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바다협곡의 네스터.’
그와의 대련을 많은 사람들이 보았다. 그간 사람들이 로젤린에게 지원하지 않은 이유는 그녀가 그들에게 가장 원하는 것을 주지 못할 거라는 인식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검 실력이 뛰어난 상급자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싶어 했다. 다소 성격이 괴팍한 상급 기사라고 해도 실력만 뛰어나면 지원율이 높았다.
하지만 하얀밤 기사단 모두가 아는 로젤린이라는 사람은 그다지 강한 기사가 아니었다. 과묵하고 성실하지만 리카르디스 2황자와 반하는 가문이었고, 여자인 데다가 약하기까지. 하급 기사들에게조차 얕보이는 그녀에게 가르침을 청할 수습 기사는 없었다. 그런데 어제 부로 하얀밤 기사단 전체에 퍼져 있었던 인식이 조각조각 부서졌다. 하급 기사 네스터는 힘과 기술이 조화롭게 강한 자였다. 그 나이 또래의 하급 기사들 중에서는 가장 강하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있었는데…….
대련 시작 삼 초 만에 검을 놓치고 2회차에서는 첫 공격에 기절했으며, 심지어는 그보다 10센치는 작고 한참 가느다란 대련 상대의 품에 다소곳이 안겨 퇴장했다. 그의 퇴장이 충격적인 만큼이나 그녀의 승리 또한 강렬했다.
“해서, 찾아 온 거야. 뽑아 주셔야겠습니다. 로젤린 경.”
수습생들의 지원서를 들고 있는 레이몬드를 문가에 세워 둔 채, 로젤린은 제 방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한참동안 방안을 부산스럽게 돌아다녔다. 그리고는 탁자 위에 동화책 한 권, 붉은수레바퀴 가문을 상징하는 반지 하나, 방금 레이몬드가 갖다 준 마카롱 세트를 늘여놓고서는 팔짱을 끼고 인상을 썼다. 매우 고심하는 모양새였다. 그녀의 이마 사이에 잡혀 있는 주름을 보고 레이몬드가 끼어들었다.
“뭐 하는 거야, 로젤린?”
“병문안.”
지금 그녀가 가려고 하는 병문안 상대는 한 명뿐이었다. 그녀가 반죽음 상태로 만들었던 바다협곡의 네스터. 그녀가 다친 상대에게 병문안을 가야 한다는 상식을 깨우친 것 까지는 아주 좋았는데, 탁자 위에 올라와 있는 물건들이 문제였다. 동화책,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반지, 마카롱 세트? 설마 이거.
“병문안 선물이라던가…… 하는 건 아니지 로젤린? 빨리 아니라고 말해. 어서.”
레이몬드는 자기도 모르게 진지한 표정을 했다. 로젤린은 태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다. 병문안 선물.
“책에서 봤어. 병문안 때에는 꽃과 선물을. 빠른 쾌유를 비는 의미로 귀한 물건을 줘야 한다고.”
동화책이랑 마카롱이 귀한 물건에 들어가다니. 이런 귀여운 아이! 착한 아이! 레이몬드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다가 다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반지는 주면 안 돼. 결혼하자는 얘기야, 그거.”
“아.”
로젤린은 반지를 슥 집어서 자신의 목걸이에 매달았다. 네스터와는 결혼하기 싫은 듯 했다. 그녀는 둘 중에 한참 고민하더니 마카롱 세트를 집었다. 물론 값비싼 유명 제과점의 디저트이긴 했다. 우락부락한 남자 기사에게 영 어울리는 선물은 아니었지만…… 알 게 뭐람. 제까짓 게 뭐라고. 로젤린이 주면 주는 대로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야 할 것이다.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선물 감사…… 합니다, 로젤린 경. 레이몬드 부관님.”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그대에게. 몸은 좀 괜찮습니까.”
네스터는 연한 파스텔 톤으로 포장된 마카롱 세트와 뿌리째로 뽑아 온 노란 야생화 무리를 흠칫흠칫 떨리는 손으로 받았다. 핑크색 레이스 리본으로 묶여 있는 상자와 아직까지 뿌리에서 흙이 떨어지고 있는 이 잡초의 조합은 대체 뭐지. 이 여자 날 엿 먹이는 건가?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태도는 매우 공손했다. 황자 전하에게 하사 받듯이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받았다.
“걱정해주신 덕에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안 괜찮아 보였다. 목소리도 꺼끌꺼끌하니 거칠었고 얼굴도 하루 만에 팍 삭아 버렸다. 그때의 호승심과 자신감은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 수도 없었다.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로젤린이 네스터의 말에 바로 붙여 답했다. 와락 구겨지는 그의 표정과 달리 로젤린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레이몬드는 로젤린의 뒤에 서 있다가 제 눈을 가렸다. 솔직함이 과했다. 병실을 나가면 그런 말들은 그냥 의례적으로 하는 것이라 꼭 가르쳐야겠어…….
네스터도 매우 당황하는 중이었다. 역시 이 여자 날 엿 먹이는 거 같은데. 그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 네…… 그러시군요…….”
걱정을 안 하셨다니, 다행…… 걱정을 많이 하면 잠을 설쳐서 몸에 안 좋고…… 네스터는 횡설수설했다. 그가 눈을 도통 마주치지를 못하자, 로젤린이 네스터의 턱을 손으로 올려서 자신과 시선을 마주하게 했다. 네스터와 그 광경을 지켜보던 레이몬드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디 고개를 한번 들어 보아라. 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손짓이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잡고 이리저리 돌리며 상처를 눈으로 훑었다.
