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21화 (21/220)

21화.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지독한 냄새였다. 잇세리온은 어둡고 컴컴한 공간을 지나고 있었다. 빛 한줄기 들지 않는 곳이었으나 앞서서 걷고 있는 병사가 들고 있는 등불 덕에 어느 정도 시야가 트였다. 나방처럼 보이는 날벌레가 잇세리온을 지나쳐 뒤로 날아갔다. 그는 화들짝 놀라 손을 휘휘 저어 벌레를 쫓았다. 그의 뒤에 서 있던 리카르디스를 위한 것이었다.

“이런 곳까지 직접 행차하실 필요가 있었습니까?”

리카르디스는 얼굴 주위에서 펄럭거리는 그의 손길을 피하며 대답했다.

“네가 병사에게 시키고, 그 병사는 또 말단에게 시키고, 그 말단은 그 말단에게 시키겠지. 답이 내게 돌아올 즈음이면 반년은 지났겠군. 기다리다가 숨 넘어 가겠어.”

잇세리온은 투덜투덜댔다. 확실히 그가 감옥을 찾지만 않았더라도 밑의 사람에게 시켜서 알아오라 했을 것이다. 하여간 성격이 급한 주인이었다.

그들은 나선형으로 돌고 도는 몇 백 개의 계단을 내려가 최하층에 도달했다. 철창 안에 갇힌 짐승 같은 인영들이 울부짖으며 마구 손을 뻗었다.

“예쁘게 생겼네. 이리와, 이리와 봐 예쁜이.”

“죽, 여줘. 죽여줘. 제발!”

“배고파요, 쥐가 음식을 다 먹어 버렸어! 개 같은 자식들! 죽여 버릴 거야!”

병사가 죄수에게 찬물을 뿌렸다. 차가운 물이 그들의 상처를 후벼 팠다. 비명소리와 신음소리가 울렸지만 아까보다는 잠잠해졌다. 잇세리온은 이를 악물었다. 여전히 불쾌한 광경이었다. 그는 이 더러운 감옥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빛나는 주인을 돌아보았다. 리카르디스는 미간을 조금 좁히고 있었다. 기분이 나빠 보였다. 하지만 항상 저런 표정을 하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평소와 똑같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무덤덤한 태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광경에 일말의 신경도 두지 않는 듯 했다. 잇세리온은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그를 따랐다.

최하층에서도 한참을 들어 가야하는 독방이었다. 병사가 창대로 철창을 두드렸다. 캉캉캉. 소리가 감옥을 크게 울렸다. 철장에서 녹슨 냄새가 났다. 피 냄새일지도 몰랐다. 안쪽에서 검은 형체가 꾸물거리며 움직였다. 어쩌면 밝은 금발이었을 머리카락은 흙과 피 따위가 엉겨서 갈색처럼 보였다. 그녀는 천천히 기어 왔다. 두 손에 씌워진 수갑이 바닥을 긁으며 철컹, 철컹하는 소리를 냈다. 더러운 누더기를 몸에 대충 감고 있던 여자가 철창을 잡고 겨우 일어섰다.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 사이로 그녀의 하얀 눈동자가 빛났다.

“이델라브힘의 개가 왔나? 냄새가 나는걸.”

“크레안 티다니온의 노예를 보러 왔지. 신수가 훤한걸 보니 그간 평안했나 보군?”

“입만 살아 있는 데다가 재수까지 없는걸 보니 두 번째 월계수로구나.”

그녀가 갑자기 철창 사이로 손을 불쑥 내밀었다.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정확하게 리카르디스를 노려 왔다. 철컹! 수갑이 철창에 걸리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한치 앞에 당도한 더러운 손끝을 보고도 리카르디스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거리가 아주 조금 모자라 닿지 못했다. 지켜보던 병사들이 창대 끝으로 그녀를 쳐내려 했지만 리카르디스가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손버릇은 여전하고.”

“위로해 주려고 했지. 또 네 형이 괴롭힌 거니?”

잇세리온은 병사를 부르러 가야하나 잠시 고민했다. 그의 마음을 알아챈 것인지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잇세리온이 작게 혀를 찼다.

“사람 기분 더럽게 하는 것도 여전하군.”

리카르디스는 품에서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을 향하고 있는 그녀의 손 위로 병을 떨어트렸다. 그녀는 손에 닿는 차갑고 단단한 감촉에 잠시 흠칫 몸을 굳혔지만, 곧 철창 안으로 가져갔다. 유리병의 정체를 알아보려는 듯 손으로 더듬기도 하고 흔들어 보기도 했다. 얇은 유리 너머로 찰랑이는 것이 느껴져서 그녀는 그 안에 어떤 액체가 들어있음을 눈치챘다. 그녀가 보이지 않는 눈으로 손안의 병을 뚫어져라 쳐다보고만 있자, 리카르디스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대를 위해 가져온 선물이야, 케틀린.”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유리병을 열었다. 짙게 내려앉은 어둠, 차가운 공기에 들러붙어 있는 짙은 피와 오물냄새. 날카로운 쇠의 소리까지. 살풍경한 감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홍차의 향기가 그녀의 코끝을 맴 돌았다. 그녀는 피식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제 동료들이 또 2황자의 암살에 실패한 모양이었다. 여전히 고전적인 수법이었다.

“리엔타의 알리가르테?”

알리가르테는 리엔타 지방에서 나는 홍차 이름이었다. 날카로운 시선 가운데에서 그녀는 홍차의 종류까지 맞출 정도로 여유로워 보였다.

“교양이 뛰어 나시군요, 레이디.”

