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2화
프레이가 무사히 약혼식과 결혼식을 치르는 것까지 확인한 후작가 일행은 곧장 북부로의 귀환을 택했다.
늘어난 영토로 인해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평화가 찾아왔다는 사실이 무색하게도, 나디아는 한동안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아야 했다.
그렇게 얼마나 일에 치여 생활했을까? 완연한 가을이 되었을 때쯤, 그녀는 비로소 늦잠을 잘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었다.
초가을의 평화로운 오전, 안주인의 침실 안에서―
아삭아삭.
과육이 씹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리고 있었다. 장의자에 기댄 채 과일을 갉아먹고 있는 나디아에게서 나는 소리였다.
푹 자고 일어난 뒤, 아름답게 꾸며진 가을 정원을 바라보며 과일을 먹고 있다니……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다.
나디아가 장의자 위에서 기지개를 펴며 중얼거렸다.
“아…… 역시 고향이 최고야. 아무리 수도의 왕궁이 좋다 해도 말이지, 고향만 한 곳이 없는 것 같아. 이 광경이 그리웠어.”
“저…… 실례지만 마님의 고향은 남부 아닌가요?”
의아함을 견디다 못한 하녀들 중 하나가 물었지만 마님의 반응은 뻔뻔했다.
“원래 마음 붙인 곳이 새로운 고향이 되는 법이지.”
“아, 듣고 보니 마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네요.”
“그렇지?”
두 사람의 실없는 대화에 곁에 있던 하녀들 역시 작게 웃음을 터트린다.
침실 안이 화기애애한 웃음소리로 가득 차 있을 때였다. 바깥에서 들려온 노크 소리가 그들의 웃음을 멎게 했다.
똑똑.
“들어와.”
나디아가 문가를 바라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아마 집사장이나 행정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응?”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문을 열고 눈앞에 나타난 것은 한 무리의 하녀들이었다. 게다가 다들 손에 하나씩 정체 모를 상자를 들고 있다.
‘난 하녀들을 부른 적이 없는데?’
나디아가 당황해하며 물었다.
“다들…… 여기엔 무슨 일이지? 안채에서 일하는 얼굴들은 아닌 듯한데.”
“영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분께서 마님을 위해 깜짝 선물을 준비했다고 하십니다.”
“깜짝 선물? 글렌이?”
“예, 제가 잠시 마님의 눈을 가려도 되겠습니까?”
“어머.”
나디아의 입가에 놀란 듯하면서도 기뻐 보이는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쑥맥인 건 확실한데, 이런 이벤트가 필요하다는 건 또 누구에게 전해 들은 건지 모르겠다.
그녀가 웃으며 허락을 내렸다.
“좋아. 허락하지.”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하녀장이 그리 말하며 조심스레 나디아의 눈 위에 안대를 두른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괜히 하녀들을 우르르 데려온 게 아니라고 주장하듯, 나머지 하녀들이 나디아에게 달려들었던 것이다.
“?!”
얇은 실내복이 벗겨지고, 조금 묵직한 옷이 그녀의 몸을 감쌌다. 장신구인 것 같은 물건이 몸에 걸쳐지기도 했다.
‘깜짝 선물을 받는 데에 이런 게 필요하나……?’
도대체 무슨 선물을 준비했기에 치장까지 해야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나디아가 입을 열었다.
“꽤나 거한 선물을 준비한 모양이야. 어떤 종류인지 힌트를 얻을 수 있으려나?”
“죄송합니다, 마님. 영주님의 명령이라……. 그리고 깜짝 선물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받을 때 더욱 기쁜 법이지요.”
“그건 그래.”
대체 또 무슨 귀여운 짓을 준비한 것일까?
나디아가 두근거림을 억누르며 하녀들과 함께 침실 바깥으로 향했다.
그런데 가는 길이 꽤나 길다. 안채의 현관을 나서더니, 그녀를 마차에 태웠다.
“……?”
굳이 마차를 타고서 나갈 만한 곳이라? 일단 내성 안이 아닌 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마차가 내성을 벗어났는지 바깥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대체 어디까지 나가려는 거지?’
