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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없는 밤-11화 (11/220)

11화.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로젤린은 살아 돌아왔다. 그래도 한솥밥 먹은 사람으로서 미운 정이라도 들었는지 그 소식이 싫지만은 않았다. 한데 승급이란다. 상급 기사로 임명받는단다. 그녀의 적은 소리 없이 불어났다. 황자 전하를 지키고자 목숨 바친 이들의 자리를 꿰차기엔 한없이 부족한 인물이라고 여겼기에. 심지어는 추모식 때는 코빼기도 안보이고 제 영지에 박혀서 놀다가, 서임식때 나 슬그머니 기어 나오다니. 어쩌면 저렇게까지 간악할 수 있을까. 모두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단원들은 그런 마음을 조금이라도 품고 있었다.

상급 기사들은 자격과 능력이 모자란 기사가 굴러 들어오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고, 하급 기사들은 제 자리를 뺏긴 것 같아 분노했으며, 수습 기사들은 현재 로젤린의 직위가 그녀의 가문과 권력으로 얻어 낸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로젤린을 쳐다보는 수많은 눈빛들은 그런 감정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집요하게 질척거리며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열렬한 구애의 눈빛보다 더 진했다.

레이몬드는 눈에 모를 세우고 주위를 쭉 둘러봤다. 그와 눈이 마주친 하급 기사들이 급하게 자리를 떠났다. 죽었다 살아 돌아온 사람에게 축하는 못해 줄망정 뒤에서 수군거리고나 있는 작태를 보노라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칼깨나 쓴다고 하는 어린 엘리트의 집단이다 보니 자존심과 아집으로 똘똘 뭉쳐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다. 기사도를 백날 배우고 외우면 뭘 하나. 그것은 의미 없이 어디론가 모두 흘러가 버린 것 같은데.

“로젤린.”

“응.”

“하나 말해 둘게 있는데…….”

“말해.”

“사실…… 너…… 친구…… 나밖에 없다……?”

그녀는 눈썹 한쪽을 들고 그를 올려봤다. 퍽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나 친구 많을 줄 알았는데.”

칼릭스도, 하녀들도, 레이몬드도, 기사단장까지. 만나는 사람마다 로젤린을 좋아하는 게 빤히 보였는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거울로 로젤린이라는 인간을 볼 때면 풍성한 까만 머리털엔 윤기가 반질반질 흐르는데다 눈 색은 풀잎 같아 예쁘다고 생각했다. 살이 없는 게 좀 흠이긴 하지만 키가 훤칠하니 크고 근육의 질도 좋으니까 튼튼하고 멋져보였는데…… 인간들은 외적인 부분에 많이 좌우된다더니 그것도 다가 아니었나?

그녀의 또랑또랑한 표정을 보며 레이몬드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로젤린의 곁에 있어야만 했을 가상의 친구를 송두리째 뺏어 버린 것 같았다. 자신이 너무 나쁜 놈처럼 느껴졌다. 레이몬드는 찔끔 나온 눈물을 소매로 훔쳤다.

“걱정 마. 이 오라버니가 일당백의 친구니까!”

레이몬드는 제 머리를 그녀의 검은 머리에 마구 비볐다. 두피가 당겨서 조금 아팠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하자 둘은 사이좋게 기숙사에 딸린 식당으로 갔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걸 잠깐 잊을 정도로, 식사는 맛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면 먼저 편지지를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로젤린은 제 동생에게 꼬박꼬박 편지를 썼다고 했다. 성은 하얀색이었는데 자신을 마중 나온 레이몬드가 있었고 기사단장도 만났다. 사람들이 쳐다봐서 불쾌했지만 때리지도 죽이지도 않았다. 난 예쁜데 친구가 별로 없다고 한다. 밥은 맛있었다. 에스터의 밤과 같이 티가드의 밤 또한 달과 별빛으로 반짝거린다.

하지만 로젤린은 오랜 여행의 피로로 인해 끝까지 쓰지 못하고 잠들었다. 책상에서 그대로 엎어진 채 그녀는 아침까지 깊은 잠을 잤다. 꿈에 로젤린이 나온 것 같았다. 널 좋아하는 사람도 많고 싫어하는 사람도 많더라. 처음 만났을 때보다 능숙한 인간의 언어로 말을 걸었더니 로젤린은 그때처럼 미소 지으며 원래 그런 거라 이야기했다.

* * *

로젤린은 눈을 떴다. 복도에서 바지런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하늘을 보니 아침에 가까운 새벽의 색이었다. 오늘은 하얀밤 기사단의 서임식이 있는 날이었다. 그녀는 책상에서 일어나 거울을 확인했다. 편지지로부터 새어 나온 잉크가 볼에 몇 개의 글자를 남기고 있었다.

씻은 후 제복을 갈아입고서 머리를 묶으니,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가 노크했다. 로젤린은 감각을 곤두세워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일당백의 친구 레이몬드였다. 그녀는 방긋 웃고 문을 열었다.

“좋은 아침이야 로젤린.”

“좋은 아침. 레이몬드.”

기억을 잃어버린 채로 의지할 수 있는 혈육과 집마저 떠나왔다. 마음고생이 심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걱정이 무색하리만큼 그녀는 숙면을 취한 듯 보였다. 하얀 피부에 만질만질하게 윤기가 돌았다. 레이몬드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전에도 이렇게까지 적응력이 좋았나? 애가 죽다 살아나더니 마음에 여유가 생겼나 보다.

