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23화 (23/220)

23화.

호위 기사들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로젤린을 한 번, 피떡이 되어 있는 암살자를 한번 번갈아 보았다. 그들의 미묘한 표정이 리카르디스와 매우 닮아 있었다. 로젤린이 그들에게 “수고하십니다.” 하며 경례했다. 그녀의 태평한 태도에 상급 기사들은 더욱 심란해졌다. ‘굉장히 유능하긴 한데…… 음…… 뭐…… 괜찮겠지…….’라고 생각을 마친 그들은 이 이상한 상황을 적당히 합리화하고 방을 나섰다. 잠시 소란스러웠던 방 안에 다시금 적막이 감돌았다.

리카르디스는 발코니 문을 닫고 들어가려다가 다시 뒤를 돌아봤다. 나뭇가지에 앉아 조용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는 로젤린이 보였다. 그녀의 행동이 신경을 자극했다. 어떤 과거가 떠올랐던 건지도 몰랐다.

“로젤린 경.”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대답하라는 게 아니라 이리 오라고. 리카르디스는 조금 인상을 쓴 채 손짓으로 그녀를 불렀다. 로젤린은 능숙하게 나무를 내려와 벽을 타고 리카르디스의 앞에 섰다. 순식간이었다. 눈치를 어디 버리고 온 대신에 실력을 얻어 온 건가?

리카르디스는 별다른 말없이 방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로젤린도 그를 따라 성큼성큼 걸었다. 이 야심한 시각, 남자의 방에 들어서면서도 거리낌이 없었다. 예전 같으면 제 주인에게 괜한 소문이라도 돌까 싶어 들어온다는 생각조차 못했을 텐데. 이렇게 보면 정말 기억을 잃은 것 같다가도, 제 주위를 맴도는 행태를 보면 전혀 변한 게 없어 보이기도 했다. 리카르디스는 테이블 앞에 서 있는 로젤린을 눈에 담다가 그녀에게 잔을 건넸다.

“마실 텐가?”

“괜찮습니다.”

“마셔.”

“네.”

그녀는 리카르디스의 손에 들린 잔을 받았다. 로젤린의 손마디가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리카르디스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반면, 로젤린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그는 곧 와인 잔을 하나 더 가지고 와, 두 개의 잔을 직접 채웠다. 로젤린은 그가 와인을 따르는 모습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눈을 마주치고 있지 않음에도 리카르디스가 눈치챌 정도의 강렬한 시선이었다. 로젤린은 먼저 와인을 받고 기다리고 있다가 다른 잔에 와인이 마저 채워지자마자 잽싸게 움직였다. 바람과도 같은 속도였다.

쨍.

질 좋은 유리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청명하게 울렸다. 리카르디스가 어이없다는 듯 로젤린을 쳐다봤다. 아까 채워지는 잔을 열렬히 바라본 것이 이런 이유였던 건가.

지금 나랑…… 건배를 한 거야, 이 호위 기사? 그녀는 리카르디스의 황당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도리어 뿌듯해 보이기까지 했다.

잔을 나누고 나면 서로 가볍게 잔을 부딪쳐 소리 낸다. 로젤린은 칼릭스에게 배운 것을 잊지 않고 재빠르게 해냈다. 명석하십니다. 훌륭하십니다, 누님. 칼릭스의 박수갈채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로젤린의 뿌듯한 표정은 그에 기인한 것이었다. 물론 칼릭스가 알았다면 무척이나 괴로워했을 상황일 테지만, 로젤린은 알지 못했다.

리카르디스는 입가를 쓸었다. 요즘 따라 당황할 일이 많았다. 기억상실은 정말 사람을 크게 바꿔 놓는구나 싶었다. 그게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는 아직 판가름 나지 않았지만. 그는 “흠…….”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허물을 묻었다. 로젤린이 굉장히 뿌듯해 보였기 때문에 차마 혼낼 수가 없었다. 어린아이에게 진지하게 화내는 꼴이 될 것 같았다. 로젤린의 돌발 행동으로 잠시간 까먹었지만, 리카르디스는 사실 그녀를 방 안으로 데리고 와서 몇 가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사고방식이 많이 달라졌다고 하나, 그녀를 이루고 있는 근본은 크게 바뀌지 않아 보였다. 우선 굳이 시키지도 않았건만 목숨을 걸고 제 곁을 지키려고 하는 점이 아주 똑같았다. 기억상실이라고 보고한 것이 거짓이 아닌지 여러 번 의심할 정도로. 하지만 기본적인 상식 따위를 어딘가에 몽땅 버리고 온 걸 보면 기억상실이란 말도 웃어넘길 수 없는 일이긴 했다.

그렇다면 대체 그녀는 왜 제 곁을 맴도는 것인가. 로젤린은 어떠한 영광도 어떠한 명예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리카르디스 자신이 그녀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을 테니. 붉은수레바퀴가 로젤린이라는 이름 앞에 있는 한, 그녀는 자신에게서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정확하게 자신의 뜻을 밝힌 적 있었다. 과거, 로젤린이 죄책감이 가득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였다. 그 눈빛이 소름끼치도록 싫었다. 그래서 로젤린을 크게 밀어내려고 했다.

부드럽게 손질된 긴 은발이 헝클어지고 얼굴에는 까슬하게 그의 감정이 올라와 있었다. 옷도 입다 만 것인지 벗다 만 것인지 엉망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었다.

