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검은달이 외부의 적이라고는 하지만 2황자 리카르디스를 제거하겠다는 목적을 위해 잠시나마 손을 잡았다. 검은달, 아니 발타에서도 그의 존재는 눈엣가시였다. 리카르디스가 검은달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에 크게 공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검은달과의 동맹은 아주 빠른 속도로 성립됐다. 엘피디오의 세력만으로 견제할 때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훨씬 수월해졌지만, 리카르디스는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도리어 수세에 몰린 형국에서야 그의 진면모가 드러나는 듯 했다. 바리바리 숨겨 놓은 것들이 어찌나 많은지. 동맹 후, 금방 결착이 날 것이라 생각한 승부는 아직까지도 일진일퇴를 하며 줄다리기 중이었다.
사냥 대회에서 기필코 처리를 하겠다고 하더니 실패했다. 이후에 암살자가 월장석 성내로 들어갈 수 있게 도와 달라고 해서 어떻게든 넣어 줬더니 그것도 실패했다. 심지어는 그날 막 호위 임무에 배치된 신입 상급 기사에게 피떡이 되었단다.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었다. 리카르디스 그놈이 얼마나 기고만장해할지. 상상만 해도 열이 뻗쳤다.
그 상황에서 리카르디스가 독의 정체를 알아냈다. 마력과 독이 섞인 혼합물이라고 했다. 심지어는 성력으로 치유가 되지 않는다고. 엘피디오는 어이가 없었다. 성력이 무쓸모해지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독의 존재 자체가 문제였다. 엘피디오는 검은달로부터 그런 정보를 전달받지 못했다. 하카브가 동맹이라는 이름 하에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전혀 좋은 조짐이 아니었다.
만약 검은달의 발톱이 자신을 향하게 된다면. 그 독을 해독할 방법이 없다면 자신 또한 위험해질 것이다. 아니 이미 위험했다. 하나의 목적을 위한다는 그럴싸한 명분은 언제든 깨어질 수 있었다. 엘피디오는 그의 밝은 금발을 마구 헝클였다. 일이 엉망으로 꼬이고 있었다. 인상 쓰며 고민 중이던 강철발굽 백작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습니다, 전하. 하카브 왕자가 패를 전부 보이지 않았으리라고는 예상했던 일 아니겠습니까.”
“젠장, 그래도 이런 거라고 생각이라도 했겠나? 리카르디스뿐만 아니라 이제 나, 그리고 그대들의 목숨까지 전부 하카브에게 달려 있는 거나 마찬가지지. 우리가 리카르디스의 방패가 되어 준 사이에 그 개새끼들은 일라베니아를 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어! 아주 환장하겠군!”
엘피디오가 초조한 발걸음으로 방 안을 서성였다. 강철발굽 백작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윗사람으로서 보여야 할 태도는 어디에다 버리고 왔는지, 눈 씻고 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랫사람을 다독이며 차근차근 일을 해결해 나가려고 해도 모자란 판국이었다. 이렇게 오밤중에 가신들을 불러서 온갖 성질을 낸다고 풀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직 동맹을 맺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아직 바라는 것이 남아 있는 겁니다. 그것을 쥐고 한번 거래를 해 보시지요. 해독제가 없는 독은 없습니다. 우선적으로 그걸 받아내도록 하시지요, 전하.”
엘피디오는 씨근덕대는 것을 멈추고 그제야 백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결국 그들이 원하는 것은 뻔합니다. 축복의 밤을 불러내기 위한 시도는 일라베니아 제국뿐만 아니라 발타 왕국에서도 항상 있었습니다. 황제가 되면 열람할 수 있는 비밀 서고. 그곳에 있지 않습니까? 하얀 밤을 불러내기 위한 방법이 적힌 자료가.”
“있기는 하지.”
“방법을 안다고 할 수 있었다면, 저희도 진작 했겠지요. 하카브 왕자가 그 자료를 얻는다고 해도 결코 축복의 밤을 불러내지 못합니다. 결국에는 쓸모가 없는 정보라는 얘기입니다. 검은달에 넘어간다고 저희에게 치명적일 이유는 하나 없습니다.”
“흠…….”
엘피디오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백작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수천 년이 지나는 동안, 한 세대에 몇 명의 인원만이 겨우 알던 정보였다. 숨기고 숨겨 왔던, 어쩌면 예전에는 중요했을지도 모를 정보였다. 그렇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일라베니아가 대륙을 쥐고 흔들 수 있었던 강력한 무기일지도 몰랐다.
“나에게는 쓸모가 없고, 남에게는 필요하다면 최대한 비싼 값으로 팔아 넘겨야지요.”
“그건…… 그렇지.”
“2황자 전하께서 파악한 독의 정체는, 이미 황제 폐하의 귀까지 들어갔을 겁니다. 빨리 움직이셔야 합니다, 전하.”
엘피디오는 고민했다. 어떻게 움직여야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을까. 황제에게 검은달의 새로운 독의 정체가 알려졌다. 황제는 신성력과 황권의 권위를 매우 중요시 여기는 자였다. 그런 제 아버지의 성질 상, 그 독의 정보를 듣게 된다면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발타가 황제의 얼굴에 장갑을 던지는 행위보다 더 확실하게 결투를 신청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아직 전쟁은 일렀다. 해독제 이전에, 발타는 아직 엘피디오에게 쓸모가 있는 존재였다. 무엇보다도 리카르디스를 죽이는 것이 먼저였다. 일라베니아에게 오랜 숙적이 발타라면, 엘피디오에게 가장 오래된 적은 리카르디스였다. 그를 경계하면서 해독제를 가장 빠르게 얻어내는 방법. 엘피디오는 눈을 번쩍였다.
