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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없는 밤-8화 (8/220)

8화.

“사람을 함부로 때리면…… 안 된다. 사람을 함부로 죽이면 안 된다…… 후…… 복창하세요…….”

“사람을 함부로 때리면 안 된다. 사람을 함부로 죽이면 안 된다.”

“잘 하셨습니다. 아까 누님이 때려눕힌 분은 큰뿔산양 후작가의 레이몬드 경이십니다. 누님과 같이 하얀밤 기사단에 적을 두고 계시고, 사적으로는 친구입니다.”

“때리면 안 돼?”

“안됩니다.”

“알았어.”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칼릭스는 손으로 얼굴을 몇 번 세게 쓸며 괴로운 소리를 냈다. 칼릭스는 누군가가 흉기를 들거나 살의를 비친다면 패도 되고 죽여도 된다고 말을 덧붙였다. 이 말을 하지 않으면 전쟁터에서도 얌전히 화살을 맞아 주고 있을 것 같았다.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함부로 때리면, 아주 아주 무서운 곳에 갑니다. 그곳에는 정말 무서운 아저씨가 있지요.”

“무서운 곳…….”

로젤린이 침을 꼴깍 삼켰다. 부족한 상상력으로나마 열심히 무서운 아저씨와 무서운 곳을 그려 보는 것 같았다.

곧 레이몬드가 깨어났다고 하인이 알려 왔다. 손님방에 도착하니 그는 상반신을 어정쩡하게 일으킨 상태로 앉아 있었다. 이 집에 들어올 때만 해도 단정하던 레이몬드의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다. 칼릭스는 벌써 피곤이 몰려왔다. 뭐라고 변명을 해야 좋을지 한참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노라니 로젤린이 대뜸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

“…….”

로젤린은 전혀 안 미안한 얼굴로 유감을 표했다. 칼릭스는 머리가 지끈거리며 두통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레이몬드는 침대에 앉아 멍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방을 천천히 둘러보더니 마지막으론 제 옷을 들어 배에 새겨진 폭력의 흔적을 확인했다.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가는 모양이었다.

“로젤린?”

“그래.”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에스터?“

“응.”

“아까 이 오라버니를 때린 게 너라고 로젤린?”

“응. 미안.”

“어…… 음…… 빠른 사과 아주 보기 좋아…… 좋은데……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의 시선 처리에서 당황스러움이 느껴졌다. 로젤린은 침대 옆 의자를 끌어와 철퍽 앉고 레이몬드를 위해 차려 놓은 다과를 먹기 시작했다. 레이몬드는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그 모습을 쳐다보다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칼릭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칼릭스 경…… 혹시…… 우리 로젤린의…….”

레이몬드는 풍부한 손짓을 하며 말을 골랐다. 손이 머리쯤에서 뱅글뱅글 돌고 있어서 그가 로젤린의 상태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적나라한 손짓과는 별개로 그는 심사숙고하여 말을 내뱉었다.

“로젤린의 컨디션이 예전 같지 않다던가……?”

여태껏 들은 표현 중에 제일 점잖은 것이었다. 누님 어찌하여 저에게 이런 고난을 남겨 주고 가셨습니까. 칼릭스는 제 참담한 기분을 가다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누님의…… 컨디션이…… 약간…… 예전 같지 않으십니다…….”

레이몬드는 복잡한 얼굴로 잠시 골똘히 생각했다. 그는 까치집이 된 머리를 더 헤집으며 엉망으로 만들더니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로젤린이 물끄러미 시선만 옮기자 그녀의 손을 잡아 일어나게 했다.

“이번에는 때리면 안 된다, 로젤린.”

“응.”

그리고 와락 껴안았다. 로젤린은 조금 답답한 듯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교육이 효과가 있었던지 냅다 주먹을 쓰지는 않았다. 칼릭스는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쯧 혀를 찼다. 괜히 때리면 안 된다고 했나. 시집도 안간 남의 귀한 집 딸을 덥석덥석 안다니. 영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딱 한번만 눈감아 주기로 했다

“잘 살아 돌아 왔다.”

레이몬드의 얼굴, 그의 목소리에서 깊이 쌓인 감정들이 녹아내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니.

* * *

“예상 했던 대로 검은달 놈들이더라.”

레이몬드는 제 옷을 들어 타격당한 부분을 쳐다보며 이야기했다. 새파랗다 못해 거무죽죽한 멍이 들어 있어 흠칫 몸을 떨며 놀라긴 했으나, 곧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시 옷을 내렸다.

“검은달?”

로젤린의 목소리는 높낮이가 없어서 의문형이라고 알기 힘들었다. 레이몬드는 측은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것도 다 잊은 거였나…… 음. 검은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 신성 제국 일라베니아와 항상 사이가 안 좋았던 왕국 ‘발타’의 마력 숭배 집단이지.”

“마력?”

“성력과 반대의, 상극의, 불길한 힘을 말하는 거야. 그놈들은 어둠과 혼돈의 신인 크레안 티다니온이 진정한 신이라고 생각하고 빛과 질서의 신 이델라브힘은 거짓된 존재라고 주장하는 광신도 집단이야. 2황자 전하께서는 역대 황제들을 넘는 성력을 지니고 계셔서 항상 검은달 놈들이 노리고 있지. 암살 시도가 스물한 번을 넘어갔을 때, 하얀밤이라는 2황자 전하의 특수 호위 기사단이 창설 되었어. 그리고 그게 우리야. 하얀밤 기사단의 로젤린 경.”

로젤린은 흠, 하고 보기 드물게 반응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다리를 쫙 벌리고 있다가 칼릭스가 “누님…… 다리 좀…….” 하고 그녀의 자세를 바꿀 것을 청하자 다리를 꼬았다. 그녀의 한쪽 다리가 까닥거리며 발짓하고 있었다. 첩첩산중이었다. 칼릭스의 깊은 한숨 소리에 레이몬드가 웃었다.

