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은 일어났다. 엘피디오가 11살 되는 해, 황제가 새로운 비를 맞이했다. 시골 자작가의 비천한 출신의 황비. 가난한 탓에 사교계에서도 본 적 없는 인물이었다. 다들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장점이라고는 곱상한 얼굴과 달빛같이 빛나는 아름다운 머리 색 밖에 없는 여자였다.
황제가 여색을 밝히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라 다들 놀라워하지도 않았다. 문제는 그녀가 황성에 입성하며 데리고 온 두 명의 아이였다. 황비와 똑 닮은 머리 색의 열 살짜리 남자아이와 다섯 살짜리 여자아이는, 무려 황제의 자식이었던 것이다. 황제가 변방 시찰을 했던 때에 생긴 아이라나 뭐라나. 황실이 왈칵 뒤집혔다.
황실에 사생아란 없다. 그저 지위가 낮은 황녀 황자만 있을 뿐. 그럼에도 황제는 아이의 존재를 숨긴 것이다. 왜지? 모두의 의문이 점점 커져 갈 쯤, 사내아이는 정식으로 황실 일원이 되어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 신의 햇살이 비추는 영원의 나라. 그 이름을 드높일 두 번째 황자였다.
그리고 10살에 갑자기 나타난 황자에 대한 의문은 곧 풀리게 된다. 리카르디스가 1황자 엘피디오를 뛰어넘는 성력을 가지고 있음이 공표된 것이다. 신의 비호를 받는 신의 나라에서 성력이란 그 어떤 힘보다 강력했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황태자 후보에 이름을 올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고작 시골 자작가 황비가 리카르디스를 지킬 만한 힘은 없었을 것이다. 목숨이라도 보전하기 위해 입성을 미룬 것이리라. 그때부터 황실은 바람 잘 날이 없게 되었다. 유일무이하던 황태자 후보에 한 명이 더 이름을 써 넣게 되었으니.
당연하다는 듯 황실에서 황태자 수업을 받는 엘피디오와 달리 리카르디스는 직접 전쟁과 정치를 겪어 왔다. 그의 행보에서 자신의 길을 찾은 자들이 한 명 두 명 붙어, 오늘날에야 1황자와 비견할 만한 세력이 갖춰졌다.
리카르디스가 황실 일원으로 인정받은 이후부터 암살 시도는 꾸준히 있었지만, 최근 몇 년간은 이델라브힘의 하늘 아래 같은 공기 마시고 살 수 없다는 식의 필사적인 태도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 싸움에 휘말려 리카르디스의 하나뿐인 동복 여동생이 목숨을 잃었다. 리카르디스가 황태자위 싸움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그때부터였다.
지금까지는 장난이었다는 듯, 그저 몸 풀기였다는 듯, 본격적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공을 세웠다. 그것에 초조함을 느낀 1황자가 사냥 대회라는 좋은 기회를 틈타 또 암살을 시도했던 것이다. 심지어 일라베니아의 오랜 정적, 발타과 손을 잡고서. 정말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좋을지 감도 안 잡히는 멍청함이었다.
“실패했으니 몸이 달았겠군. 내 기사들이 아주 솜씨가 좋아서 말이지…… 나를 이델라브힘에게 닿게 하려면 그 정도로는 안 된다고 친히 말해 줘야 했을까, 백작?”
“무서운 소리를 하시는군요, 전하.”
바다협곡 백작이 연신 땀을 닦아가며 그의 말에 답했다. 리카르디스는 차가운 미소를 입에 걸었다.
“농일세. 그래. 이번 시도는 제법 뼈아팠지. 내 수족들이 비스타에서 그렇게 의미 없이 죽어갈 인물들이 아닌데 말이야.”
리카르디스는 얼굴에 웃음기를 싹 지웠다. 악몽 같은 밤이었다. 일생을 편하게 살아오지 않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슴에 남을 만한 밤이었다. 꽉 깨문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얕은 신음소리. 병장기에서 불꽃이 튀는 소리, 횃불이 공기를 태우고 나뭇가지를 밟는 사람들의 발소리. 황자 전하를! 리카르디스님을 지켜라! 상대는 독을 사용한다. 전하! 부디 몸을 피하시옵소서!
[하얀밤 기사단! 이델라브힘의 광휘 아래 맺었던 언약 대로, 목숨을 바쳐라!]
그저 허례허식이라 생각했던 때도 있었건만, 그들은 정말 그때의 맹세처럼 자신을 지키다가 죽었다. 입 안이 썼다. 몇 년 동안 자신의 옆을 지키던 호위 기사들이 고작 독 따위에 죽었다. 그가 성력으로 치유하고자 했을 때는 이미 늦어 버린 후였다.
그때 도망치지만 않았었더라도, 그들과 싸우기만 했더라도……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항상 늦기만 했다. 어떻게든 돌려줘야 하는데. 이 엿 같은 감정을 그놈도 느끼게 해 줘야 하는데. 리카르디스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최근 상급 기사들의 얼굴에 점점 피곤한 낯빛이 돌기 시작했다. 사냥 대회에서의 실패 이후 암살 시도가 수그러들기는커녕 활발해졌기 때문이었다. 낮에는 독을 타랴 밤에는 비수를 들고 찾아오랴. 그들이 바쁜 만큼 호위들도 하루 종일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그 상태에서 제대로 교대할 만한 인력이 있는 것도 아니라 더욱 힘겨워 보였다. 엘피디오 그 멍청이는 전략상 후퇴라는 말도 모르는 건가? 리카르디스는 속으로 엘피디오의 욕을 신나게 했다.
“의미 없이 죽은 것은 아니지요. 전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웃기는 소리야. 난 나를 위해 죽는 자는 필요 없다.”
