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아버지…… 그러니까 붉은수레바퀴 백작은 기사단을 이끌고 국경을 수비하시는 임무를 맡으셨습니다. 마무리 할 일이 있어 곧장 오지는 못하시지만, 아버지께서도 누님 걱정을 아주 많이 하셨습니다. 안 그래도 무서운 얼굴이 더 사나워져서…… 지나가는 어린 영지민마다 자지러지듯이 울었죠.”
붉은수레바퀴 백작은 일라베니아 제국 평균 남자 키를 훌쩍 뛰어넘은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부리부리하고 날카로운 눈, 밤을 떠올리게 하는 검은 머리, 짧게 정돈된 수염. 왼쪽 눈의 세로로 난 긴 흉터까지. 흉흉한 생김새와 더불어 가문의 기사단을 이끄는 그의 사나운 기세는 붉은수레바퀴 영지의 무시무시한 이야기에 힘을 더했다.
칼릭스는 영지를 시찰하며 돌아다닐 때 ‘카민! 너 말 안 들으면 붉은수레바퀴 백작님이 이노옴 한다! 이놈 백작님 보고 이놈 하라고 한다!’ 하면 아이가 울음을 뚝 그치거나 하는 장면을 종종 보고는 했다. 어이가 없었다. 깊은 산에 들어가면 그림자한테 잡아먹힌다던가, 거짓말을 하면 엉덩이에 뿔이 난다는 수준으로 제 아버지가 쓰이고 있다니.
“아버지께서는 약자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휘하의 가문들 또한 영지민을 함부로 대하지 않죠. 아버지의 이름을 딴 와인도 있을 정도로 존경받고 계십니다.”
로젤린은 호오 그렇군, 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맛은 좋아? 그렇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칼릭스는 웃음을 작게 흘렸다.
“하지만 누님은 못 드십니다. 포도 알레르기가 심하시거든요. 저희 영지의 대표 작물이 포도인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냐며 누님께서 항시 슬퍼하셨…….”
칼릭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까 제 누이가 뜯어먹던 그 스테이크. 거기에 뿌려져 있던 소스의 색이 붉은 빛을 띠고 있던 것이 생각났다. 칼릭스는 와인을 졸여 만든 소스를 좋아했다. 별다른 주문이 없었으니, 자신의 몫으로 나온 스테이크의 소스는 그것이었으리라. 손으로 식사하는 그녀의 모습에 충격을 먹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제 누이는 조리가 되어 있든 아니든, 포도를 먹으면 피부의 붉은 발진과 함께 기도가 부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극심한 알레르기가 있다. 칼릭스는 창백한 낯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부여잡았다.
“누님!”
로젤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칼릭스가 마구잡이로 몸을 살피는 대로 이끌렸다. 그는 그녀의 목과 가슴팍을 확인했다. 지금쯤이면 진즉에 피부에 붉은 발진들이 생겼을 양과 시간이었다.
“숨 잘 쉬어지세요? 목 안이 붓는 것 같다던가, 하지는 않으십니까?”
로젤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해 보세요.”
“아.”
칼릭스는 그녀가 이상 없음을 확인한 후에도 한참을 살폈다. 눈, 피부, 목, 그녀의 숨소리 하나하나 지켜보던 그가 숨을 크게 쉬며 풀썩 자리에 앉았다. 어찌된 일인지 그녀의 상태는 아주 양호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도 또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종을 울려 하인을 부르려던 차에 방문이 벌컥 열렸다. 아까 전 칼릭스 몫의 스테이크를 가지러 갔던 하녀였다.
“아가씨!”
하녀가 다급히 외치며 들어왔다. 그녀 또한 지금의 상황을 눈치챈 것이다. 그녀는 로젤린에게 다가가 자신이 한 것처럼 목과 가슴, 등을 확인했다.
“아가씨 숨이 제대로 쉬어지세요? 목이 붓는 것 같지 않으세요?”
로젤린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아 해 보세요, 아가씨.”
“아.”
