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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없는 밤-4화 (4/220)

4화.

칼릭스가 상념에서 급하게 깨어났을 때는 그녀 또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는 듯이. 어두운 복도 한구석에서 로젤린의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칼릭스는 걸음을 옮겨 로젤린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어머니께서 돌아오셨어요. 같이 점심을 하자고 하십니다.”

로젤린이 반색했다. 분명 ‘어머니’가 아니라 ‘점심’이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으리라. 칼릭스가 손을 내밀자, 그녀는 손을 잡고 냉큼 일어났다.

“칼릭스, 같이 가자.”

‘같이 가자’ 인가.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참 대단한 학습 속도였다.

* * *

“괜찮은 겁니까?”

칼릭스의 보좌, 알터가 감흥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오찬에 가기 전, 로젤린은 잠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남자 두 명은 근처 가까운 응접실에서 대기했다. 알터는 탁자 위에 놓인 오셀로 판의 나무 조각을 뒤적이고 있었다. 게임 하자는 건가 싶었더니 흑색 말로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뭘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장녀가 실종되었는데, 그것도 몰라. 다쳤는데, 그것도 몰라. 돌아왔는데, 그것도 몰라. 심지어 당장은 밝힐 생각조차 없으시죠? 엄청 섭섭해하시겠는데요.”

붉은수레바퀴 백작 부인. 에델바이스.

그녀가 딸의 실종소식을 들은 것은 불과 이틀 전이었다. 6일간 실종이 되었을 때에도, 로젤린이 마른가시나무 백작령에서 치료를 받을 때에도, 또 붉은수레바퀴 백작가로 돌아왔음에도, 에델바이스는 어떠한 사실도 알지 못했다.

그녀는 에스터에서 제법 벗어난 바다가 보이는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별장에 머물렀다. 특별히 앓는 병은 없었지만, 툭하면 쓰러지고 툭하면 아파서 요양이라는 이름하에 일 년에 반 이상은 그곳에 있었다.

칼릭스는 얼마 전, 에델바이스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상황에서 제 누이가 실종되었고 백작가에서는 하얀 천을 준비하고 있노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로젤린을 찾으면 연락해야지, 살 수 있을 것 같으면 연락해야지, 집에 오면 연락해야지, 눈을 뜨면 연락해야지 하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삼일 전 겨우 연락해서 이틀 전에 소식이 닿았다.

물론 그 소식을 전하는 것도 그녀가 죽다 살아났다던가,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던가 하는 서술을 몽땅 빼먹은 채 [사냥 대회에서 조금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서 집에서 심신을 안정시키며 요양 중입니다.]라고 축약해서 보내야만 했다. 만약 있는 그대로 얘기했다간 그녀는 실신할게 분명했다.

“그것도 얘기 안하셨죠?”

“뭐.”

“아가씨 머리가 좀.”

칼릭스가 눈을 시퍼렇게 빛냈다. 머리가 뭐. 내 누이 머리가 뭐. 뭐. 이상한 단어가 하나라도 나왔다가는 요절을 내 버리겠다는 표정이었다.

“……머리가…… 좀…… 귀여워졌다는 거요.”

“…….”

칼릭스는 침묵했다. 알터는 그 침묵에서 긍정의 뜻을 읽어 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앞길이 천리만리였다.

로젤린은 곧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아직 군데군데 붕대를 감고 있기는 했지만 소매가 길어 거의 감춰졌다. 얼굴의 자잘한 생채기쯤은 기사단 일을 하면서 항상 달고 있던 것들과 큰 차이도 없었다. 산발인 머리도 하나로 모아 곱게 정리 되어 있었고, 드레스도 입었다. 오랜만에 보는 멀쩡한 모습이었다.

칼릭스와 알터의 시선이 그녀의 몸을 따라 쭉 내려와 드레스로 가려진 발치에 머물렀다. 눈치 빠른 하녀가 로젤린의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들은 반질반질한 구두코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음, 신발도 신었군.

“우리 아가씨 완전 멀쩡해 보이네요!”

칼릭스의 팔꿈치가 알터의 옆구리를 매섭게 강타했다. 알터가 억 소리 내며 쓰러졌다. 칼릭스는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짓밟고 로젤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가실까요, 누님. 어머니께서 기다리십니다.”

“그래, 칼릭스.”

일주일간의 변화는 놀라웠다. 짧게 단어를 끊어서 얘기하던 첫날과 달리 그녀는 놀라운 속도로 예전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여자 말투였다가, 남자 말투였다가, 존대를 했다가 반말을 했다가, 그날 들은 것에 따라 마구잡이로 변하긴 했지만 단어를 벗어나 문장을 구사하게 된 것만으로도 놀라운 발전이었다. 집사는 우리 가문에 전무후무한 천재가 나왔다며 입이 닳도록 칭찬했다. 칼릭스는 이 집안의 분위기가 정말 극성맞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도 아직 많이 부족했다. 막 입이 터서 들리는 말을 무작정 반복하는 아이와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단박에 이상함을 느낄 만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예전부터 말수가 적고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식사를 하는 짧은 시간 정도야 간단한 대답으로도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어머니가 말을 걸면요?”

“네, 또는 아니요.”

“식사 하실 때는요?”

“포크랑 나이프랑 스푼을 써야지.”

“훌륭하십니다.”

칼릭스는 로젤린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며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들어섰다. 빛이 부서지는 샹들리에, 백작 부인의 귀환에 잔뜩 솜씨를 부려 화려해진 만찬장. 로젤린은 그 광경을 휙휙 소리 나게 둘러보는 중이었다.

