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22화 (22/220)

22화.

“네가…… 되찾을 수…… 이 어둠 속에서…….”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마지막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잇세리온이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얼른 나가자고 재촉하는 통에 그 또한 독방 앞을 떠났다.

리카르디스는 솜씨 좋게 그녀의 마지막 말을 머릿속에서 복원했다. 그녀의 입모양이 한 글자, 한 글자를 그려 냈다. 저주인가? 또는 어떤 것의 암시? 지금은 알 수 없었다. 그는 그녀가 있는 독방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네가 이델라브힘의 존재만으로 하얀 밤을 되찾을 수 있을지, 이 어둠 속에서 지켜보겠다, 리카르디스.

* * *

잇세리온이 조잘조잘 잔소리를 쏟아 부어 귀가 다 먹먹할 지경이었다. 크레안 티다니온을 숭배하는 광신도 집단인 ‘검은달’. 그 간부였던 마녀 케틀린과 정답게 얘기를 나누면 어떻게 하느냐는 이유에서였다. 그 독설이 정다워 보였다니 기가 찼다.

자신을 살해하고자 했던 독에 마력이 섞여 있음은 그녀의 말로써 확증이 되었다. 지하 감옥에서 그녀의 말을 같이 들었던 엘피디오와 황제의 사람들. 그들이 입증해 줄 것이다. 검은달, 또한 왕국 발타가 신성력조차 무의미하게 만드는 새로운 독을 만들어 내었음을. 그것은 리카르디스뿐만 아니라 일라베니아 황실에게도 큰 위협이었다. 적의 적은 많을수록 좋았다. 문제는 적과 손을 잡은 아군이 있다는 것이지만.

리카르디스는 침대에서 한참 뒤척이며 천장에 있는 문양을 눈으로 따라 그려 보았다. 언제나 쉽게 잠들지 못하긴 했지만 오늘따라 유독 더 힘들었다. 피로한 몸과 달리 정신은 생생했다. 어릴 때부터의 잦은 암살 시도 덕에 앓게 된 일종의 수면 장애였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감고 검은 배경 위로 양 몇 마리를 세어 보고, 어린 아이들에게 들려줄 법한 자장가도 떠올려 보기도 했다.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더욱 뚜렷해지기만 했다.

리카르디스는 한숨을 푹 쉬고 몸을 일으켰다. 오늘도 역시나 잠들기는 영 그른 듯했다. 긴 밤을 지루하지 않게 해 줄, 처리해야 하는 업무는 언제나 많았다. 여태껏 불면의 날에는 주로 깃펜을 들고는 했으나…….

오늘따라 유독 와인이 차곡차곡 눕혀져 있는 수납장에 눈이 갔다. 리카르디스는 이런 날에는 책상 위에 앉는 것이 좋은 선택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와인을 한 병 집어 들고 긴 소파에 느슨하게 몸을 기대었다. 고작 몇 개의 촛불이 있을 뿐이라, 방 안은 밝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눈에 띄었다. 하얗고 희미한 빛이 와인 잔과 탁자를 비추고 있었다. 살짝 열려져 있는 커튼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달빛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그 빛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둥그렇게 떠 있는 달의 일부가 보였다. 새하얗게 멀어 버린 여자의 눈동자 같았다. 순식간에 기분이 더러워져서 그는 잔에 담긴 와인을 벌컥 들이켰다.

검은 달. 하얀 밤. 그것은 단순히 크레안 티다니온을 섬기는 광신도 집단의 이름도 아니고, 신성 제국 2황자의 기사단 이름도 아니었다. 지금은 노쇠하여 죽어 가고 있는 대륙의 찬란했던 과거. 오랜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이었다.

[빛의 신 이델라브힘은 그의 성력이 극으로 치달은 날, 어둠의 신 크레안 티다니온을 밤에서 몰아내었다.

낮보다도 더 환한 축복의 하얀 빛이 온 세상을 비췄다. 만물은 소생했다. 땅과 하늘을 덮고 있던 검은 장막은 서서히 하늘의 한 편으로 물러났다. 어둠의 상징인 그림자 또한 사라졌으며, 이로써 대지에 내려앉은 일말의 어둠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 하얀 밤이 세상을 뒤덮었다. 크레안 티다니온은 밤에서 쫓겨나 달에 몸을 숨기고, 세상을 하얗게 물들인 이델라브힘의 밤이 사라질 때까지 검게 변한 달에 머물렀다]

……라고 알려진 것이 일라베니아, 아니 온 대륙에 퍼져있는 전설이었다. 전설?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 단어가 어울리는지 잠시 판별했으나, 역시 단순하게 ‘전설’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진실이라고 말하기에는 한없이 허황된 이야기처럼 들린다는 것 또한 알았다.

삼백여 년 전까지만 해도 하얀 밤과 검은 달이 뜨는 소생의 날, ‘축복의 밤’ 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몇백 년이라는 세월은 진실을 숱한 전설 중 하나로 만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축복의 밤’에 대한 이야기는 그저 모든 나라들의 건국신화가 이르듯, 왕권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가져다 붙인 말이라고 생각했다. 전설이 가지는 힘조차도 많이 퇴색 되어 버린 시대이긴 했으나 리카르디스는 알고 있었다. 그림자조차도 사라지는 비현실적인 신의 세계, 짧은 시간. ‘축복의 밤’은 존재한다.

일라베니아의 황실, 신전. 아무나 들어설 수 없는 깊숙한 곳에 숨겨진 낡은 서고. 여러 사람들이 써 내려간 책자에는 몇백 년 전, 일라베니아의 건국 때부터 반복됐던 하얀 밤과 검은 달의 기록이 생생히 남아있었다.

