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평소보다 더 살벌한걸. 어째 드레스 한 벌이 없어.”
“칼릭스가 내 옷 다 유행 지났다고 수도 가서 사 입으랬어. 레이몬드보고 같이 가 달라고 하래.”
그 자식 나한테 다 떠넘기고 있잖아? 레이몬드는 속으로 칼릭스를 조금 욕했다. 뭐 그래도 제 동생 같은 아이를 위해서니, 휴일 정도는 반납하고 드레스 샵을 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로젤린은 제 방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침대에 털썩 앉았다. 레이몬드는 정리하던 중, 제복 한 벌을 그녀에게 건네었다.
“자, 이거 받아. 일단 옷부터 갈아입고 나와. 아니! 나 나가고 벗어!”
옷을 갈아입으라는 말에 로젤린이 단추를 풀기 시작하자 레이몬드가 황급하게 눈을 가렸다. 제복을 입고 나온 로젤린은 한동안 레이몬드에게 잔소리를 들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함부로 옷 벗고 막 그러면 안 돼 알겠어? 어? 빨리 이 오라버니 앞에서 약속해. 새끼손가락. 도장.
로젤린은 한동안 계속된 잔소리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꼬박꼬박 알겠다고 대답했다. 기숙사 복도는 넓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레이몬드는 쭉 길을 걸으며 그녀에게 몇 가지를 일러주었다.
“단장실에 가서 복귀했다고 알리는 게 우선이야. 서임식까지는 시간이 있으니까 기사단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좀 봐야 할 것 같고…… 아, 그리고 내일 상급 기사로 정식 임명된 후에는 수습 기사 몇 명이 붙을 거야. 최대 다섯 명까지. 네 가르침을 받고 싶어 하는 수습 기사들이 지원하면 그중에서 뽑으면 돼. 자잘한 업무나 심부름 정도는 시킬 수 있는데, 시간 내서 돌봐 줘야 하는 게 좀 힘들긴 하지. 네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뽑아. 예식 순서랑 언약문은 외웠어?”
“응.”
“대단한걸, 잘했어. 그리고 로젤린 너…… 기억 잃은 건…… 음…… 어떻게 하기로 했어? 말해도 된대?”
“응.”
칼릭스는 고뇌했다. 말하자니 로젤린에게 불이익이 갈 것 같고, 말을 안 하자니 그녀의 자유분방한 행동이 납득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느 정도의 행동이 다듬어졌다고는 하나, 로젤린의 예전 모습을 알던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눈치챌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통제를 벗어나 이상한 소문이 일파만파 퍼지기 전에 미리 다른 수를 차단해야 했다.
로젤린의 병명은 기억상실. 하지만 기사단 업무를 보는 것에 지장은 없을 것이며, 기억을 잃었음에도 남아 있는 2황자에 대한 충심으로 기사단에 복귀하다. 그것이 로젤린의 이야기였다.
로젤린은 레이몬드의 안내를 받아 단장실에 도착했다. 문 앞에 수습 기사 두 명이 서 있다가 레이몬드의 얼굴을 보고 문을 열었다. 로젤린은 탁자에서 서류를 살피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날카롭게 빛나는 눈, 깊게 패인 주름. 관록이 느껴지는 외모였다. 붉은 머리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앞으로 이동했다. 레이몬드와 로젤린은 오른손으로 주먹을 가볍게 쥐고 손등이 보이도록 심장 위에 올려놓았다.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하얀밤 기사단에 막 복귀했습니다.”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큰뿔산양 레이몬드. 기사단장님을 뵙습니다.”
기사단장, 스타스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로 주먹을 심장 위에 올려놓았다.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그대에게. 몸은 좀 어떤가, 로젤린 경.”
레이몬드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로젤린은 양손을 등허리에서 맞잡았다.
“괜찮습니다.”
“그래 보이는군. 다행이야. 앞으로도 그 운을 전하를 위해 써 주길 바라네.”
“알겠습니다.”
“이번 상급 기사로 승급한 것 축하하네. 경이 부지런히 노력한 덕이지.”
“감사합니다.”
“임명식에 관해 궁금한 점이 있는가?”
“없습니다.”
레이몬드는 칼같이 오고가는 그들의 대화를 주시하다가 큼 흠, 목을 풀고 끼어들었다. 원래 말이 긴 편이 아님을 알더라도, 지금의 로젤린은 기사단장에게 시비를 거는 것 같았다. 짧게 끊어지는 말들이 퉁명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한 가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단장님.”
“말해 보게.”
“……실은, 로젤린 경의 몸은 다행스럽게도 완벽하게 회복되었습니다만…… 그…… 마음이 아직 조금 아픈지라…….”
스타스는 의문이 가득한 낯빛으로 레이몬드를 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이 부단장 부관은?
“그게 무슨 소리지 레이몬드 경? 마음이 아프다니. 물론 심정은 이해하네. 나 또한 그대들처럼 동료를 잃었으니. 그러나 그 슬픔과 분노를 딛고 일어서는 게 우리들의 일이야.”
“…….”
너무 돌려 말했나…… 레이몬드는 입가에 띄우고 있던 미소를 한순간에 지웠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로젤린 경의 기억에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기억상실이라고 합니다.”
“……?”
언제나 무표정을 고수하는 기사단장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잔뜩 올라왔다. 아주 희귀한 광경이었다.
“대부분의 기억이 소실되었음에도 2황자 전하를 지키고자 하는 하얀밤의 맹세는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지식의 습득 속도가 매우 빠릅니다. 그녀가 임무를 진행하기에 부적합하다고 생각되지 않아, 그대로 복귀 명령을 진행했습니다. 곧 기억이 돌아올 것이라는 의사의 소견서도 있습니다.”