“이번 사냥 대회의 사건에 하얀밤의 기사단원들이 많이 사망했어. 심지어는…… 음…… 부단장님도 돌아가셨지. 네가 부단장님을 많이 따랐어, 로젤린. 혹시 기억나?”

“아니.”

“……기억 못하는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네. 많이 슬퍼했을 거야 너. 음, 아무튼 간에 새로운 부단장으로 전 부단장의 부관인 나단 경이 새로 임명되셨고, 크으…… 그리고 무려 이 몸이 부단장의 새로운 부관이 되었단 말씀.”

레이몬드는 허리에 두 손을 떡하니 올려놓고 잔뜩 뽐냈다. 로젤린은 그 모습을 보다가 “좋아?”라고 물었고 레이몬드는 그 물음에 스르륵 무너졌다.

“아니…… 안 좋아…… 누구는 승진이라고 부럽다고 하지만…… 그 부단장 밑에서 이리저리 구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눈앞이 깜깜하다…… 아, 참. 그리고 너도 상급 기사로 승급했어. 전에 치렀던 승급시험 점수도 좋았고 플러스로 죽은 동료들 중에 상급 기사들이 많았지. 너도 이제 2황자님을 직접 호위하는 인원에 들어가.”

“그래?”

태평한 로젤린을 대신하여 칼릭스가 깜짝 놀랐다. 과거에 그녀와 했던 대화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를 지키기 위해 왔다.]

[하얀 밤의 주인.]

전의 말대로 된 셈이었다. 그녀가 정말 하얀 밤의 주인을 지키는 인원 안에 들어가게 된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기사단장이 그녀를 상급 기사로 승급시켜 줬다는 점이었다. 1황자 파에 속하는 그녀의 가문을 알고 있음에도 더욱이 한 번 호위 임무를 실패한 적이 있는 자에게도 기회가 돌아갈 정도로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인가? 칼릭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생각보다…….”

“그렇게 됐습니다, 칼릭스 경.”

“……그렇군요. 아니 잠시만. 레이몬드 경. 문제는 그게 아닐 텐데요.”

“아.”

“…….”

칼릭스와 레이몬드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 둘의 시선 끝에는 여전히 다리를 꼰 채로 발을 까닥거리고 있는 로젤린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들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상급 기사로 승급하기 전에, 일라베니아의 황실로 돌아가기 전에, 아주 시급한 문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로젤린을 끌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로젤린은 그들의 손을 잡고 쭐레쭐레 따라갔다. 하녀가 로젤린의 긴 머리를 하나로 묶자, 레이몬드가 검을 들고 그녀 앞에 다가갔다.

“검, 뽑아서 들어봐 로젤린.”

레이몬드는 제 심장이 하도 쿵쿵 뛰어서 입 밖으로 나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제발, 제발…… 검술은 기억하고 있겠지?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칼릭스 또한 그 광경을 보며 침을 꿀떡꿀떡 삼켰다. 두 남자의 뜨거운 시선 아래, 그녀는 내밀어진 검을 뽑았다. 스르릉, 검집을 스치는 날이 예리하게 울었다.

“……크윽…….”

“…….”

칼릭스는 차마 못 보겠다는 듯,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레이몬드는 처참하게 무너져 연무장 바닥에 기대듯이 쓰러졌다. 검술 이전에 파지법조차 엉망이었다. 검이라고는 생전 처음 잡아보는 자의 것이었다. 로젤린은 눈을 빛내며 검을 이리저리 살폈다. 장난감을 선물 받은 아이 같은 반응이었다.

“……로젤린…… 귀여운 건 좋은데…… 크……흑…….”

“이거 내 거야?”

“아냐…… 그거 내 검이야…… 너는 무거워서 이거 못쓰는데……? 어? 안, 안 무거워 로젤린?”

로젤린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제 손끝으로 바스타드 소드를 들어 보였다. 레이몬드가 입을 떡 벌리는 모습을 보고 칼릭스가 급하게 말을 붙였다.

“누님께서는 회복하시는 동안 체력 단련을 중점적으로 하셨습니다!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검은 위험하다고 판단해서 체력 훈련을 평소보다 두 배, 아니 세 배 정도!”

“내가?”

“네! 누님께서 그러셨습니다!”

병가를 낸 기간 동안 하루 종일 먹고 자고 놀기만 했다. 자신의 기억과 다른 발언에 로젤린은 온 얼굴로 의아하다는 빛을 내보였지만, 칼릭스는 그녀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훈련을 했는지에 대해 상당한 시간을 소요하며 일장 연설했다. 레이몬드는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걸? 로젤린 너는 힘이 약한 게 좀 흠이었는데 쉬는 동안 잘 보완했구나. 어쩐지 아까 내 명치 때릴 때부터 범상치가 않더라니. 하하 오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빛의 강 너머에서 막 이리오라고 하시더라고.”

“왜 안 갔어?”

“아니야 로젤린…… 거기 가면 큰일나…….”

레이몬드는 시답잖은 농담을 몇 번 주고받다가, 곧 진지한 얼굴로 돌아왔다. 로젤린은 객관적으로 괜찮은 기사였다. 힘보다는 기술과 지략을 내세우는 여자 기사들 중에서는 이미 적수를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또한 그녀 특유의 성실함을 높게 평가받아서 짧은 수습 기사 기간을 거치고 곧바로 하급 기사로 승급했었다. 하지만 하급 기사들은 수습 기사들과 달리 실력이 검증된 자들이 많았다. 조금 뛰어난 기술만으로는 그들의 실력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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