칼릭스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갈색 머리의 여인과 다정하게 포옹했다. 그녀 또한 몇 개월 만에 본 아들을 품에 얼싸 안았다. 그녀는 곧 로젤린도 꼭 껴안더니 얼굴을 붙잡고 여기저기 살피기 시작했다.

“우리 로즈. 얼굴이 너무 상했구나. 아직 많이 아프니? 괜찮은 거야?”

“네.”

“숙녀 얼굴에 이게 뭐니 정말. 그런 기사단 당장 관두라고 했지!”

“아니요.”

만나자마자 쓸 수 있는 두 개의 대답을 전부 소모해 버렸다. 칼릭스가 급하게 끼어들어 둘 사이를 중재했다.

“어머니!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피곤하실 텐데 먼저 자리에 앉으세요.”

“그래, 그래. 내가 아픈 애를 붙들고 또 잔소리를 하고 있었어. 앉자꾸나.”

“네.”

로젤린은 참 꼬박꼬박 대답을 잘했다. ‘사람이 말을 하면 대답하셔야 대화가 됩니다.’라고 말했던 것이 엄청난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제 누이는 한번 가르치면 잊지 않는 것 같았다.

급성 단기 교육이었지만 로젤린은 포크와 나이프를 곧잘 사용했다. 칼릭스는 제 눈물겨운 노력의 흔적을 아련하게 쳐다봤다. 하지만 예전의 로젤린을 기억하는 에델바이스에게는 많이 부족해 보이는 듯 했다. 차마 입 밖으로 타박을 내뱉지는 않았지만, 살짝 인상 쓰며 불편한 심기를 내보였다. 입을 너무 벌린다는 둥, 음식물 씹는 소리가 크다는 둥. 만약 로젤린이 다쳐서 요양 중이지만 않았더라도 진즉에 몇 마디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달그락.

로젤린이 스푼을 내려놓는 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크게 울렸다. 에델바이스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칼릭스는 그 모습을 보다 한숨을 뱉었다. 천천히 그녀의 상태를 알릴 예정이었지만, 생각보다 그 시기를 당겨야 할 것 같았다.

“어머니.”

“왜 그러니, 칼릭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그전에 나부터 말하자꾸나. 로즈?”

로젤린은 입안에 음식을 넣은 채 “네.” 하고 대답했다. 에델바이스의 표정이 확 찌푸려졌다. “어떻게…… 그런…… 몰상식한 행동을!”이라고 당장에라도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여자애가 매일 밖으로 다니기만 하고, 기사단이니 뭐니 하면서 다쳐 오잖니. 이번에도 그렇고 말이다. 이 어미가 항상 노심초사하며 걱정 하는 건 알고 있니?”

“아니요.”

칼릭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제 누이의 정직함이 아찔했다. 에델바이스가 얼떨떨해 하고 있어서 그는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어머니, 누님께선…….”

“아니 되었다. 그래. 집에서 좀 떠나 있었더니 많이 섭섭했던 모양이구나.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인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하겠니 로즈.”

“네.”

“이번에도 네가 다쳤다는 소식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팔이 부러져도 출근하던 애가, 무슨 사달이 났기에 집안에서 쉰다는 얘기가 나오나 해서.”

“네.”

“그래서 이 어미가 별장을 떠나기 전에 여기저기 알아보았단다. 너도 가정을 이룰 때가 되었잖니…….”

“어머니!”

칼릭스는 벌떡 일어섰다. 그녀가 항시 입에 달고 살던 안건이었으나, 죽다 살아난 누이에게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물론 부모로서는 제 딸이 위험한 검을 놓고 좋은 집에 시집가 편하게 생활하기를 바라는 게 당연할 지도 몰랐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로젤린은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서로의 이상이 너무나 다른 탓에 둘은 번번이 부딪쳤다.

여자가 작위를 받고, 여자가 상인이 되고, 여자가 검을 드는 시대에 에델바이스는 과하게 고리타분한 감이 있었다. 심지어 에델바이스의 조국은 라고슈 왕국으로, 대륙의 어떤 나라보다도 여왕들의 집권 기간이 긴 나라였다.

“지금 꺼내실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누가 보면 너보고 시집가라고 하는 줄 알겠구나, 칼. 누가 지금 당장 만나라고 그랬니? 좀 쉬다가 몸이 낫거든 한번 만나나 보라는 거야. 저 꽃다운 나이에 아깝게 이게 뭐니 대체. 이 어미가 어련히 괜찮은 사람 알아 놓았겠니? 서른하나에 젊은 백작인데 장사 수완도 아주 뛰어나고, 인품도 훌륭하다고 하더구나. 내가 에스터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더니 동대륙에서 발굴되는 아주 귀한 보석을 주지 뭐니. 약혼하거든 이걸로 반지를 해서 우리 로즈가…….”

에델바이스는 말을 미처 끝맺지 못했다. 본인을 끼고 얘기하고 있음에도 꿋꿋하게 식사를 하던 로젤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식사법이 문제였다. 막 바닥에 떨어진 빵을 주워서 천연덕스레 뜯어 맛있게 먹는 모습에 순간 좌중이 침묵했다.

굳어 있던 칼릭스는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며 보기 드물게 괴로운 소리를 내었고, 뒤에서 지켜보던 알터는 절레…… 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식사 예절 교육 당시, 떨어트린 것을 집어 먹지 말라는 내용은 없었다. 애초에 그런 교육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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