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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없는 밤-12화 (12/220)

12화.

그녀의 혼란스러움을 뒤로하고 예식은 이미 차례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2황자가 두꺼운 책을 펼쳐서 읽어 주기도 했고, 기사단장 스타스가 큰소리로 무언가를 외치자 기사단원들이 같이 복창하기도 했다. 로젤린은 입을 뻥긋뻥긋하며 따라하는 시늉을 했다.

신관처럼 보이는 이들이 세공된 넓은 접시를 가져와 제단 앞에 올려놓았다. 얇고 하얀 접시에는 맑은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델라브힘의 독수리가 앉은 월계수. 바로 그 앞에 있는 호수의 물이었다. 성수라고도 불렀다. 그 물 자체에 무슨 효력이나 효능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중요한 의식을 치를 때마다 사용되는 것이었다.

서임식은 수습 기사에서 하급 기사로 승급되는 자들부터 시작되었다. 황자는 뒤로 물러나있어 기사단장이 대신 그들의 맹세를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제단에 오르고 내렸다. 하급 기사에서 상급 기사로 승급하는 이들의 서임식이 시작되자 뒤로 물러서 있던 황자가 앞으로 나왔다. 그들의 서임식은 리카르디스가 직접 진행했다. 모두 눈을 빛내며 하얀밤 기사단의 주인을 우러러보았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로젤린의 이름이 불렸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에스터. 앞으로 나오라.”

그녀는 칼릭스가 가르쳐준 대로 걸었다. 한 발 한 발. 다리를 너무 벌려서는 안 되고 보폭이 너무 커서도 작아서도 안 된다. 목을 당기고 허리를 핀 채로 정면을 응시하며…… 그녀는 속으로 중얼중얼 칼릭스의 말을 반복했다. 제단 앞에 선 그녀는 검을 뽑아 땅에 박은 후 한쪽 무릎을 꿇어 준비를 끝냈다.

제단의 한 중앙에는 2황자가, 그의 오른쪽에는 기사단장 스타스가, 왼쪽에는 신관이 있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던 2황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 그걸 미쳐보지 못했다.

“하얀밤의 하급 기사 로젤린 에스터. 맹세하라.”

그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웅웅 울렸다. 로젤린은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에스터가 설원의 월계수 앞에서 진실 된 맹세를 하고자 합니다.”

“설원의 월계수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가 붉은수레바퀴 로젤린 에스터의 맹세를 듣는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그녀의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래, 그 잘난 맹세. 한번 해 보아라.’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은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검이 되겠습니다.”

“그대는 이델라브힘의 빛이 되어 검은 달을 가르라.”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은 약자를 보호하고 제국에 충성하겠습니다.”

“그대는 약한 자의 강인한 울타리, 일라베니아의 부수지 못할 방패가 되어 명예를 지키라.”

“영광된 이델라브힘의 광휘 아래, 두 번째 월계수의 기사가 되어 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영광의 이델라브힘의 광휘 아래,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을 상급 기사로 임명한다.”

리카르디스는 넓은 접시에 있는 물을 손에 찍어 그녀의 이마에 죽 그었다. 로젤린은 차갑게 닿는 감촉에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앞에는 밝은 은발이 찰랑이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아무 감정 없는 무심한 눈동자가 로젤린을 잠시간 담다가 곧 흥미 없다는 듯 다른 곳을 향했다. 로젤린은 마지막 경례 후 자리로 돌아갔다.

이후 레이몬드가 부단장 보좌로 임명 되는 짧은 의식이 있었다. 뒤를 이은 새로운 부단장의 서임식을 마지막으로 모든 일정이 마무리 되었다. 리카르디스는 임명식이 모두 끝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단을 떠났다.

기사단장이 폐회를 선언했다. 이내 백색의 제복을 입은 하얀밤 기사단의 단원들도 모두 흩어졌다. 로젤린은 이마를 슥슥 만졌다. 그의 손끝이 닿았던 흔적은 이미 말라서 없어졌지만, 이상하게도 그 차가운 온도가 아직 선명하게 느껴지는 듯 했다.

* * *

의외로 평탄한 나날이 이어졌다. 상급 기사라고는 하나, 막 승급한 로젤린에게 황자 호위라는 중대한 임무가 돌아올 리 만무했다. 결국 그녀에게 돌아오는 몫의 일거리는 검술 훈련이나 문서 작업뿐이었고, 그 일감은 자연스럽게 레이몬드의 책상 위에 쌓였다.

깐깐한 부단장의 보좌로 일하며 살인적인 업무량에 시달리던 그는 밤을 새면서 그녀 몫의 문서 작업까지 해내었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 곧 레이몬드의 눈 아래에 시커먼 피곤의 흔적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생기만 간신히 붙어 있는 시체 같았다. 인간의 표정을 다 구분하지 못하는 로젤린이 보아도 좀 심각한 상태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미안하다는 감정의 의미를 진정 깨우친 때였다.

“미안…… 나 그런 거 할 줄 몰라서.”

로젤린의 시무룩한 반응에 레이몬드는 왈칵 눈물을 흘릴 뻔 했다. 마음만으로는 이깟 서류작업 따위 천년만년 해줄 수도 있었지만, 그런 건 로젤린을 위한 게 아닐 수도 있다. 배고픈 자에게 물고기를 주기보다는 낚시하는 방법을 알려 주라고 하지 않던가. 슬슬 그녀도 하얀밤 기사단에 정착할 때였다. 레이몬드는 애써 웃으며 시무룩한 그녀를 다독였다.