“그래도 전하를 호위할 인원은 필요합니다. 마침 그 건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리카르디스는 턱을 괴고 기사단장직을 맡고 있는 스타스를 쳐다보았다. 가을안개의 스타스 백작. 꼬장꼬장하지만 충성스러운 가신이 무슨 말을 할지 얌전히 기다렸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경을 호위 임무에 추가하고자 합니다. 전하의 의견이 필요합니다. 이대로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리카르디스가 인상을 팍 구겼다. 주위 가신들의 표정도 확 찌푸려졌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일라베니아 제국 내에 또 있는 건 아닐 테고.”
“제가 알기로도 그렇습니다.”
스타스의 표정은 태평했다. 리카르디스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었다.
“경은 아주 농담을 잘하는군. 지금 엘피디오의 밑이나 닦아 주는 붉은수레바퀴를 내 곁에 두라고 얘기 하는 건가?”
“새 부단장 나단 경의 추천서가 열두 장이 쌓여 있습니다. 누군가의 아첨을 듣는 자도, 사람 보는 눈이 없는 자도 아닙니다. 그가 부단장 부관일 때부터 같이 일 해왔기에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나 강력하게 의견을 피력하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봅니다. 또한 제가 보았을 때에도 로젤린 경은 그녀의 가문만 아니었다면 괜찮다고 평할 수 있는 기사입니다.”
스타스는 나단의 추천서를 리카르디스에게 넘겨주었다. 리카르디스는 열두 장이나 되는 추천서를 차근차근 읽어 내렸다. 그 사이 바다협곡 백작이 얼굴을 붉히며 스타스의 의견에 반박했다. 정말 얼토당토 않는 일이었다. 현 황제의 충실한 가신이기도 하지만, 1황자의 손 또한 들어 주고 있는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자식을? 하루 종일 붙어 있어야 하는 호위 임무를 맡겨?
“가문만 아니면 괜찮은 기사라지만, 그 가문이라는 것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니오!”
“암살 시도는 더욱 늘어날 것이며 호위 인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부족하지. 칼을 잘 쓰는 자는 많지만, 전하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다는 확신이 드는 자는 몇 없소.”
“그렇다면 그녀가 백작에게 확신이라도 준다는 겁니까? 그녀가 붉은수레바퀴임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소.”
리카르디스는 눈으로 추천서를 읽으며 귀로 그들의 오고가는 말을 들었다. 호오, 생각보다 그녀는 수완이 좋았던 모양이다. 바늘 하나 안 들어가는 저 기사단장의 눈에 들다니. 리카르디스는 부단장의 추천서과 기사단장의 말에서 그녀에 대한 확신을 읽어 냈다.
그들의 언쟁 위로 하나의 목소리가 더 얹어졌다. 조용히 듣고 있던 큰뿔산양 후작이었다. 그는 자신의 콧수염을 만지며 눌린 목소리로 얘기했다. 영 탐탁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어 얘기한다는 식이었다.
“내 아들놈이 그녀는 말만 앞서는 기사들과는 다르다는 말을 입에 아주 달고 살더군요. 믿을 만하고, 충심이 깊은 데다 지휘관의 재능도 있고 애가 착하고 성실하고 어쩌고, 저쩌고. 누가 보면 내 아들놈의 손녀라도 되는지 알 겁니다. 요컨대. 자격은 갖추었다고…… 하더군요.”
후작의 지원으로 천천히 추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붉은수레바퀴임에도, 2황자 전하의 진면목을 알아보고 목숨을 바친 자. 성실하고, 명석하고, 명예를 알고 있는 자.
하지만 리카르디스는 여전히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제든 당신을 위해 죽겠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 그 눈동자가 치가 떨리도록 싫었다. 실력이 되지 않으면 나서지나 말 것이지. 멍청한 것. 모든 것이 다 스스로 부른 불행이었다.
“그래, 어쩌면 그녀가 엘피디오의 정보를 물어다 주는 파랑새가 될지도 모르지.”
리카르디스는 입매를 비틀며 웃었다. 퍽 불쾌해 보이는 낯빛이었다.
“어디 한번 지켜보기로 할까.”
* * *
기사단을 위해 오래 일했다거나 단순히 강한 기사라는 것. 상급 기사는 이런 두 가지의 조건으로만 선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 한 명 한 명이 법, 예, 정치 모든 분야를 두루 익혀 언제든 병사들을 이끌 수 있는 지휘관의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하급 기사들 중에서는 평민들도 간간히 있었지만, 상급 기사부터는 고위 귀족가의 자제들이 주를 이루었다.
현 하얀밤 기사단에는 열 명의 상급 기사가 있다. 수습 기사들은 존경하는 상급자에게 지원하고 상급 기사는 지원자의 가문과 성품, 발전 가능성 등 여러 가지를 따진 후 곁에 두었다. 수습 기사들은 상급 기사를 따르며 검을 배우고 그들의 일을 도왔다.
로젤린 또한 상급 기사로써 몇 명의 수습 기사를 데리고 다녀야 하는 권리와 임무가 생겼다. 문제는 어느 그 누구도 그녀에게 지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레이몬드는 자신의 밑에 있는 수습생들을 쥐어 패서 보낼까 생각도 해 봤지만, 차라리 제 목을 베라는 식으로 반항하는 그들에게 끝까지 강요 할 수 없었다. 수습 기사들이 진심으로 그녀를 따르지 않는다면 힘든 것은 오로지 로젤린만이 감당하게 될 테니.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눈앞에 쌓여 있는 것은 로젤린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수습 기사들의 지원서였다. 레이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협곡의 네스터.’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