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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없는 밤-7화 (7/220)

7화.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넓은 정원. 칼릭스는 창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원사의 솜씨가 빛나는 색색의 화원에서 사람들이 산책 중이었다. 검은 머리를 하나로 묶고 흰 셔츠, 회색 바지, 서스펜더를 착용한 여자가 있었다. 귀족가의 영애가 할 만한 복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로젤린은 전부터 드레스를 거추장스러워했다. 몸을 움직이는 게 직업인 그녀에게는 고역이었을 것이다.

화단을 산책하는 그녀의 뒤로 하녀들이 졸졸 따라다녔다. 한 명은 아가씨의 피부를 위해 양산을 들고, 한 명은 아가씨가 추울까 봐 숄을 들고 있었다. 또 다른 한 명은 아가씨가 더울까 봐 부채를 들고 다급히 뒤를 쫓았으며 아가씨가 배고플까 봐 간식 바구니를 들고 있는 하녀도 있었다. 칼릭스와 비슷한 연배의 그녀들은 예전부터 로젤린을 잘 따랐다. 그런 그들에게는 로젤린의 공백이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칼릭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가씨 이것 보세요, 꽃이 아주 예쁘게 피었네요.”

“네가 더 예뻐.”

어머, 어머! 하녀들은 꺄르륵 소리를 내며 즐거워했다. 칼릭스는 전에도 이 풍경을 본 적이 있다. 꽃 피어오르는 봄날, 밖으로 놀러 가고 싶어 하는 어린 하녀들을 위해서 그다지 관심도 없는 나들이를 가셨더랬다. 하녀들이 꽃이 너무 곱다 예쁘다 조잘대면,

[네가 더 예쁘구나, 일리야.]

하고 엄한 마음 훔치고 있는 것이 딱 로젤린이었다. 하녀들 또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제 아가씨의 행동이 과거와 흡사함에 놀라워했다.

“아가씨는 어쩜, 기억을 못하셔도 똑같으시네요!”

“역시 아가씨는 아가씨예요!”

그녀들의 말이 칼릭스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저건 로젤린이 아니었다. 저건 로젤린이 아닌데. 저건 내 누이가 아닌데. 아니었는데.

칼릭스는 복잡한 마음으로 알터의 보고서를 팔락였다. 그림자에 관한 서류였다. 습관적으로 계속 들여다봤더니 이제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줄줄이 외울 수 있을 정도였다.

[지키러왔다.]

무엇을?

[그를 지키기 위해 왔다.]

누구를!

[하얀 밤의 주인.]

완벽한 타인이었다. 로젤린의 껍데기를 쓰고 있는 단순한 괴물이었다. 그 말을 하기 전까지는. 하얀 밤의 주인을 지키겠다는 말을 하기 전까지는 단순히 제 누이의 탈을 쓴 무언가에 불과했는데…….

칼릭스는 그녀의 두 눈에서 무언가가 타오르며 불티가 튀어 오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의심의 의심, 갖은 고뇌를 한 끝에 완벽한 타인이라 규정지었더니 그 순간에 진정 제 누이와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제 아버지와 대립하면서까지도 지키고 싶어 했던 이름. 그 때문에 칼릭스는 검을 치워야만 했다.

순간 칼릭스는 ‘어쩌면,’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건 그녀가 보낸 것일지도 모른다. 죽음을 코앞에 둔 그녀의 최선의 선택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건 그녀가 바란 모습일지도 모른다.

칼릭스는 그 날, 집무실 바닥에 널브러진 첩자의 목을 베었다. 목뼈가 뒤틀려 죽은 이상한 모습에는 누구든 쉽게 의문을 가질 수 있으니.

[밤공기가 차갑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누님.]

그는 힘겹게 말하고서 첩자의 시체를 들고 방을 나섰다. 그 밤으로부터 2주가 흘렀다. 로젤린의 상처는 자국만 남고 거의 아물었다. 포크와 나이프도 더없이 능숙하게 사용했고 바닥에 떨어트린 음식을 주워 먹지도 않았다. 기억을 잃은 틈을 타 에델바이스가 제 딸의 드레스를 마구 사들여 입혔지만, 어느 날부터 그녀는 드레스를 입지 않았다. 셔츠와 바지, 종아리 바로 아래까지 오는 부츠까지. 에델바이스가 보고 통곡하던 옷차림새로 백작가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글자와 언어를 배웠다. 아직 부족하긴 하지만 빠른 속도였다. 마치 알고 있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잊고 있던 것을 차근차근 일깨우는 과정처럼 보이기도 했다.

