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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없는 밤-14화 (14/220)

14화.

“기억하네. 기억상실이라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지.”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애가 들으면 얼마나 상심하겠습니까!”

나단은 헛소리를 하고 있는 레이몬드를 가는 눈으로 보았다. 대체 뭐라고 하는 거지 이 부관은? 기억상실을 기억상실이라고 하지 달리 뭐라고 표현한단 말인가. 레이몬드도 “아차, 이게 아니라!” 하고 급하게 말을 덧붙이며 본론으로 돌아왔다.

“로젤린 경이 뛰어난 기사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황자 전하의 호위를 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몇 달 훈련을 더 받은 후에…….”

“기사단장실에 가던 길이었지.”

“……?”

나단은 뜬금없이 말을 내뱉었다. 레이몬드는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의 말을 끊지 않고 경청했다.

“밖이 소란스럽더군.”

“사건으로부터 시일이 지나 좀 해이해졌나 봅니다. 더 굴리겠습니다.”

“좋은 생각이야. 아무튼 간에, 연무장 쪽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가봤는데…….”

“기특하게 훈련이라도 하고 있었습니까?”

“로젤린 경이 네스터 경을 개 패듯이 패고 있더군. 아니 로젤린 경은 동물을 때릴 것 같지 않으니 개라면 그렇게 안 팼겠어. 말을 바꾸지. 수련용 허수아비를 패듯이 팼다고.”

레이몬드는 입을 떡 벌렸다. 누가, 뭘 패?

“상대방이 하급 기사 바다협곡의 네스터 경이 맞습니까?”

“볼이 심각하게 부어서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아마도 맞네.”

레이몬드는 네스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사사건건 로젤린에게 시비 걸던 아주 저열한 놈이었다. 무례한 행동을 뒷받침하듯 검술 실력만은 제법 훌륭했고, 로젤린은 그런 네스터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넘어가곤 했다. 때문인지 네스터는 자신이 로젤린보다 위라고 생각하며 기고만장하게 구는 편이었다. 이번에 그가 승급하지 못한 것은 상급 기사가 단순히 검술 실력만으로 결정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누군가가 객관적으로 둘 중에 누구의 검술 실력이 더 뛰어난지 레이몬드에게 물어본다면, 그는 당연히 네스터의 손을 들었을 것이다. 그 정도의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 로젤린이 네스터를 개 패듯이 팼다고?

“네스터가…… 취한 것 같아 보이진 않았습니까? 아니면 앞서 누군가에게 쥐어 터지고 왔다던가?”

“……자네, 로젤린 경을 아끼는 것에 비하면 그녀에 대한 신용은 별로 없는 것 같군.”

레이몬드는 입을 합 다물었다. 확실히 로젤린에게 실례되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검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퇴근하겠습니다!”

“1시 반에? 해가 아직 중천이네.”

“조퇴하겠습니다!”

“아주 난리가 났군. 휴식 시간 줄 테니 한 시간 안에 돌아오게.”

사랑합니다, 부단장님! 레이몬드는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부단장실을 뛰쳐나왔다. 가문도 확실하고, 실력도 성품도 괜찮은 놈이지만 제 사람을 너무 과하게 아끼는 경향이 있었다.

나단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다가 그녀에게 호위 임무를 부여하기 위해 올려야 하는 서류 몇 가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레이몬드는 달렸다. 나단이 보았으면 인상을 찌푸리며 한소리 했을 것이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를 걷고 있는 로젤린을 발견했다. 그녀에게는 어디 하나 작은 생채기도 찾을 수 없었다. 몇 분 전까지 대련을 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온해 보였으며, 제복에도 흙이나 먼지 따위가 묻어 있지 않았다. 그녀의 두 팔 위에 얌전히 들려 있는 네스터만 아니었더라도 앞서 그렇게 격한 대련을 했다고는 도무지 믿지 못할 것 같았다.

“……로젤린 경?”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레이몬드는 자신의 두 눈을 마구 비볐다. 로젤린은 평온한 얼굴로 네스터를 들고 있었다. 마치 동화책에 나오는 기사가 공주님을 안을 때처럼.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그녀 뒤에는 익숙한 얼굴 두 명이 새파랗게 질린 채 그녀를 따르고 있었다. 하급 기사 클로드와 바스티안. 항상 네스터와 같이 다니며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다니던 자들이었다. 한데 지금은 엉덩이를 맞은 어린 강아지같이 잔뜩 풀 죽어 있다.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그대들에게…… 경, 그, 그건 아니 네스터 경은 어쩌다가…….”

그렇게 참혹한 꼴을 당한 거니……? 얕보던 상대에게 쥐어 터져서 기절한 건 그렇다 치더라도, 그녀의 품에 다소곳이 안겨 있는 모습이 매우 참혹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가 깨어 있었다면 수치심에 눈물이라도 흘렸을 것 같은 광경이었다.

“대련했습니다. 의무실에 가던 중입니다.”

그가 궁금했던 것은 그녀가 대답한 [대련했습니다] 의 조금 더 길고 상세한 설명이었지만, 보는 눈이 있어서 굳이 되묻지는 않았다. 네 명은 사이좋게 의무실로 향했다. 의사와 의무실에 상주하는 신관이 네스터의 몰골을 보고 헉 숨을 들이켰다. 뭐지? 낙마해서 말한테 밟힌 건가?

“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마수라도 나타났습니까?”

