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로젤린은 그 한계에 부딪히고도 좌절하지 않았고 노력했다. 누구보다 많은 시간을 수련했으며 누구보다도 많이 공부했다. 장점을 갈고 닦고, 약점에서는 눈을 돌리지 않으려 했다. 여자기사라고 은연중에 무시하던 이들도 그녀가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제 시선을 점차 바꿀 정도로.
상급 기사로 승급했다는 소식에, 레이몬드는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그녀의 노력이, 그녀의 마음이 헛되지 않았구나하며 기뻐했다. 그녀의 승급 소식을 전해 준 부단장에게 입을 맞추려다가 한 대 맞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포기할 수 없었다.
로젤린이 바라 왔던 것, 그녀가 지키고자 했던 것. 지금 로젤린이 잊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었다. 어렵사리 온 기회를 놓치게 할 수 없었다. 레이몬드는 그녀에게 검을 건네받았다.
그는 검신을 똑바로 세워 잡았다. 넓은 바스타드 소드의 검신이 그의 얼굴을 반쯤 가렸다. 로젤린은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너는 지금 검도 하나 제대로 잡지 못하는데…… 기사단에 돌아온다고 뭘 할 수나 있을까 로젤린?”
“그래도…….”
“그래도?”
“가야해.”
“왜?”
레이몬드는 얼굴 앞에 있던 검을 모로 세웠다. 날카롭게 검 날 너머로 로젤린이 두 눈을 빛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얀 밤의 주인을 지키기 위해서.”
레이몬드는 씨익 웃었다. 기억을 잃었다고 하더니 가장 중요한 것은 기억하고 있다. 그녀다웠다. 로젤린은 언제 어디서든 어떤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것이 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발휘되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레이몬드는 하하 웃으며 그녀와 확 거리를 벌렸다. 칼릭스도 레이몬드가 뭘 하려는 건지 눈치 채고 조금 물러섰다.
“잘 봐, 로젤린. 잘 기억해. 기억해야 해.”
레이몬드는 잠시간 눈을 감더니 움직임과 함께 눈을 떴다. 칼릭스만큼이나 눈에 띄는 장신이었지만, 그는 매우 재빨랐다. 정확했으며 물이 흐르는 것 같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일라베니아 제국 검법의 가장 기본이 되는 동작들이었다. 로젤린은 그의 모습 하나하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잘 봐, 잘 기억해야 해. 그의 말처럼 그녀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보고 있었다. 레이몬드의 움직임에 따라 녹색의 눈동자가 휙휙 움직였다.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이었다.
찌르고, 베고, 막고. 검 끝은 하늘을 향했다가, 허공을 가르고 땅을 스치기도 했다. 검이 지나는 공간마다 크게 바람이 불었다. 제법 떨어져 있는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검의 날카로움이 생생했다.
“후.”
레이몬드는 처음 시작할 때처럼 검을 제 얼굴 앞에 세우며 움직임을 멈췄다. 진지하던 얼굴에 웃음기가 돌아올 쯤엔 로젤린도 뻑뻑한 눈을 깜박일 수 있었다.
“끝! 이것만 다 할 줄 알아도 반은 간 거야. 사실 너는 몸보다는 머리를 쓰는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나머지는 차근차근 배우는 걸로 하고…….”
“한 번 더.”
“응?”
로젤린은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귀찮게 말을 두 번하게 만들고 난리야. 딱 그 표정이었다.
“한 번 더.”
레이몬드는 어……엇? 그, 그래 하면서 허둥지둥 두 번째로 검법 시연을 펼쳤다. 그는 어린 시절 막 검을 배우던 때를 떠올렸다. 하루에도 몇백 번씩 연습하고는 했었다. 그때는 지겨워 미칠 것 같고 힘들기만 했는데 지금에 와서 보면 그것도 다 추억이었다. 그가 속으로 허헛 웃으며 두 번째 시연을 끝내니,
“한 번 더.”
“……나…… 왜 좀 불안하지 로젤린……?”
레이몬드는 과거에 힘들었던 그 추억이 현실이 될 때까지 한 번 더, 한 번 더, 한 번 더. 라는 소리를 끝없이 들어야만 했다. 그의 검은 몇 시간째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밤이 찾아와 검날에 달빛이 반짝, 반짝 비칠 때까지.
“청구할 거야…… 검술 교사 비용 청구하고 말거야!”
“해. 칼릭스 돈 많아.”
“젠장! 그건 그래!”
“…….”
칼릭스는 그들의 대화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레이몬드는 헉헉거리면서 소파에 대충 널브러졌다. 목 끝까지 채우고 있었던 제복은 단추 두어 개를 제외하고는 전부 풀려 있었다. 예전 로젤린이 보았다면 한소리 했을 복장 상태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저녁이라도 들고 가시죠, 레이몬드 경.”
레이몬드는 손을 휘휘 저었다. 대답할 힘도 없는 모양이었다.
“저도 이제 슬슬 복귀해야 해서, 휴. 권유는 감사하지만 일정이 바쁘군요. 그런데 오늘 한 고생이 뭔가 소용이 있겠습니까? 몸을 직접 움직인 것도 아니고 그냥 보기만 했는데?”
칼릭스는 비죽 웃었다.
“누님께서는 기억력이 아주 좋으시거든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아, 2주 뒤에 서임식이 있습니다. 부디 그때까지…… 그…… 로젤린의 말투 좀 어떻게…….”
“…….”