화단을 구경하던 로젤린이 돌연 고개를 휙 돌렸다. 팔짱을 끼고 내려 보던 칼릭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손을 가슴까지 들어 올려 살짝 흔들었다. 칼릭스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얼떨떨하긴 했지만, 그 또한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로젤린은 살짝 입꼬리만 올려서 웃더니 다시 하녀들과 나란히 걸었다. 그 모습은 점점 작아졌고, 이윽고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괜찮으십니까?”

칼릭스의 뒤에 멀뚱히 서 있던 알터가 물어 왔다. 그가 묻는 것은 여러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도련님 당신은 괜찮으냐 또는 그녀를 그대로 두어도 괜찮으냐. 하지만 칼릭스는 온종일 로젤린만 생각하고 있었기에 후자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벽난로에 집어넣었다. 알터가 뜨악한 표정을 짓거나 말거나, 칼릭스는 부싯돌을 들고 탁탁, 솜씨 좋게 불을 붙였다. 알터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제 피, 땀, 눈물이 몽땅 재가 되게 생겼다.

“나는 착한 동생이거든.”

착한 칼릭스. 우리 칼. 착한 아이구나. 어릴 적 로젤린이 자주 해 주던 말이었다. 칼릭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누님의 바람이 진정 이것이었다면…….”

칼릭스의 눈동자에 막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의 일렁임이 비쳤다. 그것은 종이의 조각 하나, 잉크 한 방울 남기지 않게 타오르고도 멈추지 않고 너울거렸다.

“나는 따를 뿐이다.”

자욱한 검은 연기는 길을 따라 굴뚝 밖으로 빠져나갔다. 로젤린은 하늘 위로 올라가는 연기를 잠시간 쳐다보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도련님!”

뛰는 것 금지. 큰소리 금지. 경박한 말투 금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집사의 모범이 와장창 깨진 날이었다. 검술 수련을 하던 칼릭스는 급하게 달려오는 집사의 모습에서 무슨 일이 있음을 직감했다. 또한 그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것 까지도.

“큰뿔산양의 레이몬드 경께서 아가씨를 뵙고자 백작가를 방문하셨습니다!”

급한 일, 맞다. 젠장. 칼릭스는 땀투성이였지만 그걸 씻어 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겉옷을 걸쳐야만 했다. 로젤린이 기억상실에 걸렸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사람들뿐이었다. 내부적으로는 에델바이스가 제 딸의 혼삿길을 위해, 외부적으로는 현 하얀밤 기사 단원인 그녀의 직위가 위험할 것 같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얀밤 기사단의 단장은 항상 로젤린을 주시했다. 1황자파에 속하는 붉은수레바퀴 백작가. 헌데 그 장녀가 2황자의 기사단에 들어앉아 있으니 그 시선이 고울 리 만무했다. 한 달이 지나도록 그가 잠잠했던 것은 그녀의 부상이 심각하기도 했거니와 사냥 대회의 사건으로 그의 일정이 매우 바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수습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흘렀고 그녀의 병가 기간 또한 끝을 보이고 있었다.

큰뿔산양 레이몬드. 그는 로젤린의 몇 안 되는 친한 단원이었다. 개인적인 병문안 겸, 단장의 압박을 함께 들고 왔으리라. 하지만 상처 회복의 유무는 둘째치더라도 그녀의 복귀가 마땅히 미뤄져야만 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그녀는 이제 말은 곧잘 했지만, 반말과 존댓말의 차이를 잘 몰라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또한 예전 로젤린의 기억도 없는 상태였다.

급하게 본관에 들어서는 칼릭스를 따라 하녀와 하인들이 따라붙었다. 그들의 표정엔 초조함이 덕지덕지 붙어 있어 칼릭스는 조금 더 빨리 움직였다.

