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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없는 밤-18화 (18/220)

18화.

그녀와 같이 집무실에 있는 호위기 사는 로젤린보다 2년 먼저 상급 기사가 된 자였다. 푸른등불의 카일로.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로젤린을 쳐다봤다.

기억에 이상이 있어? 아무것도 알지 못해? 처음 듣는 얘기였다. 로젤린은 원래 말수가 적고 침착하며, 감정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아무리 조에 같이 편성된 적이 없다 하더라도 며칠간 지나다니면서 인사를 주고받았는데 이상한 점을 전혀 못 느꼈다니. 그녀가 대단한 건지, 자신의 무신경함이 대단한 건지 알 수 없는 지경이었다.

카일로는 기사들이 쓰는 수신호로 그녀에게 괜찮은지 물어봤다. 로젤린은 그 수신호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신지?’라고 생각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렇게 기초적인 것도 잊어버렸다고? 이런 애를 지금 호위 임무에 쓰는 거야? 그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 * *

2황자의 월장석 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백작, 후작, 남작, 누구의 전령, 초대장을 들고 온 누구의 시종, 군략가, 전략가, 학자, 기사. 문무를 가리지 않고 계급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이들이 오고 갔다.

월장석 성의 호위 기사들은 위험인물을 골라내기 위해 모두들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별 사건 없이 시간이 순탄하게 흘러감에 따라 그들의 칼날은 조금씩 평화로움에 무뎌지기 시작했다. 카일로는 하품이 찔끔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지금은 손님조차 없이 리카르디스가 여러 가지 서류를 처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양한 훈련을 하며 성 외부를 경비하는 하급 기사들에 비해, 상급 기사의 업무란 것은 굉장히 단조롭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가만히 자리에 서 있어야 하는 그 긴 시간을 인내하기 위한 체력 단련이었던 건가. 평화롭다 못해 지루하기까지 했다.

리카르디스의 휴식시간이 찾아왔다. 내리 세 시간을 일하던 그가 한숨을 길게 쉬는 것을 기점으로 그의 수석 비서관이 종을 울렸다. 곧 시종이 트레이를 밀고 들어왔다. 리카르디스가 좋아하는 홍차와 간단하게 배를 채울 수 있는 간식거리들이 잔뜩 담겨 있었다.

손을 분주히 움직이던 시종이 화려한 찻잔에 홍차를 따랐다. 시종은 모락모락 김이 나는 홍차를 은제 스푼으로 살짝 떠서 마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 이상이 없다는 얘기였다. 리카르디스는 오랜만에 취하는 휴식에 느슨해져 있었다. 창밖에서는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방안은 따뜻한 데다가 홍차의 향기까지 감돌았다. 휴식이라는 단어에 걸맞은 오후였다.

리카르디스는 소파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다가 찻잔을 들고 향을 맡았다. 그의 입술이 찻잔에 닿았을 때였다.

동상처럼 우뚝 서 있기만 하던 로젤린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녀는 찻잔을 쥐고 있는 리카르디스의 손목을 덜컥 잡았다. 홍차가 흘러 넘쳐 그의 옷을 더럽혔다.

“지금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로젤린 경!”

카일로는 대경실색하며 소리쳤다. 감히 한낱 기사가 고귀한 황자 전하께 손을 대다니! 대신해 펄펄 날뛰는 자가 있어서 리카르디스는 짓궂게 웃기만 했다.

“무슨 일이지, 로즈 경?”

“드시지 마십시오. 뭔가 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방안의 온도가 갑자기 뚝 떨어졌다. 카일로의 손이 검 손잡이를 배회하며 꿈틀거렸고, 리카르디스도 방금 홍차를 따라 준 시종을 쳐다보았다. 로젤린의 말을 완벽하게 신뢰하지는 않지만 시종 또한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는 없었다. 티포트를 들고 있던 남자는 사색이 되었다. 그는 말을 더듬으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 자신이 방금 먹어 보았다며 독 같은 건 없었다고 항변했다.

“게, 게다가. 황자 전하께 독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누구든 아는 사실인데 무슨 소용이 있다고 제가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로젤린은 높낮이 없는 태평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독이 통하면 그런 짓을 하겠다는 얘기입니까.”

그녀의 말을 듣고 리카르디스는 오호라, 하는 소리를 냈다.

“그거 말 되는군. 아니면 통하는 독을 만들어 냈다던가?”

“그럴 수도 있겠군요.”

쿵짝이 맞는 두 남녀를 보던 시종이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며 움직였다. 잔뜩 억울함을 호소하던 그의 눈동자에 살의가 비쳤다. 그는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뜯었다. 피부 아래 묻혀있던 날카로운 암기가 리카르디스를 향했다. 시종을 경계하고 있던 카일로가 검을 뽑았지만 리카르디스와 얘기하던 로젤린이 앞으로 나서는 것이 먼저였다.

챙!

로젤린의 얇은 검이 날아오는 암기를 쳐냈다. 아무도 그녀가 검을 뽑는 모습을 보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시종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검은달 내에서도 암기의 대가였다. 바람과 같은 속도로 날아간 것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쳐 내다니. 신입 호위 기사는 생각보다 실력이 좋은 듯 했다.

회심의 일격이 무산되어 흔들렸던 마음은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암살자는 실패를 그대로 넘기고 두 번째 수를 준비했다.

그는 신발 밑창에 있던 단검을 꺼내고 리카르디스에게 몸을 날렸다. 로젤린에게는 트레이를 집어 던져 시야를 방해시킨 후였다.

그러나 암살자는 2황자에게 조금도 닿지 못했다.