팔짱을 끼고 철창 기대고 있는 리카르디스의 목소리는 퍽 느긋했다. 그녀는 비죽 웃더니 홍차를 손바닥에 살짝 부었다. 코에 가까이 대어 냄새를 좀 더 깊게 맡기도 했고 손끝으로 만져보기도 했다. 그녀는 순간 몸을 흠칫 떨었다. 손바닥 안에 얕게 고여 있던 홍차에서 익숙한 어떤 기운이 느껴졌다. 그것은 눈이 보이지 않는 그녀에게 생생한 광경을 선사했다. 검붉게 물든 아지랑이 같은 것이 손바닥에서 피어올랐다. 아주 미약한 양이었지만, 그녀는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조국, 발타의 오랜 숙원이었다. 그녀가 일라베니아에 잡혀 있는 사이 독과 마력의 결합물, ‘파편’의 제조에 성공한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의 행동으로 리카르디스는 확신을 얻었다. 무색, 무미, 무취의 독에 그녀가 반응했다는 것은 그녀가 느낄 수 있을 만한 기운이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마력을 가지고 있는 마인(魔人)인 만큼 소량의 마력이라고 해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손에서 눈을 떼고 다시 리카르디스 쪽을 쳐다보았다. 만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손목에는 녹슨 수갑을 차고 누구보다 허름한 옷을 입었으며 누구보다 쇠약해져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이 공간에 있는 그 누구보다 의기양양해했고, 누구보다 행복해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거친 목소리가 즐겁게 울렸다.

“무엇을 알고 싶지?”

“무엇을 알고 있지?”

그녀는 편안하게 자리에 앉았다. 다소 불손해 보이는 감이 있어서 잇세리온은 속으로 작게 욕지거리를 했다.

“나는…… 리카르디스. 나는 아주 많은걸 알고 있어. 네가 알고 싶어 하는 게 무엇인지도 알아. 또한 이델라브힘의 빛이 기울기 시작했다는 것도, ‘이것’이 나타난 이상 너희 더 이상 승산이 없어졌다는 것도. 난 다 알고 있어.”

“아주 혼자 잘났지.”

“……건방지기는.”

그녀는 잡혀 있는 3년간, 단 한 번도 일라베니아에게 정보를 넘긴 적이 없었다. 끈질긴 고문 끝에 뱉은 정보라고 하더라도 이미 사건이 일어난 이후라 소용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입을 열고자 한 것은 리카르디스가 1황자 엘피디오보다 덜 재수가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또한 그가 선물이랍시고 가지고 온 것에서 오랜 숙원을 풀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모든 것은 이제 크레안 티다니온의 뜻대로 돌아갈 것이며, 고작 독의 정체를 하나 밝혀낸다고 한들 크게 바뀌는 일은 없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일라베니아 제국에 검은 장막이 내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휩싸고 도는 희열에 몸을 잘게 떨었다.

“나에게 가지고 온 것을 보면 너도 이미 알고 있는 거겠지. 그래 맞아. 이것은 위대한 크레안 티다니온의 산물. 감히 이델라브힘 따위가 끼어들 수 없는 완벽한 혼돈의 영역.”

“말을 개떡같이 하는 재주가 있었나?”

“……이 독에는 마력이 섞여 있어.”

“알아듣기 쉽고 좋군. 완벽해.”

이미 독의 정체를 예상은 하고 있었으니 새삼스럽게 충격을 받는 일은 없었다.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리카르디스와 잇세리온 대신, 그 뒤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술렁였다. 감옥이 그들의 동요로 들썩였다. 독과 마력의 결합이라니. 결코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눈앞에 있는 허름한 여자는 검은달의 간부였던 자였다. 신용할 수도 없지만 쉽게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신성력으로 치료되지 않는 독. 마력을 숭배하며 많은 마인들을 보유하고 있는 검은달. 그리고 마녀 케틀린의 입에서 나오는 말까지. 많은 정황과 상황이 리카르디스의 의견을 밑받침했다. 리카르디스와 잇세리온의 뒤로 서 있던 남자들이 작은 종이에 무언가를 사각사각 써 내려갔다. 그 증언들은 황제에게, 엘피디오에게, 귀족들에게 전해질 것이다.

리카르디스가 손을 휘휘 저으며 용건이 끝났음을 알렸다. 많은 비서와 보좌관들이 썰물처럼 감옥을 빠져나갔다. 고약한 냄새와 벌레가 가득 찬 이 공간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듯 보였다. 리카르디스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찬 후,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눈길을 보냈다.

“남은 건 선물이야 케틀린. 몸에는 안 좋지만 그대의 정신 건강에는 좋을 테지.”

빛 한줄기 들지 않는 어둡고 습한 공간에서 제대로 먹지도, 움직이지도 못한 채 고문을 받는 삶을 스스로 끝낼 기회를 주겠다. 리카르디스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케틀린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온갖 악독한 고문을 일삼는 엘피디오와는 다르게 귀여운 맛이 있는 황자였다. 그녀의 웃음소리에서 그 뜻을 읽은 리카르디스가 얼굴을 팍 구겼다.

“이 선물은 사용하지 않을 거야, 예쁜이.”

이 여자가 정말. 리카르디스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편안하게 죽지는 못할 거다.”

“모두가 크레안 티다니온님의 품으로 돌아갈 거야. 눈이 멀어 버렸지만 그 광경은 환하게 보일 테지. 나에게는 살아서 그 장면을 봐야 하는 의무가 있어. 열심히 발버둥 쳐 보렴.”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죄수들이 다시 철창을 울려 대었다. 감옥이 비명과 고함소리에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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