“도련님, 레이몬드 경께서 먼저 아가씨를 뵙겠다며 올라가셨어요!”

“안 막고 뭣들 했나 대체!”

“친구를 만나는데 무슨 허락이 필요하느냐며 무작정 올라가시는데, 귀한 집 자제분이셔서 차마 손도 못 대고…….”

칼릭스는 이를 악물고 뛰었다. 뒤에서 도련님, 도련님! 하는 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그녀의 방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문가에서 하녀들이 안절부절, 발을 동동 굴리고 있다가 칼릭스를 보고 왈칵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도련님, 도련님 도련님! 칼릭스는 평생 들을 도련님소리를 오늘 다 듣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언젠가를 떠올리게 했다. 로젤린이 제 스테이크를 손으로 쥐고 뜯고 있던…… 그…… 야생. 날것의 모습.

방 안에는 하얀밤 기사단의 제복을 입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큰뿔산양의 레이몬드. 익히 아는 자였다. 그런데 자세가 좀 이상했다. 천하를 호령하는 무장처럼 떡하니 서 있는 로젤린 앞에 두 무릎을 꿇고 바들바들 몸을 떨고 있었다.

“감히 어딜 만져. 죽고 싶나?”

그녀의 말투는 칼릭스와 많이 닮아 있었다. 요즘 뒤에서 몰래 제 모습을 지켜보더라니 그새 말투를 배웠구나 싶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녀가 말한 내용이 조금 이상했다. 만져? 뭘 만져? 칼릭스는 눈에 불을 켜고 레이몬드의 어깨를 확 잡았다.

“경, 이게 지금 무슨……? 무, 무슨 일이십니까? 레이몬드 경? 경?”

어깨를 잡을 때만 해도 서늘했던 칼릭스의 말투는 짧은 시간 안에 다양하게 변화했다. 추궁, 의문, 경악.

레이몬드의 새파래진 낯빛이 심각해보였다. 레이몬드는 파들파들 떨면서 칼릭스의 팔을 붙잡더니 끅 소리를 내며 실신했다. 쿵. 바닥이 울렸다. 어린 하녀가 놀라서 엉엉 울었고 저 멀리에서는 집사가 헐레벌떡 뛰어오는 중이었다. 로젤린은 옆 테이블에서 스콘에 잼을 바르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

아수라장이었다.

레이몬드는 손님방의 침대로 옮겨졌다. 제복을 벗겨 보니 명치에 새빨간 자국이 남아 있는데 조만간 크게 멍이 들 것 같았다. 칼릭스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 누이에게 우선 물었다. 그녀는 흘러내린 머리를 곱게 귀 뒤로 꽂더니 시큰둥한 얼굴로 밀크티를 마셨다.

“그거 아주, 아주 나쁜 놈이야.”

“……사람더러 그거라고 하시면 안 됩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녀의 수발을 담당하는 하녀에게 물어보니 레이몬드 경이 그녀를 보자마자 와락 껴안았다고 했다. 무사한 아가씨를 보고 기쁜 마음에 한 행동이었다고. 어디를 더듬거나 이상한 행위를 하지는 않았단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바로 전날. 순하고 착한 아가씨가 기억을 포함한 상식까지 모두 잃어버린 것이 몹시 걱정되었던 하녀들은,

[아가씨. 우리 아랫것들이 이렇게 아가씨를 꾸며 드리려고 가끔씩 아가씨를 만지게 되잖아요. 이런 것 말고, 모르는 사람이 아가씨를 만지려고 하거나, 쓰다듬으려고 하면 꼭 말씀하세요. 그 사람은 정말, 정말 나쁜 놈이거든요? 저희가 혼내 드릴게요]

[칼릭스는?]

[칼릭스 도련님은 괜찮아요. 하지만 처음 보는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잖아요? 그러면…….]

‘일단 패세요.’라고 말했단다. ‘수습은 칼릭스 도련님께서 하실 겁니다.’라고도 했단다.

칼릭스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들이 간과했던 것은 기억을 잃은 로젤린에게 가족과 고용인을 제외하면 전부 처음 보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로젤린과 함께 그녀의 방으로 갔다. 사람들을 다 물리고서야 교육은 시작되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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