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8화 (138/142)

제138화

글렌이 어지러운 공작령의 상황을 정리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수도에서 전해진 소식이 일에 치여 죽어가는 이들에게 한 줄기 단비가 되어 주었다.

“오르델 백작님이 수도를 탈환했다고 합니다.”

“잘됐군.”

짧게 감상을 표한 것은 감흥이 없어서가 아니라 크게 반응할 힘이 없어서였다.

피곤한 듯 미간을 문지르는 글렌에게 지스카르가 다가와 추가적인 보고를 이어갔다.

“각지에서 저항이 이어지고 있긴 합니다만 조만간 정리될 겁니다. 승기가 기울었으니 투항하는 자들도 속출하고 있습니다.”

“항복한 자들은 살려두고, 끝까지 저항한 자들은 처형해서 본보기를 보여라.”

“예.”

지스카르가 지친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이럴 줄 알았다면 공작성의 가신들을 조금 더 살려둘 걸 그랬군요. 그들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지경입니다.”

“원래 점령 후가 더 복잡한 법이지.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발라지트를 위해 일한 자들을 살려둘 순 없지.”

“물론 그 말씀도 옳긴 합니다만…….”

한숨과 함께 무심코 방안을 둘러보던 지스카르의 얼굴이 굳었다. 연신 집무실을 두리번거리던 그가 다시 글렌을 바라보며 묻는다.

“그런데 지금 마님은 어디로 가셨습니까? 그러고 보니 오늘 오전부터 못 뵌 것 같군요.”

그가 아는 나디아는 일감이 많은 장소에 없을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몹시 의아해하는 가신을 위해 글렌이 답을 알려주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싶다며 성 바깥으로 나섰다.”

“예?”

그러자 지스카르의 눈이 커다래진다. 그 의미를 잘못 해석한 글렌이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이 근처고 호위까지 붙였으니 크게 문제는 없을 거다.”

“그게 아니라 마님께서 상심해 계시는데 왜 영주님은 여기에 계시냐는 뜻이었습니다.”

“……방금 전에는 죽은 이들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무엇이 중요한지 우선순위가 판단되지 않으십니까?”

이쯤 되니 윈터펠의 당주가 자신인지 나디아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더 문제는 너무 태연한 얼굴로 말하다 보니 ‘그런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다른 이들까지 동조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친정이 무너진 상황 아닙니까? 아무리 윈터펠 가의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한들, 심란하실 법도 하지요.”

“후작님, 여기서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당장 마님을 찾아가 보십시오.”

주변의 반응이 그렇다 보니, 나디아가 가족을 원수로 여긴다는 걸 아는 글렌조차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침통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가 너무 무심했군…….”

“이제라도 깨달으셔서 다행입니다. 어서 가 보십시오.”

그리하여 글렌은 업무 지옥에서 해방되어 성 바깥으로 나가게 되었다.

* * *

공작성의 동문을 나서 조금만 마차를 타고 나가면 강에 다다를 수 있다.

더위가 꺾여가는 시기이지만 무장을 한 채 햇볕 아래에 서 있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강변의 갈대밭 위, 윈터펠 가의 문양을 새긴 기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작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지금 몇 시간째지? 족히 세 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

“일단 슬슬 배가 고픈 걸로 봐서 정오가 지난 건 분명해.”

“마님은…… 다리 안 아프신가?”

수다를 떨던 기사들의 시선이 힐끔 강변을 향한다. 그곳에는 상복처럼 짙은 색의 드레스를 걸친 나디아가 강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간이 의자라도 가져다 드릴까?”

“아서라. 마음이 안 좋으실 텐데 혼자 계셔야지.”

마님을 바라보는 기사들의 눈빛에 애처로움이 어렸다.

아무리 남편인 글렌을 사랑한다 해도 친정의 멸문을 바라보는 것이 유쾌한 일일 리 없었다.

거기다 혈육인 가족들까지 모조리 죽음을 맞이한 상황 아닌가?

마님이 이른 아침부터 강변에서 사색하고 있는 것이 백 번, 아니, 천 번은 이해되었다.

‘가여운 마님…….’

‘우리가 더 잘해 드려야겠다.’

한편, 강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나디아는 이런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하……. 발라지트 공작은 조금 더 고통받다가 죽었어야 했는데…….’

애초에 친아버지도 아닐 가능성이 높은 데다, 자신을 도구로 이용하다 버린 사람에게 가족의 정 같은 것이 존재할 리 만무했다.

그는 자신이 평생 이룬 성과가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오랫동안 고통받다가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그런데 측근과 친척들이 지켜보는 침대 위에서 편히 생을 마감했다니!

‘설마 이 시기에 죽음에 이르는 큰 병을 앓았을 줄은 몰랐지. 나한테도 숨겼을 줄이야……. 아니지. 생각해 보니 굳이 나한테 알려 줄 이유는 없겠군.’