1년…… 47년…….

236년…… 243년, 263년

297년…… 345년…… 3……4…….

[일라베니아의 황제가 이델라브힘의 축복을 빌어, 크레안 티다니온을 달로 몰아내고 하얀 밤을 불러왔노라. 그림자가 사라진 대지는 축복으로 물든다. 생명은 순환하며 싹이 움트고 꽃은 피어, 열매를 맺는다]

‘축복의 밤’을 부르기 위해서는 많은 성력이 필요했다. 막대한 성력을 가진 자가 황제가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축복의 밤은 점차 소실 되어 갔고, 황제들의 역량이 부족한 게 아니냐는 의견이 왕왕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금 현 일라베니아 황제로부터 2, 3세대 위 전대 황제들의 신성력이 강하지 않음을 지적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전부터도 축복의 밤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의견들은 힘을 얻지 못했지만 없어지지도 못한 채 지금까지도 조용히 묻혀 있었다.

축복의 밤이 뜬 마지막 기록으로부터 어느덧 몇백 년의 시간이 흘렀다. 대륙은 서서히 죽어 가는 중이었다. 성력과 성수로 축복한 땅은 다시 살아나긴 했지만, 곡식의 수확량과 열매 맺는 나무의 숫자가 점차 줄어드는 것은 멈출 수 없었다.

신성력이 닿는다고 죽어 가는 땅이 완벽하게 회복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주기적으로 축복을 하지 않으면 다시 메마른 땅으로 곧바로 돌아갔다. 신전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거친 결과, 신성력으로 땅을 살리는 것은 가능했다. 하지만 그것은 중상자에게 약초를 달여 먹이는 정도의 일차적인 효과일 뿐이라는 결과로 확정지었다.

가시적인 효과는 있으나, 근본적인 문제는 변하지 않았다는 것. 생명력이 순환하지 못하는 땅이 맞이할 결과는 뻔했다. 다급한 상황이었다.

리카르디스는 황제의 눈을 피해 ‘축복의 밤’ 에 대해 조사했다. 황실에 있는 자료가 안 된다면 지역마다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는 구전이나, 옛 도서관의 성서라도 찾아야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자료는 소실되었고, 오랜 얘기들은 변질되고 잊힌 후였다.

과정과 조건에 대한 상세한 진실은 황제만이 알고 있었다. 축복의 밤을 부르는 것은 오직 일라베니아의 황제만이 가지는 가장 큰 의무이자 고유의 권한이므로. 바꿔 말하자면, ‘축복의 밤’ 을 다른 자가 띄우는 행위는 황제에 대한 모반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리카르디스가 만약 ‘축복의 밤’ 을 부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시도해서는 안 된다. 황위를 계승 받을 때까지는.

정말 어이없고 답답한 일이었다. 현 황제는 그 자체로도 성력이 미치지 못해, 다른 조건이 충분히 채워지더라도 ‘축복의 밤’ 을 부르지 못한다. 그럼에도 아득바득 권력을 쥐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축복의 밤’ 에 대한 정보를 캐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면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모든 인간 위에 서 있는 정점. 말 한마디로 수십, 수백, 수만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자에게 반발하는 행위였으니.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다소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날에는 황제에게 큰 위협이 될 것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보험. 누군가를 쳐내기 위한 검이 아닌,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검이다. 때문에 전쟁터에서 구르는 와중에도, 큰 부상을 입었을 때에도, 소중한 이들이 죽어 나갈 때에조차 ‘축복의 밤’ 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 왔다.

형체조차 보이지 않아 흐릿하던 것이 오늘에서야 조금이나마 모습을 드러냈다.

‘네가 이델라브힘의 존재만으로 하얀 밤을 되찾을 수 있을지, 이 어둠 속에서 지켜보겠다. 리카르디스.’

리카르디스는 와인을 물마시듯 들이켰다. 과연, 인정하기로 했다. 한 가지만을 찾아 왔다는 것을. 마녀 케틀린의 마지막 말에서 그는 중요한 단서를 얻었다. 하얀 밤이 나타난 날에는 항상 검은 달 또한 같이 있었다. 하얀 밤을 찾지 못했다면, 남은 것은 오직 검은 달뿐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와인 잔을 들고 발코니로 향했다. 리카르디스는 불그스름하게 물든 얼굴을 하고 창을 열었다. 그는 발코니를 향해 발을 떼기 전, 우뚝 굳어 버렸다. 정면에 높이 자라있는 나뭇가지 위에 있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엉망으로 얼굴을 구겼다.

“이게…… 대체…… 무, 뭘 하는 거지 로젤린 경?”

그 답지 않게 당황해 말도 더듬었고 목소리도 한톤 높았다. 비명 안 지른 것이 용할 정도로 정말 깜짝 놀랐다. 달빛이 희미하게 비추는 나뭇가지 위에 고양이처럼 앉아 있는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그녀는 천연덕스레 대답했다.

“호위 중입니다.”

“……그대의 호위 시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니었나?”

“암살자가 제 호위 시간을 생각해서 찾아오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로젤린은 곧바로 자신의 말을 확인시켜 줬다. 잎이 무성하게 자라 우거진 나무 안쪽에서 무언가를 잡아 바닥으로 패대기쳤다.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인간이었다. 그 사람은 이미 로젤린에게 당한 후인지 기절해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말도 못하게 유능한 제 호위 기사를 한 번, 나무 아래 피 흘리며 쓰러진 암살자를 한 번 보다가 사람을 부르는 종을 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들이 몰려왔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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