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0화 (140/142)

제140화

“그야 왕실과 새로운 충성 서약을 맺기 위해서지.”

“새로운 충성 서약이요?”

“그래, 우리가 불만인 점이 존재했잖아. 이참에 그걸 바로잡아야지.”

“아하…….”

사실 리사는 왕과 영주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충성 서약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마님과 영주님이 알아서 잘 해결하시겠지.’

두 분 모두 현명한 분이시니 말이다. 리사는 대강 납득하고 다시 하던 일을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나디아가 자리에서 일어난 건 바로 그때였다.

“그럼 나는 잠시 나갔다 올게.”

“어딜 가세요?”

“혼자서 산책하려고.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잖아.”

이대로 북부로 되돌아가게 되면 언제 다시 남부를 찾을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방문일 수도 있다.

씁쓸한 감정에 젖은 나디아는 따라 나서겠다는 사용인들을 물린 채 홀로 안채 바깥으로 나섰다.

어릴 적 그녀가 지냈던 곳은 안채가 아닌 별채였다. 나디아가 별채로 향하는 길목을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딱히 좋은 기억은 없었던 곳이긴 하지만…….’

공작성의 콧대 높은 사용인들이 서녀를 깍듯하게 대우해 줄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마지막으로 공작성을 둘러보려는 건, 친모와 함께 했던 기억이 남아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어릴 적, 유일하게 자신의 편이었던 어머니. 어느 날부터 시름시름 앓더니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던 어머니.

어릴 때에는 그저 어머니가 몸이 약했던 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갑작스러운 죽음의 배후에는 발라지트 공작이 존재했지 않나 싶다.

정실인 공작 부인 역시 비슷한 증상을 앓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본인이 성불구라는 걸 들키기 싫어서 부러 간음을 조장했으면서, 막상 남의 아이가 태어나니 괘씸했나 봐.’

그녀가 한때 친아버지라고 생각했던 인간은 그렇게나 비겁한 남자였다.

어머니를 떠올리니 공작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에서 솟구치는 것 같았다.

나디아가 걸음을 옮기며 한탄하듯 말했다.

“아아…… 역시 그 인간, 너무 쉽게 죽었어.”

그의 병환이 손쉬운 승리에 일조했다는 건 알지만, 그럼에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금쯤 부디 지옥에 떨어져 있길.

그녀가 조용히 저주를 퍼부으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바스락.

등 뒤에서 마른 나뭇가지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린다. 나디아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어머. 왔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요?”

그곳엔 당황한 얼굴의 글렌이 서 있었다. 표정을 보니 나뭇가지를 밟은 게 꽤나 당혹스러운 듯했다.

“절 놀래키려는 생각이었어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혼잣말로 저주를 하고 있기에…….”

“……아.”

이번엔 나디아가 당혹스러워할 차례였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는데 그게 거기까지 들렸을 줄이야.

그녀가 서둘러 이유를 덧붙이기 시작했다.

“아, 아버지…… 그러니까 발라지트 공작에 대한 혼잣말이었어요. 저지른 짓에 비해 너무 쉽게 죽은 것 같아서…… 라고 할까요.”

“그렇다니 다행이군.”

“네? 뭐가요?”

“혹시라도 가족에게 정이 남아 있으면 어떡하나 걱정했거든. 최근에 기운이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은 아닐지…….”

“그럴 리가요!”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나디아는 진심으로 진저리쳤다.

“마침 더 미워지고 있던 차였으니 그런 소름 끼치는 말은 하지 말아요.”

“마침 더 미워지고 있었다?”

“이 별채는 어렸을 적의 제가 어머니와 함께 지내던 곳이었거든요. 저번에 말했죠?”

“그래, 기억나는군.”

한 침대를 쓰며,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 서로의 어린 시절에 대해 두런두런 얘기했었다.

“부부 사이가 안 좋았나 보군.”

“사이가 안 좋다기보다는…… 높은 확률로 어머니의 죽음 뒤에 발라지트 공작이 있을 테니까요. 어머니는 공작가 내에서 유일한 제 편이었어요.”

“…….”

상상 이상의 답변이다. 글렌의 말문이 콱 막히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깜짝 놀랄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디아처럼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친정을 배신하고자 결심하기까지는 많은 일이 벌어졌으리라.

복잡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글렌에게, 나디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런 눈으로 볼 것 없어요. 여하튼 저는 복수하는 데에 성공했잖아요. 발라지트 공작이 평생 이룬 것을 박살내 버…….”

“아, 저기.”

“네?”

그때, 글렌이 놀란 목소리를 내며 등 뒤를 가리킨다. 나디아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아야 했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뭐야? 뭘 본 거예…….”

쪽.

그건 그녀가 의아해하며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왼쪽 뺨에 그의 입술이 짧게 닿았다 떨어진다. 나디아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방금…… 뭘 한 거예요?”

“그, 그대의 기분이 조, 좋지 않아 보여서…… 기분을 풀어주려고…….”

