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1화 (141/142)

제141화

수도의 성벽은 멀찍이서 보기에도 상태가 심각했다. 일단 남문이 통째로 날아갔다는 것부터 그러했다.

아연해진 얼굴의 후작 부부에게, 왕실에서 나온 시종이 다급히 변명을 내뱉었다.

“본래는 성문 주변의 성벽까지 모두 못 쓰게 되었습니다. 우선 성벽부터 수리하느라…….”

“사정은 알겠다.”

충격적인 첫 인상과 달리, 수도에서의 환대는 호화로운 편이었다.

왕궁에 들어서자마자 달려오는 얼굴이 프레이라는 것에서 특히나 그러했다.

“후작 부인!”

나디아를 발견하자 반색하며 뛰려 하는 프레이에게, 오르델 백작이 기겁하며 외쳤다.

“전하, 뛰지 마십시오!”

마침 나디아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 고함 소리에 찔끔하는가 싶던 프레이가 곧장 속도를 줄인다. 그가 속보에 가까운 걸음으로 다가와 말했다.

“경들을 마중하러 나갈 생각에 오늘 오전부터 일이 손에 잡히지 않지 뭔가?”

나디아가 생각했다.

‘이제는 마중과 배웅의 차이를 아셨나 봅니다.’

단기간에 모든 게 완벽해지진 않겠지만, 어찌 됐건 발전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녀가 웃으며 답했다.

“저 역시 수도에 입성한 전하를 뵐 생각에 출발부터 설레었답니다.”

“그대는 말을 참 따스하게 하는 재주가 있군.”

프레이가 반가움의 표현으로 그녀를 살짝 포옹하려 했다. 나디아 역시 새 왕이 될 사람의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였…… 아니, 받아들이려고 했다.

“어어?”

누군가 제 어깨를 뒤로 잡아끌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나디아의 어깨를 잡아당긴 것은 다름 아닌 글렌이었다. 휘청거리는 그녀를 제 뒤에 둔 그가 급히 화제를 바꿨다.

“전하, 그보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어…… 중요한 일인가?”

인사는 마저 하고 얘기하면 좋을 것을. 프레이가 머쓱한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예, 수도로 향하는 길에 2왕자 리암의 수배지를 자주 보았습니다. 아직 그의 행방은 찾지 못한 것입니까?”

“안타깝게도……. 하지만 숨어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전부일 거다. 그가 새로운 저항의 불씨가 될 확률은 적다고 생각한다만.”

“저 역시 그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그래도 모든 일은 확실히 하는 것이 좋겠지요. 예상을 깨고 북부로 도망쳤을지도 모르니 그쪽으로도 수색망을 넓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희가 협조하겠습니다.”

“그래 준다면 우리야 환영이지.”

시작부터 진중한 주제가 나왔기에, 인사는 자연히 뒷전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먼 길을 왔다는 걸 뻔히 아는 상황이니 오래 붙잡아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릴없이 프레이는 후작가 일행을 보내 주는 수밖에 없었다.

“먼 길을 왔으니 오늘은 이만 푹 쉬게나.”

“환대에 감사합니다.”

후작가 일행이, 좀 더 정확히 말해 새로운 충성 서약을 맺기 위해 몰려든 귀족들이 머물 곳은 왕궁 한편에 존재하는 별궁이었다.

안내해 주는 시종의 뒤를 따르며, 나디아가 글렌에게 타박하듯 속삭였다.

“글렌, 아까 왜 그랬어요?”

“아까라니?”

글렌은 일단 모른 척부터 하고 봤다.

“제가 왕자 전하와 인사하고 있을 때 저를 뒤로 끌어당겼던 거요! 그것 때문에 대화가 애매하게 끊겼잖아요.”

“인사? 그게 인사라고? 왕자는 그대를 껴안으려 했어! 그것도 남편이 보는 앞에서!”

“그게 인사죠! 가벼운 포옹쯤은 인사에 속한다고요!”

그쯤돼서는 두 사람 양쪽 모두의 목소리가 속삭임의 범위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니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귀에는 충분히 들릴 만한 크기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어쩔 수 없단 말이다.”

“당신 입장이요?”

“그걸 굳이 말을 해야 아나?”

“아니, 말을 안 하면 어떻게 알아요? 제게 독심술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디아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따지고 들자, 글렌이 낭패라는 듯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고민 끝에 그는 살짝 돌려서 말하기로 했다.

“거울을 봐. 그 속에 답이 있으니.”

“거울이라뇨?”

못 알아듣겠다는 듯, 나디아의 눈이 동그래진다.

다른 때에는 눈치가 비상하게 빠르면서 왜 이런 방면으로는 한없이 둔감한지 모를 일이었다.

‘하긴…… 예전부터 조금 둔하긴 했지.’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을 한번 감았다 뜬 글렌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하아…… 다른 놈들이 눈독 들일 것 같아서 안심이 안 된다는 뜻이었다.”

“어머.”

나디아는 그만 풉,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저렇게 귀여운 소리를 하면 화를 내다가도 기분을 풀 수밖에 없지 않은가?

살짝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하고 있는 모습이 더더욱 귀여웠다. 놀려주고 싶다는 뜻이다.