“멍이 들었습니다.”
“예! 경이 어제…… 아니, 제가 약한 탓에!”
“멍이 들면 아픕니다.”
“네? 네, 그렇습니다. 멍은 아픕니다!”
“조심하십시오.”
까불면 또 패겠다는 소리인가? 두 남자가 소리 없이 경악했다.
로젤린이 그의 턱을 고정하고 있던 한쪽 손을 움직여, 멍든 그의 얼굴 위로 흐트러져있던 머리카락을 살짝 넘겨주었다. 보기에 거슬려서 무의식중에 손이 나간 것이었다. 네스터는 그녀에게 얻어 맞는 줄 알고 경기하듯 몸을 떨다가 부드러운 로젤린의 손길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할 테니, 빨리 나으시죠.”
레이몬드는 어이없다는 듯이 로젤린을 쳐다보았다. 적막이 감도는 공간에 무뚝뚝한 기사와 한 남자가 이상한 기류를 형성했다. 네스터의 눈동자에 별빛이 내려오고 있었다. 열린 창틈 사이로 꽃향기를 실어오는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온 것 같기도 했다. 레이몬드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지키며 꿔다놓은 보릿자루같이 멀거니 서 있었다. 시퍼런 멍이 들어 있는 네스터의 얼굴이 붉어졌다. 네스터는 멍든 홍당무 같은 얼굴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겨우 쥐어 짜내었다.
레이몬드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분명 그녀가 별 감정 없이 한 행동이란 건 알지만, 보기에 매우, 좀, 그랬다. 어느 소설에 나오는 남자 기사가 순진한 시골 아낙을 꾀는 손길 같았다. 순진한 시골 아낙 네스터는 그녀가 병실을 나설 때까지 열렬하게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환자라는 사람이 병문안 온 사람을 지극정성으로 돌보았다. 간이 의자에 손수건을 깔고, 그녀가 화단에서 뽑아 온 야생초와 야생화 무리를 예쁘게 화병에 꽂고, 동료들이 병문안 선물로 들고 온 귀한 과일들을 손수 깎아서 로젤린에게 대령했다. 로젤린은 당연하다는 듯이 잘 받아먹었다. 네스터는 시종일관 흐뭇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병동을 나선 로젤린의 두 손에는 네스터가 준 병문안 선물이 가득 들려 있었다. 그녀는 신나 보이는 낯으로 병문안은 참 좋은 것이라 얘기했다. 레이몬드가 피곤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 그거 뭐 한 거야, 로젤린? 막 손으로…… 네스터 경의 얼굴을 막…… 그거 있잖아.”
“쾌유의 뜻을 전했어.”
레이몬드는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칼릭스가 너무 보고 싶었다.
* * *
로젤린에게 지원한 수습 기사들이 연무장 한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들은 검을 휘두르며 연습하다가 멀리서 걸어오는 두 명의 남녀를 보고 황급히 경례했다. 로젤린. 그리고 그녀와 절친한 부단장 부관, 레이몬드였다.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열다섯 명의 인원이 입을 모으니 공간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많은 수습 기사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기대에 가득 차 있는 눈빛들을 보고 레이몬드는 속으로 살짝 웃었다. 로젤린이 제 수습 기사였을 때가 잠시 떠올랐다. 지금보다 어리고, 지금보다 머리도 짧고, 지금보다…… 똑똑했었지…… 아냐,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말자. 레이몬드는 제 마음을 다잡고 목소리를 깔았다.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그대들에게. 전부 모인건가?”
“예, 레이몬드 부관님.”
열다섯 명의 인원들이 일렬로 줄지었다. 대부분 남 기사였지만 여기사도 두 명 있었다. 레이몬드는 지원서를 로젤린에게 넘겨주었다. 그녀가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그가 뒤에서 아, 얘는 쟤야. 아, 이건 저기 왼쪽에서 두 번째 애야. 하고 일러 주었다. 지원서에는 그의 가문, 지원 동기, 특기 분야, 취미 등 다양한 정보들이 서술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로젤린에게는 그다지 필요한 정보가 아니었다. 로젤린은 인간들과 오래 지내지는 않았지만, 그 짧은 기간으로도 고작 종이 한 장에 한 사람의 모든 정보를 담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파악했다. 로젤린은 레이몬드에게 서류를 다시 넘겼다.
로젤린은 긴장한 얼굴로 서 있는 이들을 눈으로 쭉 훑다가 제일 왼쪽에 서 있는 기사의 앞에 섰다. 그녀가 다 읽지 않은 분량에 속한 지원자라 이름도 가문도 알지 못했다. 로젤린은 수습 기사의 눈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일 초, 이 초, 삼 초, 십 초, 삼십 초, 육십 초. 로젤린의 시선을 받고 있는 수습 기사는 시간이 점차 흐름에 따라 목이 타는 갈증을 느꼈다. 그늘진 녹색의 눈동자가 호수의 가장 깊은 곳만큼이나 어두워 보였다. 그 안에서 무언가가 일렁이는 것 같기도 했다. 지원서에 뭔가 잘못 쓴 게 있었던가? 그렇다면 혼내도 좋으니 어떤 말이든 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그는 간절히 바랐다.
한참 뒤. 로젤린이 두 번째로 서 있던 수습기사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첫 번째 지원자는 안도의 한숨을 작게 몰아쉬며 옆에 서 있는 동기의 안녕을 빌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상급 기사 로젤린은 두 번째 지원자를 슥 한번 쳐다보고는 바로 세 번째 지원자로 넘어갔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