“다행히 쓸 만한 패가 하나 있군.”
죽어도 상관없는. 엘피디오는 뒷말을 삼켰다. 수십 개의 눈이 엘피디오에게 와서 박혔다.
“디에즈를 불러와라.”
* * *
리카르디스의 아침은 늦게 시작되었다. 간밤에 갑자기 시작된 술 대결의 여파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꿀물을 가지고 온 잇세리온의 표정은 철없는 아들을 보는 어머니와 많이 닮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 즐비하게 굴러다니는 수많은 술병, 카펫에 얼룩덜룩 묻은 붉은 와인 자국. 아직 꿈나라에 있는 리카르디스에게서는 알콜의 향기가 풀풀 풍겼다.
몸을 흔드는 손길에 리카르디스는 신음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빛의 방향 때문에 잇세리온의 짙은 갈색 머리가 검은색처럼 보였다. 그는 흠칫 몸을 떨고 눈을 비볐다. 보좌관 잇세리온이었다. 리카르디스는 한순간 그를 로젤린으로 착각했다는 것이 창피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언제쯤 방을 나갔지?
술을 과하게 마셔서 두통이 약간 있는 걸 빼면 나름 숙면을 취했다. 덕분에 오늘은 모처럼 몸이 가벼웠다. 잇세리온이 미리 준비해 놓은 목욕물에는 김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는 코 밑까지 깊게 몸을 담갔다. 따뜻한 물에 몸이 노곤히 풀리자 어젯밤의 기억이 어슴푸레 떠올랐다. 까무룩 잠들기 전에 그녀가 무어라 말했던 것 같은데, 도무지 기억나질 않았다.
막 황제의 집무실을 나서던 엘피디오가 인상을 찌푸렸다. 정면에서 걸어오던 리카르디스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를 보고 더없이 환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미소는 햇살조차 무색하게 만들 정도였다. 엘피디오는 그런 리카르디스의 모습을 보고 더욱 얼굴을 구겼다. 저게 약을 처먹었나.
“이런, 오랜만입니다 형님.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그래…….”
떨떠름한 엘피디오의 답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했다. 날씨가 좋다는 둥, 이델라브힘이 굽어 살피는 좋은 낮이라는 둥, 자신에게 좋은 찻잎이 들어왔는데 선물로 드리겠다는 둥. 엘피디오는 그의 사근사근한 태도, 부드러운 말투에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다가 찻잎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최근 시도했던 회심의 암살이 빗나갔던 것을 상기해냈기 때문이었다.
월장석 성에 심어 놓은 세작의 말로는 새로이 호위 임무를 맡은 기사의 공이라고 했지만, 엘피디오는 믿지 않았다. 고작 호위 기사 한 명에게 들킬 정도로 검은달은 어수룩한 집단이 아니었다. 분명 눈치가 빠르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리카르디스가 알아챘을 것이다. 엘피디오는 언제나 리카르디스의 능력을 깎아내리려 했지만, 이런 순간에는 항상 그의 유능함을 믿었다. 언제나 제 일에 훼방을 놓고 자신만만한 낯으로 저를 쳐다보던 그 오만한 눈동자. 잊히려야 잊힐 수가 없었다.
암살 집단을 지원하는 것에는 많은 수고와 노력, 자금이 들어갔다. 이번에는 제법 출혈이 컸다. 그만큼 기대도 많이 했는데 이 미꾸라지 같은 것이 또 슬그머니 빠져나갔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엘피디오가 황제를 알현함으로써 형국은 다시 한 번 리카르디스에게 불리해졌다. 이번에야말로 저 곱상한 얼굴에 죽음의 그늘이 확실하게 드리워졌다. 엘피디오는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미리 축배를 들 수는 없었다. 상대는 그 리카르디스였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도 어떠한 희생을 하고서라도 살아남는. 거머리 같은, 잡초 같은 생명력을 지닌 2황자.
엘피디오는 얼굴을 확 굳히고 리카르디스 곁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 와중에 어깨가 서로 세게 부딪쳤다. 밀려난 건 엘피디오였다. 그는 붉은 얼굴로 씩씩대다가 달리는 것 같은 속도로 걸어서 빠르게 금강석 성을 벗어났다.
리카르디스는 근사한 미소를 얼굴에서 싹 지우고 그와 닿았던 어깨를 툭툭 털어 내었다. 행동과 표정은 퍽 여상했지만, 그의 푸른 눈동자에 일렁이는 것은 아까의 엘피디오와 비슷해 보였다. 그의 분노는 몇 년이 지난다고 하더라도 쉽사리 수그러들 가벼운 감정이 아니었다. 옆에 줄곧 서 있던 잇세리온 또한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저렇게 감정을 못 숨겨서야 원. 진지하게 대하던 내가 다 창피해지는군.”
“……비위 상하지도 않으십니까?”
리카르디스는 하하 소리 내며 웃었다. 아까 엘피디오에게 웃어 보였던 것과는 많이 달라 보였다. 잔뜩 날카로워진 서늘한 얼굴이었다.
“내가 기분 더럽더라도 그놈이 더 기분 나쁘면 돼.”
“항상 느끼고 있지만 전하께서는 성격이…… 참…….”
“성격 참 좋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잡담은 그만하고 들어가지.”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