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로젤린은 외유내강을 넘어서, 겉으로 보기에 아주 물렁한 사람이었다. 같이 조를 짠 하급 기사들이 싫은 말을 해도 묵묵히 받아 넘기고, 이상한 장난질을 치거나 시비를 걸어도 상관에게 보고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승급했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여전했다. 계급으로 타인을 찍어 누를 생각도 없어 보였고, 다른 상급 기사라면 진즉에 처벌하고도 남았을 발언에도 그저 쳐다볼 뿐이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이 다소 위협적으로 보이긴 했지만 남자는 잘 알고 있었다. 로젤린은 원래 저렇게 생긴 사람이었다.
바다협곡의 네스터. 금발의 남자는 바다협곡 백작의 차남이었다. 그는 로젤린과 같은 시기에 하얀밤 기사단의 수습 기사가 되어 동기라는 이름으로 묶였다. 네스터가 보기에 로젤린은 부족한 검술 실력을 머리로 채우는 전형적인 여기사였다. 전술이야 괜찮은 전략가를 옆에 두면 되는 것이고 기사에게 중요한 것은 역시 검술 실력이 아니겠는가. 네스터는 사사건건 그녀와 자신을 비교하며 제 자존감을 채웠다.
하지만 로젤린이 먼저 하급 기사로 승급한 그 날부터 그의 자존심은 구깃구깃 구겨지고 말았다. 네스터 또한 곧 하급 기사로 승급하긴 했지만, 하루든 이틀이든 그녀가 먼저 앞서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급 기사로 승급하기까지 했다. 존경해 마지않던 기사단장의 안목이 의심되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서임식을 황자 전하께서 직접 진행하는 모습을 보니 속에서 불길이 확 치솟았다. 로젤린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하급 기사들과 그녀의 사소한 하나하나를 트집 잡아 비웃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도리어 제 꼴이 우스워 지는 것 같다고 생각할 쯤에 네스터는 보게 되었다. 로젤린이 기사 가문의 자식들이 여덟 살 때에나 하는 기본적인 검법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그것도 원래 펼치는 동작보다 수 배는 늦는 동작들이었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허술할 수가! 그저 웃음만 나오는 실력이었다. 고작 그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상급 기사로 승급해?
네스터는 웃었다. 하급 기사에게 지는 상급 기사는 없었다. 상급 기사들 중엔 여자가 없기도 했거니와 모두가 백전노장의 전사들이었다. 머리 좀 좋을 뿐인 여자가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네스터는 자신이 그 차이를 직접 몸으로 깨닫게 해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때 서로의 등을 맡겼던 것도 인연인데 한 수 가르쳐 주시지요, 로젤린 경.”
네스터의 뒤에 서 있던 하급 기사들이 웃음을 겨우 삼키는 게 보였다. 로젤린은 그들의 모습을 쭉 지켜보았다. 이럴 경우는 어쩌라고 했더라. 이런 경우는…….
[그래도 가끔씩 질투에 눈이 멀어서 위아래를 모르는 놈들이 있긴 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누님이 검술이 약하다는 걸 꼭 걸고넘어지겠죠.]
다섯 번째로 칼릭스와 대련한 후에 그의 입에서 나왔던 말이었다. 칼릭스는 연무장 바닥에 무릎을 꿇고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왼쪽 목덜미에는 로젤린의 검이 서늘한 빛을 내고 있었다. 칼릭스는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몇 번 짓다가 그녀를 향해 짓궂은 표정을 했다.
[검투건 박투건, 원하는 대로 해주세요.]
로젤린은 몇 개의 키워드를 기억해 내었다. 원하는 대로 해줘라. 그리고 또 뭐라고 했더라?
[두 번 다시 기어오르지 못하게.]
아, 그래. ‘두 번 다시 기어오르지 못하게’였다.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스터는 갑자기 몰려오는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 * *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며 네스터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상급 기사가 됐다고 검술 실력도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줄 아는 건가?
“입회인을 두고 정식으로 하시죠. 대련 도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알겠습니다.”
“클로드 경, 바스티안 경. 부탁합니다.”
네스터의 뒤에 서 있던 기사들 중 두 명이 앞으로 나섰다. 암기 금지, 검술과 체술의 종합적인 대련. 한 사람이 항복 선언을 할 때까지 지속된다. 대련 중 무슨 일이 일어나도 서로에 대해 책임은 없다. 낯선 기사 두 명이 로젤린에게 대련 조건을 읊어 줬다.
두 하급 기사의 입회 아래, 로젤린과 네스터의 대련이 준비되었다. 로젤린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다시 묶을 쯤엔 사람들이 하나둘씩 연무장에 모이기 시작했다. 연습이라도 하러 왔다가 우연한 광경에 눈을 뺏긴 듯 보였다. 결투처럼 입회인까지 두고 대치하는 모습을 보고 다들 즐거워하며 구경했다. 소문의 상급 기사 로젤린. 그리고 하급 기사이긴 하지만 검 실력이 깨나 좋다는 바다협곡의 네스터.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짧은 시간 안에 소문이 퍼졌는지 수습 기사, 하급 기사 할 것 없이 연무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간간히 상급 기사들도 끼어 있었다. 네스터는 속으로 웃었다. 자신이 의도한 대로 흘러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보면 볼수록 로젤린을 끌어내리기에 용이할 것이다.
