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9화 (19/220)

19화.

리카르디스가 찻잔을 들자 카일로와 로젤린이 몸을 움찔거렸다. 당장에라도 찻잔을 후려치고 싶어 하는 표정들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웃으며 잔을 얼굴 가까이로 가져대었다. 홍차의 정체를 가늠하기 위해 다시 한 번 향을 맡아 보려는 것이었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홍차를 마시기 위한 준비 동작처럼 보였다. 카일로가 기겁하며 만류하기 전에 로젤린이 빠르게 움직였다. 바람과도 같은 빠르기였다.

텁.

“로젤린 경, 지금 무슨 무례를! 전하 일단 찻잔을! 아니, 로젤린 경, 손을 얼른!”

로젤린의 손이 리카르디스의 입을 꼭꼭 덮었다. 로젤린은 아까 자신이 리카르디스의 손목을 잡았을 때 카일로가 큰 무례라고 했던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손목을 잡는 게 무례하다면 다른 걸 해야겠다. 라는 갸륵한 사고방식에서 나왔지만 상황은 도리어 악화되었다. 카일로는 뒷목 잡기 일보 직전이었고, 리카르디스는 어이없다는 듯 눈알만 굴려서 그녀를 올려보았다. 여전히 입은 막혀 있었다.

로젤린은 그의 손에서 찻잔을 뺏고서야 입을 풀어 줬다. 리카르디스는 얼얼한 입가를 쓸었다. 제 그림자를 밟을까, 숨소리가 거슬릴까 초조해하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기억을 잃었다더니 사고 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파격적이었다. 조금 건방진 감이 있지만 아까 세운 공을 감안해 넘어가기로 했다.

“이리 내.”

“안됩니다.”

“안됩니다, 전하!”

“아니 됩니다 전하!”

로젤린, 카일로, 수석비서인 잇세리온이 차례로 반박했다. 잇세리온은 로젤린이 암살자를 두들겨 패는 동안 몸을 굳히고 있다가 리카르디스의 행동으로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성큼성큼 로젤린에게 다가갔다.

“이리 주시죠, 로젤린 경. 제가 조사해 보겠습니다.”

“안 돼, 내 거야. 얼른 내놔, 경.”

“안됩니다! 스물다섯이나 드시고 이게 무슨 억지입니까, 전하! 독이 들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한테 주세요, 로젤린 경!”

로젤린의 양쪽에서 아주 난리였다. 청력이 좋아서 배로 괴로웠다. 누구에게 넘겨줘야하는지 한참 고민하고 있자,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손목을 탁 잡아 왔다. 언제나 차가웠던 낯이 한층 더 싸늘해져 있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아있었다.

“신성력으로 치유가 가능하니 나에게는 독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 살배기 귀머거리 아이도 알고 있지. 그럼에도 독인지 무엇인지를 먹이려고 했어. 이게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나?”

“……무슨 수를 쓴 것이겠지요.”

“나한테도 통하는 독인데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보기만 해도 눈이 멀어 버리고, 향기만 맡아도 뇌가 썩어 버리는 것일 줄 어떻게 알고 넘기란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요즘 잠을 못자더니 머리도 굳어 버린 건가, 잇세리온.”

“그렇다고 고귀한 몸으로 독을 감별하려고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신전 쪽에 한번 맡겨 보지요.”

“알량한 신성력 믿고 세금 축내는 무능력한 밥버러지들?”

“전하!”

잇세리온과 리카르디스가 다투는 사이 로젤린은 찻잔에 담긴 홍차를 관찰했다.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발생한 작은 움직임, 그 파동에 수면이 흔들거렸다. 한 몸이 되어 움직이고 있는 홍차 속에서 무언가가 분리되어 일렁였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으나 로젤린만은 눈치챘다. 그녀는 이 기운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이루는 마의 성질. 마력이라 불리는 그것. 하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는 마력과는 조금 달랐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마수들의 몸에서 떠도는 난폭한 마력과 비슷했다.

로젤린은 가만히 관조하다가 뻑뻑한 눈을 깜박였다. 집중하지 않으면 그녀에게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미약한 양이었다.

마력에 독을 결합한 새로운 물질. ‘성력과 마력은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 그 공식을 이용한 시도는 몇 달 전 사냥 대회의 사건에서 처음 나타났다. 로젤린은 붉은수레바퀴 백작가를 떠나기 전, 칼릭스에게 많은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사냥 대회에서 많은 기사들이 죽었다. 신관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얕은 상처를 입은 자들도 모두 죽었다. 암살 부대 ‘검은달’이 새로운 독을 만들어 내었다고 추정했다.

칼릭스가 가지고 온 암살자들의 무기가 몇 개 있었다. 로젤린은 그 암기에서 마력의 기운이 은은하게 묻어 있음을 눈치챘다. 정확히는 암기에 발려 있는 독에서 느껴졌다. 로젤린이 그 사실을 칼릭스에게 알렸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곧 아, 탄식했다.

[그렇군요. 마력과 성력은 서로 간섭할 수가 없으니…… 마력이 독과 완전하게 동화된 상태라면, 성력으로 아무리 치유하려고 해 봤자 어떤 간섭도 할 수 없었을 테니. 그런……거였군요. 놈들이 아주 위험한 걸 만들어 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독이 신성력에 파훼되지 않는다는 것이 사냥 대회의 일로 검증되었다. 수많은 기사들의 죽음으로써 입증되었다. 그들의 암살 시도가 날뛰는 것은 그 사실에 힘입은 것일지도 몰랐다. 로젤린은 여전히 말다툼을 하고 있는 그들의 목소리를 툭 끊었다.