레이몬드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갔다. 그녀는 서임식이 진행되는 넓은 제단을 보았다. 흰 돌이 크게 원을 그리고 있는 중앙에는 월계수가 있었고 그 옆에 독수리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녀는 칼릭스에게 들었던 인간의 신화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이델라브힘이 하늘과 땅을 잇는 매개로 자신의 분신을 인간들에게 보냈는데 그것이 독수리였고, 그 독수리가 앉은 월계수 나무를 중심으로 일라베니아 제국이 세워졌다던가, 그래서 일라베니아의 중요한 의식을 치르는 제단마다 월계수 나무와 독수리 석상이 있다던가 하는 흘려들었던 정보들이었다.

그녀가 제단을 멀뚱히 구경하는 사이 흰 제복을 입은 기사들이 하나둘 모였다. 그들은 누가 명령을 내리지 않았음에도 오와 열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것도 칼릭스에게 배운 것이었다. 맨 뒤에는 수습 기사. 중간 줄을 하급 기사, 앞줄에는 상급 기사가 서 있게 된다. 그 앞에 기사단장의 부관과 부단장, 부단장 부관이 상급 기사와 마주 보며 서 있는 형태. 제단의 한 가운데는 의식을 진행할 2황자가 차지할 것이고 그 옆에 기사단장이 그를 지킬 것이다.

로젤린은 아직 정식으로 임명받지 못했으므로 하급 기사들과 같이 줄을 섰다. 여전히 곱지 않은 눈빛들이 그녀 주변을 맴돌았다. 상급 기사들은 어디 갔는지 대열에는 하급 기사와 수습 기사뿐이었다. 그 상태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부우우.

공기를 울리는 소리가 퍼지며 얽혀 있는 빛 무리가 그려진 흰색 깃발이 차례대로 올라갔다. 기사들은 탁, 탁 움직이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곧게 펴고 차렷 자세를 했다. 저 멀리 하얀 궁에서부터 상급 기사들이 발 맞춰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좌우로 감싸고 있는 중앙에는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하얀 옷을 입은 남자가 있었다. 하지만 기사들의 제복이 아닌 신전에서나 입을 법한 화려한 예복이었다. 그는 길게 찰랑이는 머리를 늘어트리고 제단을 향해 천천히 걸어 왔다. 달빛을 담은 듯 은은하게 빛나는 은발이었다.

로젤린은 순간 그와 눈이 마주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가 누구인지 미처 알기 전이었다. 바다같이 푸른 눈동자를 본 순간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는 감정과 혼란이 그녀를 덮쳐 왔다. 심장이 소란스럽게 쿵쿵 로젤린을 두드려 댔다.

이게 뭐지? 이게, 뭐야? 독인가? 아니,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있지만 여느 생물과 다르게 자신에게는 독이 통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것을 흡수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를 깬 부작용인가? 아니, 그렇다면 진즉에 이상을 느꼈을 것이다. 로젤린이 숨을 가쁘게 쉬며 오른손으로 가슴을 꽉 눌렀을 즈음엔, 모든 기사들 또한 그녀와 같은 동작을 했다. 기사들의 경례 방식이었다. 로젤린은 우연의 일치로 그들 속에 녹아들었다.

상급 기사들은 중앙의 남자를 제단까지 호위한 후, 자연스럽게 돌아와 그녀의 앞에 섰다. 로젤린은 앞에 서 있는 상급 기사의 어깨 너머 단편적으로 보이는 그를 응시했다.

로젤린은 들은 적이 있다. 현 일라베니아 황실에서 유일하게 은발을 가진 황자. 설원의 월계수. 2황자 리카르디스.

그녀가 지키고자 했던 하얀 밤의 주인이었다.

* * *

[2황자 전하의 생모이신 밀리아 황비님 께서는 변방 자작가 출신이십니다. 심지어는 황비님의 어머니께서는 평민이셨죠. 그래서 2황자 전하의 출신을 걸고넘어지는 자들이 많습니다. 비천하네, 평민의 피가 흐르네 하면서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황자님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하곤 하죠. 왜 그럴 것 같습니까 누님?]

[황자라서?]

[그것도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성력이지요. 그리고 황자님의 그 외모.]

[……외모?]

[남성 여성 가릴 것 없이 추앙하는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계십니다. 또한 이델라브힘을 상징하는 순백. 황자 전하의 눈부신 은발은 그것을 떠올리게 하죠. 거기에다 역대 황제들과 비견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성력의 양까지. 감이 좀 잡히십니까? 빛의 신을 모시는, 성력을 다루는 나라에서 황자 전하의 모습이 어떻게 비추어질지?]

그 당시에는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었다. 하지만 로젤린은 현재 그 뜻을 절절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의 미의식을 다 깨우치지 못한 그녀의 눈에도 2황자는 정신이 아득하리만큼 아름다웠다. 깊고 선명한 물색의 눈동자. 곧게 뻗은 콧날. 부드러운 입매와 도자기 인형 같은 투명하고 하얀 피부, 기사들과 비교해 보아도 흠이 없는 강건하게 단련된 몸까지.

리카르디스의 새하얀 옷과 머리칼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햇살마저도 그의 곁을 비추는 것 같은, 그런 기이한 풍경이었다.

칼릭스, 레이몬드, 백작가의 하인들과 하얀밤 기사단의 단원들까지. 로젤린은 적지 않은 수의 남자들을 보아 왔지만, 이렇게까지 본능에 호소하는 지독한 아름다움은 처음이었다. 그래서인가? 그의 겉모습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심장이 이렇게 뛴 것이었나? 조금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 이외의 이유를 가늠할 수 없었기에 그냥 수긍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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