“상급 기사로 임명되는 자들의 서임식은 2황자 전하께서 직접 진행하실 예정입니다. 그때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경을 상급 기사로 임명한다! 고 선언하실 텐데 응. 그래. 하는 사태는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상상만 해도 오싹 하군요.”
칼릭스도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2주일. 검술과 예법을 익혀야 하는 시간이 고작 2주밖에 남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바쁜 짬을 내서 겨우 찾아온 것이니 아마 다음번은 황궁에서 만나게 될 거라 그녀에게 말했다. 로젤린은 “응, 그래.”라고 대답했다. 그들의 등골은 다시금 서늘해졌다.
레이몬드는 남매의 배웅을 받고 저택을 곧 떠났다. 로젤린은 자신의 방에 걸려 있던 레이피어를 들고 연무장으로 다시 내려왔다. 칼릭스와 하녀가 식사 시간이라 알렸음에도 그녀는 연무장 중앙에 앉아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았다.
눈을 감은 그녀의 시야 너머로 흰 제복을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갈색 머리를 휘날리며 검을 휘둘렀다. 몸의 중심을 찾고, 왼쪽, 오른쪽, 어느 방향으로도 움직일 수 있게 경계하며, 부드럽지만 강하게. 그는 로젤린의 앞에서 끝없이 움직였다. 그녀는 한참 그 모습을 떠올렸다. 부푼 근육이 제복 위로 씰룩이는 것이 보였다. 그의 머리카락을 타고 땀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바람을 가르는 검의 환상이 그녀를 여러 번 베고 지나갔다.
로젤린은 검을 뽑았다. 그의 바스타드 소드와는 형태도 무게도 다른 검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칼릭스는 가만히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레이몬드가 몇 시간을 보여 준 덕에 그녀는 움직이는 순서와 형태를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많이 어설펐다. 검을 처음 잡아 봤을 뿐더러 파지법조차 엉망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형태가 조금씩 다듬어지기 시작했다.
체격이 확연히 다른 그녀가 레이몬드를 따라 하기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따랐다. 검을 몇 번 휘두른 그녀는 그걸 깨달은 것처럼 보였다. 수없이 검을 휘두르는 동안 본능적으로 알게 된 것일지도 몰랐다. 맹목적으로 레이몬드의 움직임을 따라가지는 않았지만, 그 동작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베는 것, 찌르는 것, 막는 것, 공격하는 것, 지키는 것, 몸의 중심을 견고히 하는 것.
그녀는 레이몬드의 움직임에서 자신을 찾아 갔다. 로젤린의 체격, 현재의 이 신체가 지닌 힘, 검의 길이. 모든 것을 고려한 합리적이고도 아주 영리한 형태였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수년을 검을 휘둘러 온 사람 같은 뛰어난 검술 실력을 내보일 수 있었다.
레이몬드가 검법을 끝낼 때처럼 그녀는 검을 자신의 얼굴 앞에 세웠다. 눈을 감은 로젤린의 뒤로 하얀 달빛이 비추고 있었다. 굽이치는 검은 머리가 휘날리며 밤하늘에 녹아들었다.
3
어둠의 신 크레안 티다니온을 몰아내고 세상에 빛을 가지고 온 이델라브힘의 나라. 일라베니아 신성 제국. 대륙 구석구석에 널리 퍼진 위명에 걸맞은 크기였다. 눈이 부실정도로 찬란하게 빛나는 백색의 성은, 아무리 멀리 내다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게 그리고 아주 높게 펼쳐져 있었다.
로젤린은 마차의 창을 통해 아름다운 성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을 감상했다. 하얗다. 많다. 일정한 규칙으로 만들어져 있는 이 높은 성들은 자신이 살았던 숲과는 매우 다른 성질을 띠고 있었다. 고요하고 적막한, 아름다운 이곳은 [좋다, 싫다] 둘 중에 [싫다] 쪽에 가까웠다. 그녀의 본능이 울렁거렸다.
항상 로젤린의 곁을 지키던 칼릭스는 지금 그녀의 곁에 없었다. 수도 티가드로 떠난 것은 오직 로젤린뿐이었다. 그는 백작 대리로써 붉은수레바퀴령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칼릭스의 끝없는 잔소리와 걱정이 덕지덕지 묻은 시선의 기억만이 그녀에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안 됩니다. 하시면 안 됩니다. 그건 안 됩니다. 이건 더 안 됩니다. 그건 정말로 하면 큰일 납니다, 안 됩니다. 뭘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게 많은지. 인간들은 고생을 사서 하는 종족이었다.
“로젤린!”
마차는 황성의 문을 지나고도 한참을 달렸다. 로젤린은 내리자마자 저 멀리서 달려오는 레이몬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레이몬드는 헉헉 숨을 몰아쉬며 그녀 앞에 멈춰 섰다.
“오랜만입니다 레이몬드 경.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나한테는 편하게 해도 돼, 로젤린.”
레이몬드는 그녀의 모습에서 누군가의 노력을 엿봤다. 눈물이 찔끔 날 뻔했다. 레이몬드는 마차에서 그녀의 짐을 같이 내렸다. 레이몬드 휘하의 수습 기사들도 그녀의 짐을 들고 기숙사로 날랐다. 깔끔하고 커다란 건물이었다. 아직 정식 서임을 받지 않았지만, 상급 기사로 승급했기 때문에 넓고 좋은 방으로 옮겨졌다고 했다. 그 넓은 곳에 채워 넣을 짐은 많지 않았다. 순백의 제복 몇 벌, 검 몇 자루, 평상복과 생활용품들. 그녀가 대충 짐을 던져 놓자 레이몬드가 차곡차곡 꺼내어 정리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