하녀는 로젤린을 샅샅이 살피다가 한숨을 푹 쉬며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 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레이비 소스를 끼얹은 스테이크가 올라왔다. 지글지글 끓는 스테이크를 로젤린이 손으로 잡기 전, 칼릭스는 먹기 좋게 썰어 그녀 손에 포크를 쥐여 줬다. 그가 먹는 시범을 보인 후로는 로젤린도 포크와 나이프를 곧잘 사용했다.
“아가씨가 드실 줄 모르고, 제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아니다. 나도 잠시간 잊고 있었으니.”
“그래도 천만다행이네요. 이델라브힘께서 도우시나 봅니다. 어렸을 때 알레르기를 앓다가 완화되는 경우는 있다고 듣긴 했지만……. 혹시 모르니 알레르기 약을 식후에 드시는 편이 낫겠어요.”
하녀는 잰걸음으로 주치의를 찾아 나섰다. 칼릭스는 로젤린으로 인해 난잡해진 식탁을 하나하나 훑었다. 한입 먹고 내버린 아보카드 샐러드. 비어 있는 스테이크 접시. 흔적을 찾기도 힘든 와인 소스.
[정말 작은, 사소한 것이라도 놓치지 말고 잘 살펴야해, 칼.]
그는 등골을 서늘하게 스쳐 지나가는 감각에 얼굴을 굳혔다.
[눈썹을 움칠거린다던가, 눈동자를 굴린다던가, 식은땀이 난다던가, 혀로 입술을 핥는다던가. 숨기려 해도 그 사람은 너에게 많은 정보를 얘기하고 있을 거야. 말로 하는 것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욱더.]
칼릭스는 앞에 앉아 있는 그녀의 뒤로 예전의 로젤린을 겹쳐 보았다. 상상 속 그녀는 볼에 음식물을 묻히고 있지도 않았고 구불거리는 머리를 풀어 헤치지도 않았다. 목 끝까지 채운 하얀 제복. 하나로 높게 묶은 검은 머리, 생생하게 빛나던 올리브색 눈동자.
[말로 무장한, 거짓으로 위장한 자들의 이면을 읽어 내야 해. 너라면 잘 할 수 있어. 붉은수레바퀴의 사람들은 감이 좋으니…….]
그녀가 어릴 적 말했던 것과 같이 자신과 제 누이는 아주 예민했다. 문제와 사물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붉은수레바퀴 백작 또한 검술 실력과 함께 뛰어난 동물의 감으로 유명한 자였다. 이상하게 후퇴하고 싶더라니 타국의 함정이 있었다더라, 이상하게 마음에 안 드는 놈이 있어서 냅다 패고 잡아 봤더니 타국의 간자라더라. 하는 묘한 무용담의 소유자였다.
로젤린이 말한 대로 이상하게 발달된 감은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특징일지도 몰랐다. 칼릭스는 인정했다. 줄곧 눈앞의 누이에게서 느껴지던 얕은 위화감. 단순히 기억을 잃어 버렸다던가, 행동 양식이 예전과 다르다던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였다.
칼릭스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로젤린을 담았다. 그녀는 입가에 묻은 소스를 날름 핥고 있었다.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이면이 다르다면 그것은…….
* * *
로젤린은 극진한 보살핌으로 빨리 회복했다. 믿을 수 없는 회복 속도 때문에 바시오는 자신의 의술과 약 제조 실력이 이제는 신의 영역까지 손을 뻗친 건가 생각했다.
칼릭스는 매일매일 그녀를 찾아가 간호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후계자로서 바쁜 나날을 보내는 와중에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참 눈물겨운 우애였다.
이따금 칼릭스의 태도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있었다. 로젤린이 실종된 기간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슬퍼했던 것치고는 그렇게 기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 소문의 당사자,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는 어릴 적부터 차갑고 무뚝뚝한 성정으로 유명한 자였다. 사건이 마무리되었으니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것뿐이라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로젤린의 일과는 단순했다. 일어나면 밥을 먹고, 쉬다가 먹고, 또 쉬다가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먹은 후 잤다. 식사나 수면 시간을 제외하고서는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때문에 멍하니 백작가를 돌아다니는 모습이 여러 군데에서 목격되었다. 방 안에서나 입는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곱슬머리는 묶지도 않아 산발이 되어 있는 매우 자유분방한 차림새로.