[떠나, 떠나라고!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아주 지긋지긋해 죽을 것 같으니! 대체 왜 내 곁에 있는 거냐!]

지금보다 어렸고 지금보다 감정을 숨기지 못했던 때라 해도 매우 격정적이었다. 그때 당시 그의 하나뿐인 여동생이 사망했던 상황의 특수성 때문인지도 몰랐다. 로젤린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온갖 집기가 부서진 방의 중간에 무릎 꿇고 있었다. 떨리며 흐느끼는 말이 그녀의 입술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지켜 드리겠습니다 전하. 제가 꼭 지켜 드리겠습니다. 전하만은 제가…… 꼭…… 목숨을 바쳐서라도…….]

리카르디스는 제 머리를 쥐어뜯고 악을 썼다. 자학에 가까운 몸짓을 막기 위해 로젤린이 그에게 다가섰지만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개입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그대가 뭐라고 날 지켜! 네가 뭐라고 나를 지킬 수 있어!]

그 대화가 오고 갔던 장소였다. 로젤린이 다시 이 방에 발 들일 수 있으리라고, 리카르디스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기억상실 전의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전과 달리 이렇게 차분하게 로젤린을 바라보고 있자니 느낌이 이상했다. 정말이지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과거의 일 이전에 애초에 술잔을 나눌 만한 사이조차 아니었다.

리카르디스의 시야에 로젤린이 인상을 쓰는 모습이 담겼다. 단맛이 적은 와인이라 그런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둘은 별다른 말없이 잔을 기울였다. 와인을 따를 때 마다 로젤린이 계속 건배를 하는 바람에 리카르디스가 몸을 움찔거리긴 했지만. 이후로도 로젤린이 혼나는 일은 없었다. 와인이 넘어가며 목울대가 울리는 소리, 잔이 부딪치는 소리, 옷자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간간히 울렸다. 하루 종일 피곤했던 리카르디스와 인간의 언어가 아직 어려운 로젤린. 두 사람에게는 모두 괜찮은 시간이었다.

와인 한 병은 금방 동이나 한 병을 더 가지고 왔다. 이번에는 달콤해서 여인들에게 인기가 좋다는 산딸기 주였다. 로젤린의 구미에 맞았는지 아까보다 잘 마셨다. 그리고 한 병 더. 몇 시간 뒤에 또 한 병 더. 취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제 호위 기사의 모습은 묘하게 호승심을 불러일으켰다. 리카르디스는 동이 터올 즈음에는 술에 떡이 되었다. 로젤린은 언젠가 네스터를 옮겼던 것처럼 리카르디스를 번쩍 들어 침대로 옮겼다.

그는 신음소리를 내며 푹신한 베개에 머리를 뉘였다.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에게 이불까지 곱게 덮어 주고 뒤돌아설 때 쯤, 그의 입에서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체…….”

대체 왜 곁에 있냐는 이상한 물음이었다. 로젤린은 그다지 깊게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냥 하다 보니? 또는 직업이라서? 아니면 누군가와 약속해서?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하얀 밤의 주인을 지킨다.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 로젤린은 붉은 얼굴로 눈을 깜박이고 있는 리카르디스에게 작게 속삭였다.

“꼭 지켜 드리겠습니다.”

그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나왔던 것도 같았다. 하지만 곧 그 말들은 숨소리와 함께 흩어졌다. 이불 아래의 가슴이 규칙적으로 오르고 내렸다. 로젤린은 흐트러진 리카르디스의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창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는 고요한 새벽이었다.

* * *

“하카브, 이 개자식이!”

정리정돈 되어 있던 탁자가 어질러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많은 가신들이 보고 있음에도 그는 격렬한 감정을 전혀 숨기지 못했다. 엘피디오는 씩씩대며 화병을 벽으로 집어 던졌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화병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밤이 까마득하게 내려앉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1황자 엘피디오의 석영 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엘피디오의 호출 때문이었다. 2황자 리카르디스가 마녀 케틀린을 통해 새로운 독의 정체를 알아냈다. 이미 몇몇 주요 고위 귀족과 황제의 귀에도 들어 갔을 것이다.

“뭐? 마력? 마력과 독을 섞어?”

엘피디오의 보좌관은 그의 눈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주인이 이렇게까지 심사가 뒤틀려 있는 경우에는 백번 조심해도 부족했다. 보좌관의 예상대로 그는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엘피디오가 손바닥으로 보좌관의 머리를 퍽퍽 쳤다.

“야, 너 뭐 하는 놈이야. 뭐 하는 새끼냐고! 그런 거 먼저 알아오라고 그 자리 앉혀 놓은 거 아냐? 내가 언제 리카르디스 그 자식 꽁무니나 쫓아다니면서 정보 주워 오라고 했어?!”

“죄송합니다. 하카브 왕자 쪽에서도 별다른 말이 없었기에…….”

“더러운 발타의 개자식! 하여간 마음에 드는 놈이 하나 없어! 어떻게 일이 이지경이 되도록 다들 손만 빨고 있었나!”

엘피디오가 잔뜩 성내며 주위를 쭉 훑었다. 세간에 1황자를 지지한다고 알려져 있는 귀족들이었다. 제국 내 외부로 명성이 자자한 가문의 수장들이건만, 그깟 독 하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희극도 이런 희극이 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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