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7화 (17/220)

17화.

무슨 기준인지 알 수 없었다. 누구의 앞에서는 몇 분 동안 머무르는 반면, 누구의 앞에서는 눈길도 주지 않고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그렇게 열다섯 명의 인원을 한 번씩 마주하고서야 레이몬드의 곁으로 돌아갔다.

“꼭 다섯 명 다 뽑아야 해?”

“아니 최대 정원이 다섯 명. 네 마음대로 해.”

“당신. 당신.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남자는 에버하르트, 여자는 레티시아.”

“에버하르트, 레티시아.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첫 번째로 그녀의 시선을 가장 오래 받은 군청색 머리의 남자 기사와, 키가 로젤린보다 큰 적갈색 머리 여자 기사가 지목되었다. 둘은 서로를 쳐다보더니 뛸 듯이 기뻐했다.

“감사합니다, 로젤린 경. 저는 올해로 3년 차 된 수습 기사, 서리나팔의 레티시아입니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뿌리의 에버하르트입니다. 수습 기사가 된 지는 4년입니다. 뽑아 주신 것에 후회가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들은 표정을 가다듬으려 노력했지만 히죽히죽 올라오는 웃음을 결국 감추지 못했다. 로젤린도 무표정한 얼굴에 미미한 미소를 띠었다. 수습 기사는 상급 기사의 수족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지원서만 보고 수습생들을 뽑는 상급 기사도 있었지만 로젤린은 그들을 직접 대면하길 원했다. 종이 서류만으로는 알 수 없다. 그들의 생각, 그들의 눈빛, 그들이 로젤린에게 담는 감정들 또한. 로젤린이 열다섯 명의 지원자를 꼼꼼히 살펴본 이유 또한 그런 것이었다.

얘는 눈빛이 영 더럽고, 얘는 로젤린을 얕보고 있고, 얘는 레이몬드만 빤히 바라보고 있으면서 왜 자신에게 지원한 건지 도통 모르겠고, 얘는 남들이 지원하니까 자신도 따라 지원했다는 식으로 의욕이라고는 없어 보이고. 총체적 난국 속에 딱 두 명이었다. 그들 또한 눈빛에 가득 욕심을 담고 있었지만 그것은 좋은 상급 기사를 만나 실력을 향상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게다가 조금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에는 어쩐지 존경의 빛까지 서려 있었다.

그녀의 육감은 뛰어났다. 공통된 언어를 가지며 그것으로 서로 교류하는 인간에 비해 산속의 많은 생물들은 그 개체 수만큼이나 다양한 언어와 습성을 가지고 있어 대화라는 것이 불가능하다시피 했다. 그 덕에 길러지는 것이 육감이라는 것이었다. 다른 생물의 행동, 분위기, 또는 주위의 상황까지 두루 살펴야만 겨우 읽을 수 있었다. 로젤린은 오랜 시간 살아온 만큼, 다른 동물들로 많이 지내 온 만큼의 보는 눈은 있었다. 번드르르한 말로 치장하고 있는 사람들의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런 로젤린의 눈에 두 사람은 제법 괜찮은 자들이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을 섞어 놓아도 똑같이 이 사람들을 선택할 것이다.

지목된 두 명을 제외한 수습 기사들은 기분이 매우 상했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레티시아는 중앙과는 전혀 상관없는 힘없는 몰락 귀족 출신이었다. 심지어는 ‘뿌리’의 에버하르트까지 뽑다니. ‘뿌리’는 작위를 받지 않은 평민 출신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가문 명이었다. 평민과 몰락 귀족? 고작 저런 이들을 곁에 둔단 말인가? 상급 기사쯤 되면 더욱 위로 올라가기 위해 세력을 모으기 마련인데 붉은수레바퀴 로젤린은 그걸 모르는 것 같았다. 그들은 속으로 불쾌한 감정을 삭이려 노력했다.

레이몬드의 손짓에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만 남았다. 얼굴에 홍조가 가득했다. 로젤린은 열렬한 그들의 눈빛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에버하르트, 레티시아.”

“예!”

“그대들은 수습 기사의 기숙사를 벗어나, 로젤린 경이 머무는 숙소 근처로 배정될 것이다. 로젤린 경의 생활과 임무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모시고, 그대들이 하급 기사가 되어 황자 전하에게 충성을 바칠 때까지 계속된다. 그대들이 로젤린 경을 존경하며 따르는 만큼, 로젤린 경 또한 그대들을 가르치며 이끌 것이다. 이의 있는가?”

“없습니다!”

“없습니다.”

에버하르트는 이제 숨기지도 않고 싱글벙글 미소 짓고 있었다. 수습 기사는 이름만 기사지, 정식으로 서임받은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월급을 받지도 않고 기초적인 가르침 이외에는 어떠한 교육도 받지도 못했다. 허름하고 낡은 건물에 몇 십 명이 함께 살아가며 생활비 또한 자신이 충당해야 했다.

그런 그들에게 상급 기사는 스승이기도 했고 주군이기도 했으며, 안정된 생활을 보증하는 무언가이기도 했다. 그들은 이제 쪽방을 벗어나 상급 기사의 기숙사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로젤린의 방만큼 호화롭지는 않지만, 여태껏 지내 왔던 곳과는 비교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아직 하급 기사로 정식 서임받은 것도 아니지만 몇 년간의 고생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레티시아는 눈시울을 붉히다가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가다듬고, 활짝 웃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4

“오늘부로 2황자 전하의 호위 임무를 명받은 상급 기사,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입니다. 이 목숨을 바쳐 임하겠습니다.”