어, 예리한걸. 로젤린은 속으로 그 말을 삼켰다.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그녀를 대신해 바스티안이 입을 열었다.

“대련…… 했습니다…….”

“대련이요? 얼굴이 이렇게 떡이 될 때까지 하는 대련이 있습니까?”

의사가 그의 옷을 들쳐보았다가 여기저기 올라오기 시작한 시커먼 멍들을 보고 식겁했다. 그의 물음에 클로드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항복 선언을 할 때까지 대련하기로 했는데, 첫 공격에 기절해 버려서 항복이라는 말을 못했…….”

클로드는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 어마어마했던 광경을 반추하는 것 같았다.

레이몬드는 로젤린의 강해진 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상식을 깡그리 잃어버린 것 또한 잘 알았다. 로젤린은 기절해 버려서 항복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은 네스터를 계속 팼을 것이고, 그는 항복이란 말을 못해서 계속 맞았을 것이다. 그 광경을 조금 지켜보던 바스티안과 클로드가 기겁하며 대신 항복 선언을 하지 않았다면. 음. 상상만 해도 오싹했다.

레이몬드는 의사에게 그를 잘 부탁한다고 했다. 인력이 부족한 시기니 힘 써 달라고 했더니 인력이 부족한 걸 아는 사람이 한명의 인력을 박살 냈냐는 불손한 눈빛을 보냈다. 옆에 있는 검은 머리의 여기사가 그랬으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레이몬드는 괜히 자신이 찔려서 호탕한 웃음을 내뱉고 로젤린을 끌고 나왔다. 그녀는 대련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풀어서 손으로 대충 빗고 있었다.

“……다친 곳은 없고?”

“응. 걔 약해서.”

“그거 네스터 앞에서는 얘기하면 안 된다?”

“응.”

“그리고 다음부터 대련할 때는, 기절하면 항복이라고 말 안 해도 패면 안 돼. 알겠지?”

“응.”

어, 알았어. 나 알았어. 얘 문서 작업은 무리야. 절대 안 되겠네. 지금의 로젤린에게는 호위 임무가 적격이다. 조용히 곁을 서 있다가 수상한 자를 쥐어 패는 임무. 부단장의 선견지명이 반짝반짝 빛나 보였다.

* * *

2황자가 머무는 월장석 성. 아침부터 리카르디스의 집무실은 만원이었다. 황금정원 자작, 바다협곡 백작, 가을안개 백작, 푸른등불 공작. 큰뿔산양 후작까지. 2황자 세력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술렁였다. 푸른등불 공작이 가지고 온 정보 때문이었다. 2황자 리카르디스는 가장 상석에 앉아 태연한 얼굴로 차를 마셨다. 물론 은제 식기의 색을 확인한 후였다.

“다들 놀라는 척 하기는. 빤한 일 아니겠는가? 타국의 암살 부대가 국경을 지키는 수천, 수만의 눈에 띄지 않게 넘어온 것 까진 그렇다 치고 말이야. 우연히 발견한 막사에 공격을 퍼부은 것뿐인데 2황자만 피해를 입었고, 심지어는 놀랍지 않나? 어떤 곳에도 1황자는 없었다니. 이거야 원, 바보라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작위적이니…….”

그의 말에 큰뿔산양 후작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런 간악한 놈들. 어찌 일라베니아의 황자라는 자가 타국의 광신도와 손을 잡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무래도 1황자 전하께서는 검은달과 손을 잡으셨다고 확정을 내려도 될 것 같습니다. 아, 발타 왕실이라고 정정할까요?”

“뭐 굳이 구분까지 할 필요가 있나. 검 은달 놈들이 왕실까지 들어앉아 있는데. 그놈이 그놈이지.”

리카르디스는 지루해하며 턱을 괴었다. 변함없이 치졸한 수법이었다. 제 형님이라는 자가 그러했다. 그 황제라는 자리가 대체 무엇이건데 그토록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인지. 우스울 뿐이었다.

“증거는?”

“쉽게 발 뺄 수 있을 겁니다. 도리어 덮어쓸지도 모릅니다.”

“나와 내 기사들이 가장 피해를 많이 입었음에도?”

“정치적인 쇼라고 말할 겁니다.”

“정확하군, 후작. 형님이 하실 만한 헛소리야.”

테이블에 앉아 있는 남자들의 표정이 영 좋지 못했다. 리카르디스보다 황태자 위에 근접한 1황자 엘피디오. 그는 일라베니아라는 대륙 절반을 차지하는 거대한 제국을 이끌어갈 만한 그릇이 아니었다. 1황자로서 군주학을 비롯해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두루 공부해 왔지만 주변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꼴을 보지 못했고, 오냐오냐 떠받들어지며 자란 탓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오만한 성질까지 갖추었다.

그러나 그의 뒤에 있는 황후, 정확히는 황후의 집안 사자갈기 공작가. 그 세력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제국에 몇 없는 공작위를 지니고 있음은 물론이요, 애초에 황실로부터 갈라져 나온 방계 가문이었기 때문에.

황후와 황제는 멀지 않은 혈연관계였으나, 황실은 성력을 위해 근친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집착이 엘피디오에게서 결실을 맺은 것이다. 황후 소생이라는 강력한 뒷배, 역대 황제와 비견해도 뒤지지 않는 방대한 성력.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장자가 가문을 계승하는 일라베니아에서 엘피디오는 사실상 황태자나 다름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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