네스터는 빛나는 눈으로 로젤린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부슬거리는 검은 머리카락, 여자치고는 큰 키. 미인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흔하디흔한 생김새는 날카로운 눈매 때문에 더욱 박한 평가를 받았다. 그녀는 주위의 소동에도 별 다른 반응 없이 몸을 풀고 있었다. 부서지는 검 날에 다치면 큰일이니 구경하던 자들도 조금 더 거리를 벌렸다.
로젤린과 네스터는 검을 뽑았다. 날이 검집을 스치는 소리가 연무장을 울렸다. 두 사람 다 얼굴 앞에 검을 세웠다가 검 끝을 서로 마주했다. 얇고 가느다란 검과 크고 넓은 검의 대비가 극명했다. 챙.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대련이 시작되었다.
‘속전속결!’
네스터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검을 부러트릴 것 같은 우악스런 힘이 그녀의 검을 향했다.
챙!
금속끼리의 마찰음이 크게 울리더니 검신이 크게 하늘로 떠올랐다. 허공에서 뱅글뱅글 도는 검을 따라 햇빛도 반짝이며 반사되었다. 높게 떠있던 검은 공중에 머무르는 듯싶더니 이내 연무장 바닥에 퍽 박혔다.
기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검을 놓치는 것은 수습 기사들도 하지 않는 행위였다.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네스터의 얼굴이 울긋불긋해졌다. 검을 놓친 건 로젤린이 아니었다.
네스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한순간에 큰 충격을 받아 버린 손은 그의 통제를 벗어나 떨리고 있었다. 마치 돌 벽에 대고 검을 내려친 것 같았다. 이게 뭐지? 대체 무슨 일이 나에게, 그녀에게 일어난 거지? 지금 내가 뭘 한 거지? 네스터는 눈을 굴려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네스터는 그녀의 녹안을 보고 지금의 상황을 인지했다.
“이, 이게 무슨……!”
네스터는 고개를 돌려 입회하고 있던 동료들을 쳐다봤다. 클로드와 바스티안의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네스터의 형형한 눈빛에 두 남자가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암기 아냐. 속임수 없었어. 그 뜻을 읽은 네스터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멀거니 서 있기만 하는 그의 귓가로 고저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수, 잘 배우셨습니까.”
네스터의 얼굴이 터질듯 붉어졌다. 연무장을 둘러싸고 있던 수많은 기사들이 동요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이를 갈았다. 운이 좋아서 힘의 중심을 어찌 받아친 모양인데 그 정도로 의기양양해하기는!
“……조금 더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
알겠다더니 왜 검을 집어넣지? 네스터의 의문은 곧 풀렸다. 그녀가 허리춤에 있던 검집을 풀어 멀리 던졌기 때문이었다. 그가 황당해하는 사이, 로젤린은 주먹을 쥐어 박투 자세를 취했다.
지금 나랑 체술을 겨뤄 보자는 건가? 저 여자 미친 거 아냐? 체급도 체급이지만 여자와 남자는 종이 다르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힘의 차이가 있다. 여자의 몸으로 기사가 되어 그 사실에 대해 누구보다 체감하고 있어야 할 그녀가 지금 주먹 너머로 눈을 번쩍이고 있었다.
네스터가 보기엔 로젤린은 그저 자신보다 한참 작고 마른 인간에 불과했다. 그런 그녀의 몸에서 무언가가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전쟁을 치룬 적 있는 네스터는 그게 무엇인지 알았다. 압력이다. 자신의 본능이 진심으로 저 여자를 경계하고 있었다. 대련 초의 미소를 잃은 지는 오래되었다. 네스터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박투 자세를 취했다. 기사들 또한 둘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에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바람이 불었다. 열을 식히는 바람에 나뭇잎이 한 장 실려 와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질렀다. 로젤린의 눈동자와 같은 색의 잎사귀였다.
그것이 네스터가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 * *
사냥 대회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하얀밤 기사단의 인원이 대폭 줄어들었다. 이후 급히 서임식을 치루며 빈자리를 채우긴 했지만, 정상궤도로 올라서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현재 2황자의 성을 호위할 만한 인력은 넉넉했다. 문제는 2황자 리카르디스의 곁을 지킬 만한 실력을 갖춘 자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예전엔 3교대로 빈틈없이 호위했었지만 지금은 최소한의 2교대 호위조차도 겨우 해내고 있을 정도였다. 상급 기사로 올라온 자들의 급속한 성장이 필요한 시기였다.
레이몬드는 각 조마다의 훈련 성과를 보고받은 것을 살펴보던 중이었다. 잠시 밖으로 외출했던 부단장 나단이 멍한 얼굴로 들어오더니 자리에 털썩 앉았다. 레이몬드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부단장님?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경을 2황자 전하의 호위로 넣는다.”
“예엑?”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경을 2황자 전하의 호위로 넣는다.”
“네엑? 아니, 제대로 못 들어서 되물은 게 아닙니다! 아니, 아니아니아니!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로젤린 경은 현재 매우, 마음과…… 머리가 아프다고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