나디아는 의아해하면서도 궁금증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일단 마차 안에 물어볼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완전히 성내를 벗어난 모양인지 바깥의 소음이 멎었다. 또각또각 말발굽 소리와 마차가 흔들리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
그렇게 얼마나 무료한 시간을 보냈을까?
“도착했습니다, 마님.”
도착을 알리는 마부의 목소리에 나디아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이어 누군가의 손이 그녀가 마차에서 내려올 수 있도록 부축해 준다.
“여긴……?”
“마님께서도 전에 한 번 와 보신 적이 있는 장소입니다.”
“한 번 와 본 장소라고?”
그야 본성 근처에 있는 곳이니, 지난 4년 동안 한 번쯤은 지나쳤을 것이다.
하지만 눈을 가리고 있다 보니 도대체 어디쯤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호숫가 근처인가? 약간 물비린내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나디아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신발 아래로 닿는 느낌으로 추측컨대, 풀밭 위를 걸어가고 있는 듯하다.
그녀를 안내해 주던 이의 걸음이 멈춘 것은, 신발 아래의 감각이 달라졌을 때였다.
‘이건 마치…… 카펫인가? 왜 풀밭 위에 카펫을?’
그때, 나디아의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가 풀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길게 늘어져 있는 붉은색 카펫이었다. 마치 웨딩 로드 같은 모양새다.
‘잠깐, 웨딩 로드?’
나디아의 고개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길고 붉은 웨딩 로드를 가운데에 두고, 한 무리의 가신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신들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온다.
“어서 오십시오, 마님!”
“결혼 4주년 축하드립니다!”
짝짝짝짝짝. 다들 손바닥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열렬하게 박수를 치고 있다.
그 순간, 나디아의 머릿속에 4년 전의 결혼식이 떠오른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환영하는 이 하나 없이, 싸늘한 눈길만 쏟아지던 결혼식.
사실 딱히 서럽다고 느껴 본 적은 없지만, 그럼에도 과거와 대조되는 모습에 감격이 북받쳐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들 언제부터 모여 있었던 거야? 용케도 나한테 안 들켰네.’
나디아가 픽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웨딩 로드의 반대편 방향이었다.
그곳에는 예복을 입은 글렌이 주례와 함께 서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 저절로 함박웃음이 걸린다.
나디아는 하인이 건네주는 부케를 쥔 채 웨딩 로드 위를 걸어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박수 소리와 함성 소리가 커다랗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언제부터 저 몰래 이런 일을 꾸민 거예요?”
“수도에서 출발할 때부터. 남부에서는 오랜 기간 함께한 부부들이 다시 한번 결혼식을 올리기도 한다는 얘기를 들었거든.”
“설마 리마인드 결혼식이요?”
“아,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군.”
그게 정말로 결혼식을 또 한 번 연다는 의미는 아닐 텐데 말이다. 거기다 겨우 결혼 4주년 만에 벌일 이벤트는 더더욱 아니다.
나디아는 그가 오해하고 있는 사실을 정정해 주려다가 말았다.
오늘은 선물을 받은 날이니, 그저 기뻐하기만 하자.
그녀가 글렌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정말 깜짝 놀랐어요. 제 생에 최고의 깜짝 선물이 될 것 같네요. 고마워요.”
“나야말로 감사를 표해야지. 나를 선택해 준 것에 대해서.”
“전에 말했죠. 당신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내 감정을 따라 선택한 거니까 고마워할 일은 아니라고요.”
“…….”
그녀는 자기 의지로 글렌의 곁에 남는 길을 택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에 대해 감사를 듣는 것은 맞지 않다.
나디아의 확고한 어조에 그의 눈동자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글렌이 무어라 답하기 위해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크흠, 흠.”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 사이로 난데없이 헛기침 소리가 끼어든다. 바로 주례가 낸 소리였다.
“흠흠, 이만 식을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아, 그래.”
글렌이 민망하다는 듯 급히 허락을 내렸다.
그러자 헛기침을 두어 번 더 한 주례가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혼인 서약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등 뒤에서 울리던 박수 소리가 쥐 죽은 듯이 멎는다.
