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황제의 집무실 문밖에 서 있던 시종이 안으로 들어갔다. 리카르디스의 방문이 알려지자, 곧 문이 열렸다. 화려하게 꾸며진 내부 중앙에는 밝은 금발의 황제가 심기가 불편한 듯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하얀 밤을 부르는 일라베니아의 축복을. 설원의 월계수, 영광의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하얀 밤의 축복을. 어서오너라 리카르디스.”
리카르디스는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에 널려 있는 서류에 눈길을 돌렸다. 몇 개 보이는 단어와 문구를 조합해 보니, 발타 왕국과 인접한 영지에서 올라온 각종 보고서임을 알 수 있었다. 최근 들어 검은달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음이 입증된 것이다. 황제가 얼굴을 구기고 있던 것도 이해가 갔다.
“마녀가 입을 열었다지.”
“예, 저번의 사냥 대회에서 처음 사용된 독입니다. 최근 월장석 성내에서도 사용되려 했지요. 이 서류를 보아도 되겠습니까, 폐하?”
“그리 하거라.”
리카르디스는 제일 위에 펼쳐져있던 종이를 잡았다. 수십 장 쌓여 있는 서류의 제일 상단에는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사냥 대회가 있었던 넓은 영토 비스타를 다스리는 자였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변경백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황제에게 하사받은 영토를 방어하는 의무만 있는 타 귀족과 달리, 타국을 먼저 침범할 수 있는 권리까지 지닌 작위였다. 자치적인 군사권을 가지고 있어 다른 백작들보다 힘이 강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 위는 대대로 머리가 좋고 호전적인 인물이 물려받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2년 전에 마른가시나무 백작 위를 승계한 그녀는 전대, 선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전쟁광이었다. 여자라고 우습게 보던 이들의 말이 한순간에 쏙 들어갈 정도로 피가 자욱한 행보를 보였다. 마른가시나무 영지를 지키는 수가 많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전투에 대한 감각이 유달리 뛰어난 인물이었다. 군사를 잘게 흩트리고, 합치고,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전술은 마치 그 자체가 살아 있는 것 같은 생생함이 있었다. 많은 전술가들이 그녀를 그렇게 평했다. ‘경계의 학살자’, ‘미친개’
어떤 불리한 상황에서도 최선의 상황을 이끌어내는 이였는데…… 지금 리카르디스가 보고 있는 서류에는 그녀에 대한 인식과는 제법 다른 내용이 서술 되어 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최악이라 할 수 있는.
사십 명의 인원이 어둠을 틈타 산을 넘어와 사백이 넘는 피해를 내었다. 인간의 힘도, 신의 힘도 소용이 없었다. 검은달은 과거와는 다른 위협을 휘두르고 있으니 부디 황제께서 어린 백성들을 굽어 살피시어 일라베니아의 영광을 세세토록 전하길 간절히 바란다는 내용이 길게 늘여 적혀 있었다. 마른가시나무 영지에게 사백이라는 인원은 사실 그렇게 큰 피해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영지뿐만 아니라, 인접한 다른 영지에서도 비슷한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하자 흐름이 심상치 않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황제가 자신의 피곤해 보이는 낯을 연신 쓸었다.
“골치 아프게 되었다. 언제까지 묻어 둘 수 있을는지…….”
리카르디스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게 어디 숨겨질 만한 사안이던가. 검은달이 만들어 낸 새로운 독은 어떤 의사의 힘도, 어떤 신관의 힘도 간섭하지 못했다. 사냥 대회 이후로 잠잠하던 그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짐과 동시에 독의 사용도 점차 늘고 있었다. 검은달과 잦은 전투를 치러야만 하는 변경의 영지들은 빠른 시간 안에 높은 치사율을 가진 독에 의문을 가질 것이다.
“나는 독의 쓰임새와 영향이 확대되기 전에 발타를 지도에서 없애 버리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
멍청하다, 멍청하다 했더니 이 정도면 가히 예술의 경지였다. 리카르디스는 어이가 없어서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는 정말 엘피디오의 아버지가 맞았다. 정말 똑 닮은 부자지간이 아닌가. 검은달의 수뇌부가 발타의 왕실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고는 하지만, 왕실의 공식 입장은 항상 사실과 달랐다.
검은달이 발타에 주둔한다고는 한들 우리 발타 왕실과는 전혀 관련 없으며, 발타 또한 검은달을 축출해 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물론 그 얘기를 믿을 만한 나라는 대륙 그 어디에도 없었다. 어찌되었든 표면적으로나마 그런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
일라베니아와 발타는 아직까지 큰 전쟁을 치른 적이 없었다. 한두 사람이 개인적으로 싸우는 것과 달리 나라와 나라의 충돌은 커다란 피해를 낳기 마련이었다. 그랬기에 전쟁은 명분이 중요했다. 발타는 검은달이라는 집단을 왕실과 분리함으로써 명분을 싹 지워 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황제는 명분이고 나발이고 전쟁부터 일으키자는데, 그 생각 없음에 두통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심지어 다른 나라도 아니고 빛의 신을 모시는 신성 제국에서 다른 나라에 먼저 쳐들어가자고? 일라베니아 제국의 백성들조차 기함할 일이다.