“사냥 대회에서 썼던 독인 것 같습니다.”

리카르디스와 잇세리온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리카르디스가 의심스럽다는 듯 인상을 쓰며 그녀를 보았다.

“그걸 어떻게 알지?”

로젤린은 찻잔에서 시선을 들어 그의 푸른 눈동자를 응시했다. 칼릭스는 황실 쪽에서도 곧 독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침묵을 지키는 황실의 태도로 미루어 보아, 독의 치유법을 연구 중인 것이라고 추측했으나…… 황실은 그의 예상을 벗어나 아직까지 작은 실마리조차 찾아내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칼릭스 또한 로젤린의 언질이 없었다면 알지 못했을 것이다. 마력을 느낄 수 있는 건 마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뿐이었다. 마력의 집합체인 제 누이는 예외로 치더라도 마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정말 소수에 불과했다.

심지어는 마력은 크레안 티다니온의 산물이라 하여 그 힘을 가지고 있는 자는 불길하다고 박해받았다. 이델라브힘에 대한 믿음이 강한 마을에서는 마인(魔人)을 화형시키는 풍습도 종종 있다고 했다. 마력을 몸에 품고 있는 마수는 언제나 인간의 천적이었으니. 인간을 향해 손톱을 세우는 그 불길한 힘의 그릇이 동물에서 인간으로 바뀐다 하여도 크게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때문에 마인들은 살해당했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으며, 숨기도 했다. 그들은 점차 자취를 감춰 이제는 강한 신성력을 가진 사람의 수만큼이나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것이 발타에서 새로 만든 독을 알아보지 못한 배경 중 하나였다. 마력을 가진 자가 없으니 당연히 알아보지 못할 수밖에. 그래서 칼릭스는 황실이 아직까지 독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으리라는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다.

[누님 기억하세요. 혹시나 황궁에서 그 독을 다시 보게 되거나 누군가에게 말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면, 단 한마디만 말하시면 됩니다]

과거 칼릭스의 목소리와 로젤린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마력과 성력은 서로 간섭하지 않으니까요.”

이 말만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잇세리온의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리카르디스는 눈썹을 한쪽만 꿈틀거렸다. 황실에서도 사냥 대회에서 사용된 독의 조사를 시행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무색, 무미, 무취. 극악한 생존율을 보장하는 강한 독이라는 것 이외에는 밝혀지지 않았다. 성력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긴 했으나 신관들의 신성력이 약한 탓이라 생각했다.

마력과 성력은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 어린아이들도 알고 있는 상식을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 그대로였다. 잇세리온은 의식도 못하고 큰 목소리로 떠들었다.

“그, 그렇군요. 신성력이 닿기 전에 이미 많이 진행되어서 죽은 게 아니라, 애초에 성력이 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쪽이 훨씬 설득력 있습니다. 왜 그걸 생각 못 했을까요! 굉장하군요, 로젤린 경! 일단 검증은 해 봐야겠지만 아마도 그게 맞을 것 같습니다.”

리카르디스는 쯧, 하고 혀 차는 소리를 냈다. 그 또한 로젤린의 말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검은달이 새로이 만든 독은 분명 마력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아니, 연관이 있다.

즉사만 하지 않는다면 죽어가는 사람조차 살려 내는 신성력을 가진 2황자. 검은달이 정보 조사에 치밀한 집단이란 건 차치하더라도 그의 신성력은 이미 온 대륙에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그런 2황자에게 통할 것이리라 확정한 독이라면, 마력과 성력은 간섭하지 않는다는 공식을 이용하는 길 밖에는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언제나 성력이라는 이름이 가진 힘을 낮게 끌어내리고자 했으니…… 독을 치유하지 못하는 신성력? 볼 것도 없었다. 이델라브힘의 권위가 땅으로 추락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검은달이 가장 바라 왔던 일이다.

“그래 굉장하군. 이런 것까지 만들어 냈단 말이지. 성력이 치유할 수 없는, 성력이 간섭할 수 없는 독의 영역이라.”

정말 기분 엿 같았다. 독의 조사가 한창 진행 중일 때 리카르디스 또한 신성력을 쏟아부어본 적 있다. 하지만 그것은 물과 기름처럼 부드럽게 분리될 뿐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은 있었다. 설마 이 독, 마력과 관련이 있는가?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독이라는 물질과 섞는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정말 그렇다면…… 자신도, 이델라브힘 조차 손을 대지 못하는 영역이 아니겠는가. 그때의 리카르디스는 그렇게 의심을 묻어 두기만 했다.

성력의 무력화. 이델라브힘의 추락. 검은달이 이루고자 했던 핵심적인 요소였다. 검은달이 가장 바라는 방식인 만큼, 그들의 적인 일라베니아가 가장 바라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애써 외면했던 건지도 모른다. 검증을 완벽하게 거치지는 않았지만, 오늘부로 리카르디스의 안에서는 확정이 났다. 검은달은 새로운 독을 만들었다. 어쩌면 이 대륙을 좌지우지할 만한 큰 패가 될 것이다. 대단하다. 적이라도 박수쳐 주고 싶었다.

리카르디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눈을 감았다. 단 한 번도 편하게 살아온 적 없고 언제나 자갈이 가득한 흙길을 걸어 왔다고 생각했건만. 본격적인 진창은 이제부터였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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