이에 집사는 명석하고 똑똑했던 아가씨가 백치가 되어 버렸다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었고 칼릭스는 지끈거리는 두통 때문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백작가에 이런저런 소문이 퍼졌다. 하지만 사고 전의 로젤린이 보여 온 행실 덕분인지 다소 그 소문의 내용이 이상했는데…….
“아가씨의 머리가 좀…….”이라는 서두로 시작했다가 옆에 있던 다른 하녀에게 등짝을 맞고서는 “역시 과하게 똑똑하셨었지…… 약간은 덜 똑똑해지셔도 괜찮아.”로 끝나기도 했고, “맨발로 걷는 게 몸에 좋대. 역시 우리 아가씨 영특해.” 혹은 “머리 풀고 계신 거 완전 와일드해. 유행을 이끌어 가는 신여성. 우리 아가씨 멋있어.”로 이어지는 식이었다.
칼릭스는 제 보좌관이 모아 온 로젤린에 관한 소문들을 쭉 읽어 내렸다. 칼릭스는 굉장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우리 누님께서…… 높이 계시는 분의 가호를 받아 6일 만에 죽음의 계곡에서 살아 돌아오신 후 백작가에 퍼진 검은 죽음의 기운을 없애기 위해 오신지 하루 만에 눈을 뜨셨고, 심한 상처에도 불구하고 백작가를 두루 살피시어 민심을 안정시키셨으며 낮은 자들을 위해 제 머리 흐트러지는 줄도 모르고서 발 벗고 나섰다고?”
“네.”
“……그래…… 정말 발 벗기는 했지…….”
하녀들의 머리가 이상한 것 같았지만, 칼릭스는 차마 그 말을 뱉지 못하고 흠 하는 소리로 묻어 버렸다. 주인의 허물을 감싸는 태도가 가상하다 못해 무서운 수준이었다.
“누님이 아이들한테 잘해 주셨다는 건 알았지만, 덜 익은 과실더러 황금 사과라고 하는 수준인데…… 뭐 누님께 해가 되는 건 아니니 주의만 조금 주도록 해.”
“아가씨의 인품이 빛나는 순간인 거죠. 뭐 알겠습니다. 아, 그런데 백작 부인께서 오찬을 함께하고자 하셨습니다. 아가씨도요.”
“알겠다. 누님은 내가 모시고 가지.”
로젤린은 오늘 또한 복도 한 편에 앉아 있었다. 칼릭스는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있어 낮잠이라도 자는 듯 보였지만, 아래층의 하녀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지나가는 순간 그녀의 입이 웅얼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속삭이듯 말하고 있었다. 칼릭스는 그녀의 입모양을 읽기 위해 집중했다.
‘하녀장님이 오늘은 시트 전체적으로 갈라고 하시더라. 아, 그렇지. 아가씨 실종 사건 때문에 정신없어서 저번 주는 그냥 넘겼었지? 다들 팔 걷고 나서니까 얼마 안 걸릴 거야. 일 끝나고 놀러가자. 비비안도 이번에 옷을 좀 사고 싶다던데 같이 갈까? 응, 내가 비비안이랑 같은 구역이니까 말해볼게. 아, 저기 마침 비비안이. 비비안! 오늘 저녁 일 끝내고 시장에 같이 가자. 그래, 안 그래도 이번 주 중으로 사고 싶은 게 있었는데, 잘됐다. 같이 가자.’
“같이 가자.”
‘같이 가자.’
하녀들의 목소리와 로젤린의 입모양이 겹쳐졌다. 칼릭스는 제 팔뚝 위로 오소소 돋은 닭살을 확인했다. 한두 번 목격한 장면이 아니지만 볼 때마다 섬뜩했다. 그녀는 집안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얘기들을 듣고 반복해서 학습하고 있었다. 무리에 섞이기 위해서는 언어를 습득해야만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챈 것처럼.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