리카르디스가 눈을 들어 황제를 쳐다보았다. 진짜로 전쟁 일으킬 생각은 아니겠지? 라는 뜻이 담겨 있는 눈빛이었다. 황제도 그 뜻을 읽은 모양이었다.
“한데 엘피디오가 돌아가는 추이를 좀 더 살펴보자 하더구나.”
엘피디오가 황제보다는 머리가 조금 더 돌아갔나 보다. 리카르디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그리고.”
황제는 팔걸이 부분에 손가락을 느릿하게 부딪치며 딱…… 딱…… 하는 소리를 내었다. 황제의 손가락이 둘 사이의 침묵을 일정한 속도로 깨트리고 있었다. 이유 모를 불쾌함이 밀려왔다.
“사절단을 보내자는데 나 역시 그 의견에 동의했다.”
엘피디오 이 개새끼가. 리카르디스는 얼굴을 확 굳혔다. 황궁에 사는 모든 이가 그렇듯이 그 또한 제 감정과 표정을 숨기는 것에 매우 능숙했다. 그 엘피디오에게 조차 사랑스러운 남동생 역할을 해내지 않았던가. 지금의 리카르디스는 곧 수습했다고는 하지만, 제 감정의 파편을 황제에게 고스란히 드러내고 말았다. 다행히도 황제는 제 할 말만 늘여놓느라 그것을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발타에 사절단이 방문했던 게 2년 전이었던가. 제법 오래되었군. 슬슬 그 놈들을 압박할 때도 되었어…… 더러운 들개 놈들 같으니.”
“……발타와 인접한 영지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일어나는 이 시점에서 사절단을 보내기엔 위험이 많이 따르리라 생각됩니다. 또한 새로이 만들어진 독에 대해 연구도, 완벽한 해독법도 없는 이 상황은 그들에게 훨씬 유리하게 돌아가겠지요. 사절단을 보낸다고 한들, 들이는 수고와 위험 비해 소득이 적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엘피디오가 왜 아침부터 황제를 찾았나 했더니 하여간에 잔머리는 잘 돌아가는 놈이었다. 황제를 부추겨서 자신을 사절단으로 보내 버리려는 것이다. 말이 사절단이지 지금의 상황에서야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하루에도 암살자 서넛을 보내며 죽이고자 간절히 염원했던 상대가 제 영역으로 걸어 들어온다는데…… 발타의 왕자, 하카브가 그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으니.
사냥 대회에서 생환한 지 얼마 되었다고 황제는 또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으려 했다. 만약 2황자 리카르디스가 발타에서 죽게 된다면, 이보다 더 훌륭한 전쟁의 명분은 없을 테니까. 사절단으로서 발타에서 무언가를 얻어 와도 그만, 리카르디스의 죽음으로써 전쟁을 일으킬 명분이 생겨도 그만. 엘피디오의 얘기를 수락한 배경에는 그런 계산이 깔려 있을 것이다.
“걱정이 과하구나, 리카르디스. 내가 누구더냐. 이 나라의 이름이 무엇이더냐. 대륙을 축복하는 영광의 빛은 눈과 귀가 먼 자들 또한 느끼는 것이다. 고작 독 하나에 수그러들 광휘가 아니다.”
새로운 독으로 인해 상황이 발타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것이라는 말이 매우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황제는 제 권위에 흠집이라도 간 듯 굴었다. 조금 까칠해진 태도와 목소리에 리카르디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하여간 제 말에 토를 다는 꼴을 못 보는 인간이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발타의 들개들이 워낙 위아래를 모르는 놈들인 데다, 요즘 들어 더욱 기세가 사나워졌다 보니…… 제가 괜한 걱정을 했던 모양입니다.”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숙이자 황제의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무슨 세 살배기 어린애도 아니고, 어르고 달래는 것을 뭐 이리 지극정성으로 해야 하는지. 피로가 몰려왔다.
“그래. 그놈들의 기세가 사나워지기는 했지. 그래서 사절단을 보내려는 것이다. 네가 검은달을 누르는 것에 혁혁한 공을 세웠지 않느냐. 리카르디스라는 이름이 발타를 압박하기에 아주 효과적일 듯하구나. 제국의 2황자라는 고귀한 신분과 너의 이름 안에 이델라브힘의 영광이 함께할 테니 걱정 말거라.”
한번 만류하려던 것은 이미 실패했다. 리카르디스는 황제의 뜻을 거스르려는 시도를 두 번은 하지 않았다. 이미 마음을 정한 듯 보이는 황제의 태도는 그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주지 않았다. 엘피디오가 솜씨 좋게 제 아비를 구워삶은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한 번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수많은 죽음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리카르디스는 소파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황제 폐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황제가 허허 웃으며 리카르디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정식으로 사절단을 보내겠다 공표하는 것은 며칠 뒤가 될 거라 했다. 리카르디스는 알겠노라 대답하고 황제의 방을 떠났다. 리카르디스의 뒤를 따르던 잇세리온이 분개하는 소리가 들렸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거친 숨소리로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턱이 아플 정도로 이를 꽉 물었다. 살짝 뜯긴 입술로부터 피 맛이 비릿하게 느껴졌다.
“월장석 성으로 돌아간다.”
백색의 제복을 입은 호위 기사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