기억을 잃어버린 상급 기사의 인간관계를 파악하는 능력은 별개의 것이었으므로. 이번 건은 그들의 권한 밖이었다. 수습 기사라고 해도 그녀와 함께한지 고작 2주가 지났을 뿐이었다.
로젤린은 다시 5황자와 눈을 마주했다. 그는 봄날의 햇살 저리가라 할 정도로 따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냥 대회에서 많이 다쳤다는 얘기를 듣고 걱정했는데, 이리 건강해 보이니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형님의 호위를 맡게 되었다지요? 이번 사절단에도 같이 떠나겠군요.”
“그렇습니다.”
에버하르트는 진땀을 뻘뻘 흘렸다. 대화가 도무지 이어지질 않았다. 과거 로젤린도 지금의 그녀처럼 말 수가 적다고 듣긴 했으나, 지금은 상대가 황족이다 보니 자칫 무례하다 여겨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도 5황자 디에즈는 그녀의 말투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잘 됐습니다. 친한 이가 몇 없어 걱정했는데. 발타에서도 잘 부탁드립니다, 로젤린 경.”
“……발타로 떠나십니까?”
로젤린이 드물게 되물었다. 그녀는 사절단으로 떠나는 인원 명단 중에 다른 황자들이 없었음을 알고 있었다. 5황자가 예쁘게 웃어 보이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발타의 하카브 왕자와는 만난 적 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친분이지만요.”
디에즈는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사절단에 뽑힌 귀족들은 자신의 죽음을 눈으로 보고 온 듯 벌레 씹은 표정을 하고 다녔다. 또는 그들의 가족이 대신 거무죽죽한 낯으로 참담해 하고 있거나. 하지만 눈앞의 남자, 5황자 디에즈의 반응은 그들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띠고 있었다.
발타의 전통 음식 중에 어린 양을 향신료와 함께 통째로 삶는 것이 있는데 그게 아주 환상적이라는 둥, 자신이 잘 아는 곳이 있는데 나중에 리카르디스 형님과 같이 가자는 둥. 5년 전 만났을 때는 하카브가 자신보다 키가 컸는데 최근 자신이 급성장해서 이제는 본인이 더 클 거라는 둥. 철없어 보이기까지 하는 낙관적인 태도였다. 로젤린은 꼬박꼬박 네, 예, 기대됩니다. 네 맛있겠군요. 예. 참 크십니다. 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참 발타의 풍습과 요리를 설명하던 디에즈가 눈웃음 지으며 그녀에게 신호를 보냈다. 수습 기사들을 떨어트리고 따로 얘기를 나누자는 듯 보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의 로젤린은 그의 은근한 신호를 알아들을 만한 눈치를 갖추지 못했다.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만 5황자의 눈짓을 알아듣고 초조하게 손바닥의 땀을 제복에 닦았다.
“…….”
몇 초가 고요히 흐르며 그들 사이에 침묵이 늘어졌다. 디에즈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로젤린이 입을 딱 다물고 있는 행동을 보고 거절당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안절부절. 마음속으로 발만 동동 구르는 에버하르트를 뒤로하고, 레티시아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로젤린을 확 떠밀었다. 무례하다고 혼나는 건, 혼나는 거고 지금은 눈치라고는 쥐뿔도 없는 제 상급 기사를 보필해야만 했다.
로젤린이 한 발자국 앞으로 밀려나오자 디에즈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이끌었다. 로젤린은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레티시아를 돌아보았다가 움찔했다. 레티시아가 눈에 불을 켜고 격렬하게 디에즈를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로젤린은 그녀의 저의를 대충 깨달은 듯 했다. “왜 5황자 전하에게 손가락질을 합니까?” 라는 질문 없이 순순히 디에즈를 따라갔다. 수습 기사 두 명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푹 쉴 수 있었다.
둘은 제법 인적이 드문 곳까지 걸었다. 로젤린은 계속 월장석 성을 돌아봤다. 디에즈는 로젤린의 행동으로 그녀의 마음을 읽어 냈다.
“잠깐이면 됩니다.”
“예.”
‘잠깐’이라는 기간이 정해졌음에도 디에즈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로젤린도 차분하게 그를 마주했다.
“걱정했습니다, 로젤린.”
로젤린. ‘로젤린 경’이 아니었다. 눈앞의 이 남자와 로젤린은 친근한 사이였던 건가?
불어오는 바람에 그녀의 콧잔등 위로 꽃잎이 내려앉았다. 로젤린이 간지러움에 코를 찡그리자 디에즈가 그녀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미소 지은 남자가 로젤린의 얼굴에서 꽃잎을 살포시 떼어 냈다. 디에즈의 손끝에 달려있던 꽃잎은 불어오는 바람에 정처 없이 날아갔다.
로젤린은 바람을 좇던 눈동자를 굴려 그를 올려보았다. 스스럼없이 다정한 손길이었다. 이 남자와 로젤린은 친했나보다. 생각보다도, 훨씬.
“감사합니다.”
그녀의 변하지 않는 딱딱한 대답에 디에즈는 기운 없는 미소를 띠었다.
“정말이었나 보군요. 그대의 머리에 조금, 아, 실례. 기억에 이상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디까지 기억하십니까? 저는 기억합니까?”
로젤린이 고개를 저었다. 디에즈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표정을 가다듬고 다시 웃었다. 기억상실이란 병은 일시적으로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며 도리어 그녀를 위로했다.
디에즈는 사건 이후 그녀에게 일어난 일 하나하나를 알고 싶은 듯, 여러 가지를 질문했다. 로젤린은 ‘네.’와 ‘아니오.’를 적극 활용하며 열심히 답했다. 디에즈는 그녀의 무성의해 보이는 대답에도 어느 정도의 궁금증을 해소한 듯, 한숨을 푹 쉬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