며칠이 더 지난 후였다. 로젤린은 수속과 인수인계가 끝나고 나서야 리카르디스의 호위 임무를 맡게 되었다. 리카르디스는 원목 탁자에서 종이를 팔락였다. 눈앞에서 누가 경례를 하건, 인사를 하건 말건 그다지 신경 쓰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로젤린은 무뚝뚝한 표정 아래로 숨을 후 쉬었다. 서임식 때의 일이 깊게 남았기 때문이었다. 리카르디스를 조우하고서는 터질듯 뛰었던 심장소리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의 잘난 얼굴은 여전했으나 다행히도 심장은 문제없이 잔잔하게 순항 중이었다.

그는 깃펜으로 무언가를 쓰고 읽으며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나른하게 가라앉아 있으면서도 잔득 날이 선 목소리였다.

“그대의 목숨 따위는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로즈 경.”

로젤린은 눈동자를 굴려 반짝반짝 빛나는 그의 은색 머리를 내려 보았다. 칼릭스에게 ‘대화는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교류이다.’라고 배웠지만 리카르디스는 그 간단한 이치도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시선은 탁자와 종이 언저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에게 말을 꺼냈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리카르디스는 업무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로즈. 로젤린의 어미 되는 에델바이스가 그녀를 로즈라고 불렀다. 칼릭스에게 물어보니 그것은 ‘로젤린’의 애칭이라고 했다. 정확히는 그녀가 질색하는 애칭이었다고. 그녀 자신은 꽃과는 거리가 매우 멀다고 생각했기에 로즈라는 호칭에 제법 타격을 입었었노라 현재의 로젤린에게 일러 주었다. 눈앞의 미남자는 그 사실을 알고 부른 것인가?

“듣고 있나, 로즈 경?”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무표정하던 얼굴에 찬란한 햇살보다 눈부신 미소를 입에 걸었다. 신성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는 눈앞의 초라한 검은 머리의 여기사에게 ‘로즈’ 따위의 호칭을 입에 담고 있었다.

서임식 그리고 지금. 고작 두 번의 만남이었으나 저렇게까지 대놓고 티를 내는데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간간히 느껴지는 말과 시선에 담겨 있는 감정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러니 저 ‘로즈’라는 호칭 또한 어떤 애정을 기반하고 있지 않다고 보는 게 옳았다.

로젤린은, 그녀는 어쩌면 이 남자와 좋은 관계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죽음의 코앞에서조차 이 남자를 지키고 싶어 했음에도 그것이 둘 사이에 어떤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리란 보장을 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웃지 않는 눈으로 그녀를 채근했다. 로젤린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입을 열었다.

“듣고 있습니다, 전하.”

“아무튼 그 독과 암기 사이에서 살아 돌아오다니, 생각보다 재주가 뛰어나군.”

“감사합니다.”

“기억에 조금 이상이 있다지? 스타스 경에게 들었어.”

한 사람의 중대사를 얘기하는 것치고는 담백하고 무성의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로젤린은 그 무성의함에 상처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 또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지?”

리카르디스의 질문은 제법 어려웠다. 무엇을 아는지, 무엇을 모르는지. 그 범위를 가늠할 만한 능력은 애초에 그녀에게 없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서 칼릭스가 가르쳐준 말이 있다.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타인의 입을 다물게 하는 마법의 말이라고 했다.

그녀는 칼릭스가 일러준 대로 말하기 위해 “아무것도.”라고 운을 띄웠다. 하지만 그녀가 말을 끝맺기 전에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말을 끊고 들어오는 게 더 빨랐다.

“알지 못해?”

“예, 그렇습니다.”

그는 삐딱하게 턱을 괴었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밝은 은발이 사르륵 흘러내렸다. 리카르디스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예전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어쩐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딱딱 끊어지는 단답형의 말투 때문인지, 언제나 안절부절 거리며 할 말이 있다는 듯 쳐다보는 절실한 낯이 아니라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당장 자결하라고 명령해도 일말의 반항도 없이 알겠다며 칼을 꺼낼 것 같던 이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전보다는 확실히 덜 거슬렸다.

“그대의 활약을 기대하지, 로즈 경.”

“예.”

로젤린의 눈썹이 꿈틀 거렸다. 제 입에서 나온 호칭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진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예. 예. 알겠습니다, 전하. 명받들겠습니다, 전하. 하던 예전의 그녀와는 영 다른 모습이었다.

로젤린은 경례하고 나서 그의 탁자 바로 옆에 섰다. 리카르디스가 집무실에 있을 때의 배치는 문 앞에 두 명, 집무실 안에 두 명, 집무실 밖, 창가에 세 명을 두는 형태였다. 로젤린은 그 중 집무실 안에서 그를 호위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사실 어중이떠중이 같은 경우야 문 앞에서 다 걸러지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집무실 안까지 위험 요소가 들어올 일이 적었다. 그녀가 네스터를 박살 냈다고는 하지만 상급 기사들의 신임을 얻기는 아직 부족했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위험이 적은 집무실 안에 배치되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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