스타스는 레이몬드에게서 소견서를 받아, 찬찬히 읽어 내렸다. 다른 내용은 다 흐릿한데 [기억상실] 그 단어만 아주 생생하고 뚜렷했다.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은 짧은 대답들이 이것으로부터 기인했던 건가.
그는 자신의 턱을 매만지면서 소견서를 한번 그리고 로젤린을 한번. 계속 번갈아 쳐다봤다. 뭔가 1황자파의 계략이 아닐까 잠시 생각해 봤으나, 그녀의 올곧고 일관된 태도는 그 누가 보아도 2황자에게 진실 된 사람이란 것을 확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1황자파의 붉은수레바퀴 가문이라는 그 출신만 아니었더라도 더 아꼈을 것이다.
검은 머리의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 걸 빤히 들으면서도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었다. 조금은 지루해 보이기까지 했다. 예전의 로젤린은 관대하고 담대했지만 이런 거짓말로 제 잇속을 챙기는 능수능란한 자는 아니었다. 그녀의 성품을 잘 아는 스타스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허황된 보고가 한없이 진실에 가깝다는 사실을.
스타스는 얼굴에 복잡한 심정이 떠올라 있었다. 한참을 침묵을 지키던 그가 입을 힘겹게 열었다.
“……몸은…… 좀 어떤가, 로젤린 경.”
아까와 같은 물음이었지만, 담긴 뜻은 조금 달랐다. 로젤린은 허리를 곧게 세우며 똑바로 스타스를 쳐다봤다.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스타스는 조금 입가를 달싹이며 망설이다 그녀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레이몬드는 단장실에 남아 잠시간 그와 더 얘기를 나누었다.
단장실 밖에 서 있던 두 명의 수습 기사들이 그녀의 얼굴을 흘끗흘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하얀밤 기사단 내에서 유명인사였다. 1황자를 비호하는 가문의 장녀,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에스터. 자신을 향한 여러 감정이 담긴 시선을 받으며 그녀는 미소를 띠었다.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칼릭스에게 미리 들어서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얀밤 기사단에 있는 인간들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세력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기사단장이라는 자도 마찬가지 일 텐데. 무뚝뚝한 말투와 표정으로도 그의 걱정은 감춰지지 않았다. 문 안쪽에서 레이몬드와 스타스가 두런두런 얘기를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다. 로젤린은 문 밖에 있었지만 그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청각 능력이 뛰어나다는 무엇의 세포를 조금 빌려 왔던 덕이었다.
“……로젤린 경이…….”
“그렇다면…….”
로젤린이 떠난 후에도 기사단장의 걱정은 끊이지 않았다. 레이몬드가 질려할 정도였다. 로젤린은 레이몬드를 기다리며 벽에 머리를 툭 기대었다.
안타깝다, 로젤린. 검은 머리의 인간. 그대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 *
로젤린은 미간에 주름을 잡고 불편한 심기를 내보였다. 옆에서 레이몬드가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녀는 여기저기서 찔러 대는 시선을 느꼈다. 지나가는 인간들 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부러 멀리서부터 찾아와서 제 얼굴과 생사를 확인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로젤린의 인내심이 슬슬 한계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그것’은 눈에 띄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생물들은 수년의, 수백의 시간과 몇 세대를 거쳐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하며 때로는 도태되기도 한다. 근처에 있는 생물을 흉내 내어 무리에 섞이고 위협으로부터 도망치기도 했다. ‘그것’의 의태 능력은 이러한 환경에서 발달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니 사람들의 시선이 로젤린에게 집중되고 있는 이 순간은 그녀를 초조한 기분으로 몰아넣는 최적의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까지 바라볼 필요가 있는 건가? 마수의 모습도 아니고, 눈이 하나 없는 것도 아니고, 팔이 한 짝 어떻게 된 것도 아닌,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형태인데? 혹시 나도 모르게 의태가 풀렸나? 그녀는 제 팔다리를 확인한 후, 제 등을 보기 위해 낑낑거렸다.
“뭐해 로젤린?”
“나 어디 이상해?”
왜 계속 쳐다보는 거지? 레이몬드는 뱅글뱅글 도는 그녀의 모습을 쭉 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을음 하나 묻지 않은 완벽한 옷차림이었다.
“네가 좋은 아이기는 하지만 로젤린. 그렇다고 해도 그게 모든 사람이 널 좋아해줄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거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이상해.”
“좀 이상하고 어렵지? 인간관계가 원래 그래.”
붉은수레바퀴의 페르탄 에스터 백작. 1황자를 비호하며 전선에서 수많은 공을 세워 백작위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작위를 보유하고 있는 자. 한마디로 일라베니아에서도 제법 괜찮은 입김과 힘을 가지고 있는 가문이었다. 그 가문의 딸이 어느 날 2황자의 기사단에 들어오더니 빠른 시간 안에 수습 기간을 마치고 하급 기사로 승급했다. 기사단장은 그녀를 조용히 지켜볼지언정 차별하거나 저어할 사람이 아니었고, 부단장은 다른 세력의 자식임에도 2황자를 지키고자 하는 그녀의 마음을 갸륵하게 여기며 그녀를 몹시 아꼈다.
하지만 그 모습이 다른 기사들이 보기에 그다지 좋은 광경이 아니었음이 문제였다. 어린 주제에. 여자 주제에, 1황자 파 주제에, 그다지 실력도 좋지 않으면서! 주제도 수치도 모르는 자. 그들에게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에스터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사냥 대회에서의 전투로 시체조차 소실되어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로젤린을 싫어하는 이들 또한 그때만큼은 애도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