나디아가 그의 팔짱을 낀 채, 머리를 어깨에 기대며 물었다.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

“……부정해 봤자 내 꼴만 우습게 되겠지.”

“솔직해서 더 귀엽네요.”

그런데 그때였다.

“으윽.”

등 뒤에서 누군가 신음하는 소리에,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뒤쪽에서 따라오고 있던 파비안이 파리한 안색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다.

나디아가 물었다.

“파비안 경? 왜 그래요? 속이 안 좋아요?”

“네……, 말을 오래 탔더니 그런 것 같습니다.”

“……말을 오래 타서 속이 안 좋다고요?”

기사가 말을 타다가 멀미를 하다니, 이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턱도 없는 얘기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파리하게 질린 사람을 추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젯밤 우리 몰래 술이라도 퍼마셨나?’

무슨 사정이 있건, 나디아는 너그럽게 눈 감아 주기로 했다. 귀여운 짓을 하는 남편 덕분에 기분이 꽤 좋아진 상태였으므로.

“오늘은 제 호위를 맡지 않고 조금 쉬는 게 좋겠네요. 파비안 경을 대체할 사람이, 어디 보자…… 응?”

임시 호위를 뽑으려던 나디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뒤따라오던 가신들의 안색이 죄다 좋지 않았던 것이다.

“……다들 어젯밤 저와 글렌 모르게 술 파티라도 벌였어요? 숙취 중인 거예요, 지금?”

“오, 오랜 여정 탓에 다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아니, 체력 빼면 시체인 사람들이 대체 왜…….”

진심으로 의아해하는 마님의 얼굴 앞에서, 가신들이 좌절했다.

그 표정으로 짐작하건대 본인이 애정행각을 했다는 자각조차 없는 듯했다.

글렌이 입을 열었다.

“오랜 여정 탓에 피로가 누적되었나 보군. 오늘은 다들 각자 처소 안에서 충분히 쉬는 걸로 하지.”

이쪽도 자각이 없는 건 마찬가지인 듯하다.

절망한 가신들이 각자의 처소로 뿔뿔이 흩어졌다.

* * *

멸문된 가문의 영토를 재분배하는 문제, 왕실과 북부가 새로운 충성 서약을 맺는 문제 등으로 왕궁의 대회의실에선 며칠 내내 말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주도권은 승리를 거두는 데에 일조한 봉신들에게 쥐어져 있었고, 프레이는 그런 상황에서 왕실의 권리를 주장할 만큼 눈치가 없진 않았다.

그 결과, 왕실과 일부 봉신들이 참여한 회담은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거쳐 윤곽이 드러나게 되었다.

글렌에게서 그 결과를 전해 들은 나디아는 조금 놀랐다. 상상했던 것 이상을 얻어낸 것이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공작가의 재산 중…… 절반이 제 몫이라고요?”

“나머지 절반은 국고에 귀속된다고 하더군. 윈터펠과는 관련 없는, 그대의 개인 재산이야.”

“잘됐네요. 크게 기대는 안 했는데…….”

나디아는 죄인이 된 발라지트 공작과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스스로 절연을 선언했다.

그 때문에 발라지트 가문의 살아 있는 유일한 혈육임에도 공작가의 재산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그녀에게 이로우면 이로웠지, 해가 될 내용은 아니었다.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윈터펠의 금고 열쇠를 쥐고 있긴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개인 재산이 있다는 건 가슴 한편이 든든해지는 일이다.

그리고 글렌은 또 하나의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프레이 전하의 혼사 말인데, 최대한 빨리 결혼을 할 생각이라더군.”

“그야 왕비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으니까요.”

“우리가 떠나기 전에 약혼까지 진행할 모양이야. 당연히 참석해야겠지.”

“그건 당연하죠.”

수도 근처에 머무르면서 차기 왕의 약혼식에 참여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응?”

“왕자님이 약혼하신다는데 당신이 기뻐하는 것 같네요?”

글렌이 2초간 눈알을 굴리다 대답했다.

“아무래도 결혼을 하면 사람이 조금 성숙해지겠지. 그런 의미에서 기쁘군.”

“……정말이요?”

“정말로.”

나디아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 질투쟁이 같으니.’

왜 혼자서 가상의 연적을 만들어 싸우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으나, 그녀는 모른 척해 주기로 했다.

“그나저나 약혼식이 기대되네요.”

“그래? 이런 행사를 귀찮아할 줄 알았는데.”

“새 국왕의 약혼식이니 분명 화려할 것 아녜요? 좋은 구경거리 아니겠어요? 제 약혼식과 결혼식은 원체 얼렁뚱땅 치렀으니까요.”

“…….”

그녀가 별다른 생각 없이 던진 말에, 글렌의 안색이 파리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나디아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묻는다.

“……다른 귀족들의 약혼식이나 결혼식에 참여해 본 적 없나?”

“아, 그게 말이죠…… 제가 서녀라서 귀족 사회에서는 조금 겉돌았거든요. 보통 저 대신 카레인만 대표로 많이 참석했죠.”

“…….”

“그런데 그건 왜요?”

“…….”

“대답 안 할 거예요?”

의아해진 나디아가 몇 번이고 독촉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관자놀이에 맺힌 식은땀이 굵어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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