그 당시에 자신은 정략결혼의 체스말이었을 뿐일 테니 말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그의 숨이 붙어 있을 때에도 이미 승기가 기울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자신이 죽은 후에 가문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부디 그가 심리적인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길 바란다.

카레인의 죽음 역시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를 동생이라고 여긴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으니까.

다만―

“…….”

씁쓸한 시선이 들고 있는 나무 상자로 가 닿았다.

성을 나설 때만 해도 유해가 담겨 있었던 나무 상자는 어느새 텅 빈 상태였다.

나디아는 그것이 어디쯤 흘러갔을지 가늠하며, 머나먼 강 하류를 바라보았다.

“당신, 아주 먼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 했죠.”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혼잣말이었다.

이지호가 가족들처럼 자신을 배신한 사람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낌이 자못 달랐다.

“부디 그곳까지 가 닿길 바랄게요.”

그는 자신이 죽으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농담처럼 하곤 했다.

죽음과 고향으로의 귀환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탁.

그녀가 텅 빈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그러고는 그것을 강물 속으로 던져 넣었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나디아.”

“……?”

나디아는 그제 제 곁으로 누군가 다가와 있다는 걸 알아챘다.

언제 여기까지 다가온 건지, 글렌이 두어 걸음 떨어진 장소에 우뚝 서 있었다.

“아, 당신이었구나. 여유가 좀 생겼나 봐요? 바쁜데 저 혼자 게으름 피워서 미안해요.”

“아니, 지금까지 우리 가문에 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마음도 안 좋을 텐데 한동안은 일에 손대지 말고 푹 쉬도록 해.”

그 말에 나디아가 일순간 뜨끔했다.

“……제 기분이 안 좋은 게 그렇게 티나 났어요?”

그가 더한 오해를 하기 전에, 나디아가 무어라도 변명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오히려 내가 너무 무심했던 것이 대해 사과해야겠지.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도 친정이 멸문한 게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을 텐데…….”

“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글렌은 비장한 얼굴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무언가 오해가 있는 듯하다.

“내가 그대의 새로운 가족이 되어 주겠다.”

“…….”

“결코 가족의 빈자리를 느끼게 하지 않겠어. 앞으로는 그대가 홀로 쓸쓸한 시간을 보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그리 말하는 얼굴은 서임식에서 기사의 맹세라도 읊듯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너무나 진지한 얼굴이라 놀리고 싶을 지경이다. 한동안 가라앉았던 나디아의 기분이 조금씩 유쾌해지기 시작했다.

“하, 하핫!”

“……왜 웃는 거지?”

“그야 기특해서 그러죠.”

키우던 강아지가 앞으로는 내가 주인님을 지켜주겠다고 늠름하게 나서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심지어 상황을 단단히 오해하고 있기까지 했다.

나디아는 짧게 웃다가 그의 가슴팍에 몸을 기댔다. 그러자 글렌의 몸이 굳는 게 피부로도 느껴졌다.

“새삼 가족이 그리운 건 아니고요……. 그냥 조금 허해서 그래요.”

“복수를 끝낸 후의 허무함, 같은 건가?”

“비슷한 것 같네요. 그러니까 괜한 생각이 계속 떠오르지 않게 해 줄래요?”

그 의미심장한 제안에 글렌의 표정이 어리둥절하게 변했다.

“내가?”

“네, 방금 제 가족이 되어 준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 정도 부탁은 흔쾌히 들어주셔야죠.”

“…….”

그쯤 되자 그는 정말로 난처한 표정이었다.

위로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괜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게 해 달라, 라니.

정말로 감을 못 잡은 듯한 그의 표정에, 나디아는 조금 힌트를 주기로 했다.

‘너무 능숙한 것보단 조금 감이 없는 게 귀엽긴 하지.’

그녀가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제 머릿속이 복잡해지면 다른 생각이 안 날 것 같은데요.”

“머릿속이…… 복잡해지게?”

“하실 수 있는 일이 있잖아요. 남편으로서.”

“아.”

마지막 문장까지 덧붙이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감을 잡은 표정을 지었다.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죠?”

“……물론.”

왼손이 올라와 그녀의 어깨를 살포시 붙잡는다. 동시에 나디아는 까치발을 들어 그가 쉽게 입맞출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입술과 입술이 부딪히는 순간 강변에 산들바람이 몰아쳤다. 나디아의 갈색 머리카락과 치맛자락이 허공으로 휘날린다.

그녀는 팔을 뻗어 글렌의 어깨를 껴안았다. 얇은 여름옷 사이로 따스한 체온이 전해진다.

줄곧 햇볕 아래에 있었는데도 이상하게 몸이 더욱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내 가족은 이 사람이야.’

이곳이 바로 그녀가 정착할 장소였다.

아버지와 동생에 대한 일은 까맣게 잊고, 이제 그녀가 가족으로 여겨야 할 사람.

그의 어깨를 껴안고 있는 나디아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