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단검이 천장에 박혔다. 로젤린의 발길질 한 번에 남자의 손목이 완전히 꺾여 부러졌다. 그녀에게 날아갔던 트레이는 반파되어 공중에 흩어지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반복된 훈련으로 인해 암살자는 지금의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했다. 팔이 완전히 부러졌다. 세 번째, 네 번째의 수는 폐기. 그렇다면 그 다음 수를 준비해야 하는데…….

눈앞에 이상한 게 보였다. 검은 머리의 호위 기사가 제 검을 호기롭게 내팽개치고 있는 게 아닌가. 아니, 검을 왜?

“?!”

“?!”

“?”

검을 왜…… 왜 버려? 카일로도, 수석비서인 잇세리온도, 리카르디스 조차 조금 당황해 버렸다.

로젤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종에게 돌진했다. 암살자의 시야를 검은 머리의 여기사가 가득 채웠다. 그녀의 뒤로 반짝반짝 빛나는 2황자의 은발이 사라져 갔다.

쾅!

몸과 몸이 충돌했다고 믿기지 않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의 몸이 빠르게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단단한 벽이 굉음을 울렸다. 이변을 알아차린 호위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고 우르르 나타났다.

“……?”

매서운 기세로 들어온 기사들은 곧 검을 집어넣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고민에 휩싸였다. 부나방처럼 이리저리 달려드는 암살자의 공격이 로젤린 한 명으로 인해 전부 무산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챙챙, 잘도 쳐 내고. 퍽퍽, 잘도 팼다. 잠시 지켜봤으나 무력의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로젤린은 자신에게 덤비는 남자를 발로 걷어찼다. 컥 소리 내며 날아간 암살자는 문 앞에 서 있던 상급 기사들의 발치까지 굴러갔다. 그들이 넝쿨째 굴러온 그를 포박하려고 했지만, 로젤린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모습에 움칠 몸을 떨고 물러났다.

로젤린은 이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암살자에게 온전히 집중했다. 오감이 예민하게 바짝 일어섰다. 많이 다친 외관에 비하면 숨소리는 아직 차분했다. 암살자가 아직 포기하지 않았음을, 다음 수를 준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로젤린은 눈을 가늘게 떴다. 빛을 등지고 있었으나 그녀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녀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시종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올렸다. 퍽, 퍽, 퍽. 그녀의 주먹이 묵직한 망치처럼 둔탁한 소리를 낼 때 마다 남자들이 몸을 떨었다. 검으로 베어 낸 것도 아닌데 코와 입에서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시종의 얼굴은 겨우 몇 번의 주먹질로 뭉쳐 놓은 진흙 반죽 같은 꼴이 되었다.

죽은 거 아냐? 죽은 거 같은데? 리카르디스가 앞의 참혹한 꼴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자, 카일로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경! 로젤린 경 그만! 죽겠습니다!”

로젤린은 그의 말에 잠시 너덜너덜해진 시종을 들여 보았다. 신음소리와 심장이 뛰는 게 들렸다. 로젤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죽을 때까지 패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카일로가 기겁했다. 리카르디스는 비교적 빨리 정신을 차렸다. 그는 머뭇거리며 그녀를 불렀다.

“배후를…… 캐야하니…… 로즈…… 아니 로젤린 경. 넘기고, 뒷정리만 좀 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로젤린은 시종의 머리를 잡고 벽에 퍽 박았다. 수박 터지는 소리 같은 것이 났다. 그녀의 손에 잡혀 기절한 척 하고 있던 시종은 정말 기절해 버렸다. 열린 문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기사들이 흠칫거리며 그녀에게서 실신한 남자를 받았다. 따로 묶지 않아도 도망갈 힘이 없을 것 같긴 했지만 일단 포박하고 끌고 갔다. 시종이 지나간 자리에는 피가 길을 만들고 있었다. 곧 들어온 시녀들이 떨리는 손으로 핏자국을 치웠다.

로젤린은 후, 하고 숨을 내뱉으며 조금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 * *

싸움이 끝났다. 로젤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숨을 골랐다.

“어떻게 알았지?”

리카르디스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언제나 나른하게 늘어진 목소리가 한 톤 높아져 있었다. 이 상황에 제법 흥미를 느끼는 듯 했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질문에 조금 전의 상황을 반추했다. 남자는 은제 스푼으로 홍차를 살짝 떠서 꿀꺽 삼켰다. 하지만 로젤린에게는 남자의 목울대 울리는 소리가 다소 인위적으로 느껴졌다. 이후 남자가 홍차를 소매에 스며들게 뱉는 것도 보았다. 흐트러진 앞머리를 만지는 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평범한 사람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로젤린은 그 장면을 보기 전부터 시종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가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썩어 가는 피 냄새가 느껴졌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느껴질 만한 향기는 결코 아니었다. 검은달의 암살자는 시종의 얼굴 가죽을 벗겨서 쓰고 있었다. 약품처리를 했지만 완벽하게 부패를 막지 못했던 것이다. 그 냄새가 무엇인지, 어디서부터 왔는지 알지 못했지만 이런 냄새를 풍기는 자가 평범한 인간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마시는 척을 했습니다.”

“눈이 좋군.”

“그리고 피 냄새가 났습니다.”

“코도 좋아. 대단한걸, 기대 이상이야.”

“감사합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를 빤히 응시하다가 테이블로 시선을 옮겼다. 암살자의 코인가 입에서 튄 피 몇 방울,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티 포트. 그리고 그 소란에도 용케 쏟아지지 않고 천천히 식어 가고 있는 문제의 홍차가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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