“아니야. 모르면 배우면 되지 뭐, 넌 머리가 좋아서 금방 익힐 거야.”

“응.”

“필요한 건 도서관에서 내가 빌려 올게. 지금쯤이면 연무장 비어 있겠다. 가서 검술 훈련하고 있어. 매일 하고 있지?”

“응. 방에서 매일매일. 남는 시간마다.”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그 성실함이 어디 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레이몬드는 유명 제과점에서 사 온 쿠키를 그녀에게 건넸다. 큰뿔산양 저택의 강아지를 교육할 때에도 포상용 간식이 있었는데…… 까지 생각이 미친 그의 기분은 급격히 참담해져 버렸다. 어쨌거나 로젤린은 초코 칩이 박힌 쿠키를 맛있게 먹으며 레이몬드의 말을 따라 연무장으로 향했다.

로젤린은 레이몬드의 충고에 따라 검술은 방 안에서만 수련했다. 준비가 덜 된 상황인 만큼 다른 기사들과 마주치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넓어서 충분히 움직일 공간이야 있지만 연무장의 흙냄새와 땀이 날 즈음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 찌르르 우는 풀벌레 소리까지. 그 어떤 것도 없어서 아쉬웠던 참이었다.

연무장은 텅 비어 있었다. 다른 기사들은 식사 후 조금의 휴식시간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로젤린은 검을 뽑았다. 머릿속으로 두 남자의 모습을 그렸다. 레이몬드와 칼릭스는 그녀의 상념 안에서 끝없이 움직였다. 길고 무거운 검이 나비가 움직이듯 나긋나긋하게 춤추고 있었다. 어떤 때는 무게가 한 톨도 느껴지지 않다가도 어떤 때는 태산보다 무겁게 내려앉았다.

로젤린은 주위를 감싸고 있던 적막을 깨트리며 움직였다. 일라베니아의 기본 검법이었다. 그녀는 동작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짚어 가며 천천히 검을 흘렸다. 누가 보면 답답하다고 느낄 만큼 느렸지만, 움직임은 완벽함에 닿아 있었다. 햇살 아래 로젤린의 높게 묶은 검은 머리가 흔들렸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살짝 웃었다. 시원한 바람이 기분 좋았다.

한참을 움직이던 로젤린의 감각에 불순물이 끼어들었다. 하얀밤 기사단에 오고 나서 줄곧 느껴 왔던 껄끄러운 시선이었다. 로젤린은 검술 연습을 지속하며 그 시선의 근원을 찾았다. 저 멀리 장신의 남자들 몇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이 달고 있는 견장의 모양에서 하급 기사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들은 로젤린을 쳐다보다가 입을 모아 무언가를 얘기했다. 그리고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로젤린은 알고 있었다. [기분이 좋을 때는 웃는다] 그 공식이 절대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숨길 생각도 없이 로젤린에 대한 감정을 흘리고 있었다. 그 감정이 적나라한 것과 얼마간 인간으로서 쌓아 온 경험이 그녀에게 말하고 있었다. 저들은 로젤린을 좋아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녀에게 흠을 내고 싶어 하고, 그 틈을 비집을 순간을 보고 있었다.

[누님에게는 적이 많으십니다. 정확히는 적이 많은 곳으로 누님이 들어가신 겁니다. 그걸 각오하고 성으로 가셔야 할 겁니다.]

칼릭스가 해 주는 말들은 정말 하나같이 옳았다. 그녀는 적이 많았다. 같은 종족인 데다가 같은 옷을 입고, 더욱이 한 건물 아래 같이 사는 인간들은 어떻게든 그녀를 끌어내리고 싶어 하며 로젤린의 곁을 맴돌고 있었다. 신경이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로젤린의 검은 여전히 느렸지만 몹시 날카로워졌다.

멀리서 그녀가 기초 검법을 연습하는 걸 지켜보던 하급 기사들이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기에 그들은 연무장 중앙에 있던 로젤린에게 금방 다가섰다. 로젤린은 그들이 오는 것을 느끼고 연습을 끝맺지 못한 채 중단해야만 했다.

다섯 명 전부 주먹을 심장 위에 올려놓으며 경례했다. 입을 한쪽으로 비틀며 웃고 있던 금발의 젊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오랜만에 뵙습니다, 로젤린 경.”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그대들에게.”

[그나마 다행인 건 기사단은 상하 관계가 분명한 집단이라는 겁니다.]

칼릭스의 목소리 위로 웃음기 어린 남자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상급 기사로 승급하신 것,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귀띔이라도 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전에 같이 조를 짰던 때를 생각해 보면…… 음…… 상상도 못할 일이었던지라, 축하 선물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조차 못했지 뭡니까.”

[……상하 관계가 분명한…….]

“…….”

아닌 것 같은데…… 상하 관계 분명하지 않은 거 같은데…… 로젤린은 과거의 칼릭스가 가르쳐 준 내용에 딴죽을 걸었다. 금발의 남자는 자신에게 지금 시비를 걸고 있는 중이었다. 둔한 로젤린이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노골적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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