나디아는 정말 4년 전 이맘때로 돌아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 등 뒤로 와 닿는 시선이 과거와는 달리 호의로 가득 차 있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주례의 말소리가 이어졌다.
“신랑 글렌 윈터펠은 신부 나디아 발라지트를 아내로 맞이하여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시겠습니까?”
“예.”
단호하고 묵직한 대답이었다. 전부 포기한 듯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던 과거의 기억 위로 새로운 기억이 덧씌워졌다.
이번에는 주례가 나디아에게 질문을 던졌다.
“신부 나디아 발라지트는 신랑 글렌 윈터벨의 반려자로서 평생 신의를 지킬 것을 맹세하시겠습니까?”
“예.”
과거와는 달리, 거짓 한 점 들어 있지 않은 대답이었다.
* * *
글렌은 결혼식 후의 피로연까지 완벽하게 재현해냈다.
나디아가 아는 리마인드 결혼식과는 판이하게 다른 양상이었지만 그녀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피로연의 술과 음식을 즐기는 가신들의 표정이 너무나 밝아 보였기 때문이다.
헤실헤실 웃으며 파티장을 바라보고 있는 나디아에게, 글렌이 물었다.
“설마 피곤한가? 술을 입에도 안 대는군.”
“그야 취하면 빨리 돌아가야 하잖아요. 좀 더 지금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요.”
“그래?”
친애하는 사람들이 들떠서 파티를 즐기고 있는 모습은 바라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광경이었다.
여러 감정이 일렁이는 눈으로 파티장을 내려다보던 나디아가 돌연 입을 열었다.
“글렌.”
“응?”
“앞으로 절대 싸우지 말고, 평생 행복하게 오래 오래 살아요. 아이는, 음…… 셋은 제가 힘들 것 같고, 두 명 정도는 어떨까요? 아들 하나, 딸 하나였으면 좋겠는데.”
“그럼 성별 상관없이 둘만 낳는 걸로 하지.”
“후계를 이을 아들은 있어야죠.”
“그거야 데릴사위를 들이면 될 일이지. 몸이 힘들 것 같으면 낳지 않아도 돼. 양자를 들이면 되니까.”
선후작과 가신들이 들었으면 경악할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다.
나디아가 킥킥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이는 낳고 싶어요. 전 화목한 가정이라는 게 뭔지 모르고 자랐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아이를 낳아, 그 아이를 기른다는 게 뭔지 알고 싶네요.”
“…….”
어두운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는 모습에 글렌의 눈빛이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곧이어 표정을 갈무리한 그가 장난스럽게 말을 잇는다.
“그럼 아이를 만드는 게 우선이겠군.”
“……?”
나디아의 눈이 커다래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녀의 바뀐 표정에 글렌 역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왜 그러나?”
“이런 농담도 할 줄 아는 사람인 줄은 몰랐거든요. 부끄러움 많은 쑥맥인 줄로만 알았더니!”
“……나디아, 그런 얘기는 조금 작게 말해 줬으면 해.”
“아아, 미안해요.”
가신들 앞인데 가주의 자존심을 지켜 주긴 해야겠지. 나디아가 재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입이 근질근질한 나머지 그녀는 다시 입을 열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당신 말이 맞네요. 아이를 낳으려면 그 전에 먼저 아이를 만들어야죠. 언제가 좋겠어요?”
“…….”
하지만 더한 농담까지는 아직 그에게 무리였던 모양이다. 점점 붉어지는 얼굴을 보며 그녀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반응이 있으면 더 놀려 주고 싶어지는 법. 나디아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결혼식도 하고, 피로연까지 열었는데 합방도 진행하는 게 당연한 순서 아니겠어요? 멀리 갈 것도 없이 오늘 당장 하는 게 좋겠네요.”
“…….”
“왜 대답이 없어요?”
“……내가 실언했으니 그만 놀려.”
그 대답에 나디아의 입에서 다시 한번 웃음이 터져 나온다.
결혼 4주년을 맞이한 날의 일이었다.
<가짜 아내에게 왜 집착하세요?> 본편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