“뭐라고요?”

그녀의 입이 방금 전보다 더욱 벌어졌다.

글렌은 대담하게 기습 공격을 한 주제에, 뒤늦게 부끄러움이 밀려오는지 시선을 못 마주치고 있었다.

기습 키스를 했으면 차라리 뻔뻔하게 나가든가. 일단 저질러놓고서 곧장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꽤나…….

‘귀엽잖아?’

나디아는 최근 들어 자신의 남자 취향을 깨달았다. 그건 바로 차가운 인상의 미남인데 의외로 귀여운 면이 많은 남자다.

그녀가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본인의 입맞춤이 제 기분을 풀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자신감이 대단하네요.”

“그건…….”

“아, 미남의 자신감이라는 게 이런 건가요? 하긴, 자신감을 가져도 될 만한 미모이긴 하죠.”

조금만 놀리니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저런 반응 때문에 더욱 짓궂게 굴고 싶어진다는 걸 알기나 할지.

“에잇.”

나디아가 까치발을 들며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쪽.

방금 전 글렌이 했던 것처럼 기습적으로 뺨에 입술을 갖다 댔다.

그라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을 테니 ‘기습’이라는 표현은 조금 어울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

글렌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뭘 그렇게 놀라요? 받은 거 되갚아 준 것뿐인데.”

“정말이지…….”

못 말리겠다는 듯 실소를 흘린 글렌이 다시 한번 나디아의 뺨에 입술을 찍었다.

한편, 알콩달콩 시간을 보내고 있는 두 사람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눈길이 존재했다.

바로 본채의 테라스에서 노닥거리고 있었던 후작가의 가신들이었다.

높은 층수에 위치해 있었기에 별채의 정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훤히 보였다.

“우리 마님이랑 후작님…… 최근 들어 더 가까워지신 것 같지 말입니다?”

“착각이 아니야. 두분이서 하는 대화를 듣고 있으면 일주일 전에 먹었던 점심까지 올라오는 기분이라고. 주변 사람들을 좀 생각해 달란 말이야!”

“물론 모시는 주군 부부의 금슬이 좋아지길 바란 건 사실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갑작스럽지 않나? 모두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생각이었다.

침묵이 맴도는 테라스 안에서, 갑작스레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빼액 울렸다.

“아냐. 다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마님의 사랑이 이뤄진 거잖아! 마땅히 축하할 일이지!”

“그, 그건 그렇지 말입니다.”

“적어도 이제 마님께서 윈터펠을 떠나시진 않을까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잖아.”

“그것도 그러네.”

가신들 대다수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짝사랑에 지친 나디아가 마음을 접을 걱정은 한결 던 셈이다.

잉꼬부부의 애정행각이 조금 과하게 느껴질 때가 있긴 하지만…… 그거야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적응될 일이리라.

“조만간 선후작님의 소원이 이뤄질지도 모르겠군.”

“선후작님의 소원?”

“후작가의 후계가 안정되는 것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한참 전부터 아기 용품을 사야 되니, 인테리어를 다시 해야 된다느니, 호들갑을 떨던데.”

“시기적으로는 딱 좋네. 내전도 끝났으니 주변 환경도 안정되었고. 아이가 자라기에 좋겠어.”

후계자가 태어난 윈터펠 후작가는 어떤 모습일까?

가신들은 각자 머릿속으로 그 몽실몽실하고 따뜻한 장면을 떠올려보았다.

다정한 한 쌍의 잉꼬부부와 어린아이. 상상만 해도 흐뭇한 광경이다. 가신으로서 매우 보람찬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감동을 깨부수는 목소리가 울렸다.

“잠깐만. 그럼 우리 영주님, 앞으로는 서열 4위가 되시는 건가?”

“어? 그게 그렇게 되나?”

그들의 얼굴이 일순간 심각해졌다. 가신으로서 훌륭히 처신하려면 집안의 서열 순위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님에게서 태어난 아이가 영주님보다 서열이 낮을 것 같지는 않지?’

‘당연한 말을.’

조만간 영주님의 서열이 한 계단 떨어지겠구나.

가신들이 서로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으며 결론을 내리고 있을 때였다. 그들의 시야를 침범하는 것이 하나 존재했다.

바로 나디아와 글렌 사이에 끼어든, 조그마한 새끼 용이었다.

노아가 나디아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글렌의 머리 위에 붙어 버린다.

곧이어 무어라 불만을 토로하는 글렌의 외침이 어렴풋이 들려왔지만, 먼 거리 탓에 내용까지 들을 수는 없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모두의 머리에 스쳐 지나간 생각이 있었다. 누군가 머릿속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아니, 5위가 될지도?”

“그만하자. 그래도 우리 주군이잖아.”

“그래…… 아이가 태어나도 4위는 되는 걸로 하자.”

가주의 권위를 위해 그들은 더 하고픈 말을 참기로 했다.

수도로 떠나는 날짜가 다가오는 어느 날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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