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5화 (135/142)

제135화

부관이 이를 갈며 건너편을 노려보는 상관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번이 네 번째입니다.”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을 수가 없겠지. 다음번에 나타날 땐 곧장 추격할 수 있도록 만반의 대비를 해 둬라.”

“예?”

마지막 물음은 다른 이에게서 터져 나온 목소리였다.

그가 목에 핏대를 올리며 반대를 표했다.

“저렇게까지 도발하니 더욱 그들의 계략에 넘어가선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안 됩니다, 지호 경. 우리를 끌어내려는 속셈입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강을 건너려 할 때쯤 강물로 쓸어버리려는 계획은 아닐지 어떻게 장담합니까?”

“건기라서 강물의 유량이 많지 않다. 그럴 걱정은 없어.”

칼 같은 대답에 반대를 표한 이들의 표정이 더욱 구겨졌다.

“그럼 강을 건넌 이후에 다른 무언가를 준비해 놓았겠지요. 유인책입니다.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

알고 있다. 그 역시 머리로는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함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낚일 수밖에 없는 미끼란 것이 존재하는 법이다.

나디아와 다시 한번 독대하고 싶었다. 그녀에겐 묻고 싶은 질문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왜 나는 안 되는 거냐고.

과거에 그녀를 배신했던 것이 그 이유라면, 앞으로 평생토록 속죄하며 살 테니 한 번만 기회를 주면 안 되겠냐고.

그녀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 준 건 자신인데, 애꿎은 남자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발아래에 엎드려 그 대답을 구하고 싶었다.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지호 경. 무시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에이든 경도 굳이 무리해서 맞설 필요는 없다는 말씀을 남기지 않았습니까? 강을 건너오지 않는 이상 대응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이들의 만류가 쏟아졌지만 이미 다른 데에 정신이 팔린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내용이었다.

누군가 시야를 가로막기라도 한 듯, 오로지 한 가지 목표밖에 보이지 않았다.

좌중을 둘러보던 이지호가 천천히 입을 연다.

“다들 간과하고 있는 점이 하나 있는 것 같은데.”

하아, 지호의 입에서 짜증 섞인 한숨이 터져 나왔다.

나디아가 눈앞에 있다. 마치 손만 뻗으면 닿을 것만 같다.

애가 타서 미칠 것 같은 지경인데, 별 시답잖은 문제로 시비가 걸리니 짜증 나지 않을 리가.

그가 짓씹는 듯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지휘관은 나다.”

* * *

“아, 덥다.”

건기답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선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땡볕에 선 채로 시간만 죽이는 행위가 벌써 다섯 번째다.

아무리 본인이 하자고 제안한 계획이지만 앓는 소리가 터져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워…….”

나디아가 옷자락을 펄럭이며 더위를 식히려 애쓰자, 그 틈을 놓치지 않은 글렌이 권유해왔다.

“이쯤 되면 우리 계획대로 움직여 줄 의사가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이상하네요. 그럴 리가 없는데…….”

강 건너편을 바라보는 나디아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시간을 되돌릴 방법을 찾아 헤매고, 끝내는 성공할 만큼 제게 집착하는 남자였다.

눈앞에서 얼쩡거리면 쫓아오지 않고는 못 배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쯤 되니 제 판단이 틀린 건 아닐지 의심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나디아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눈치챈 듯, 글렌이 다시 한번 은근한 목소리로 설득을 시도했다.

“설령 이지호 본인은 뻔히 보이는 함정 속으로 걸어 들어가려 한다 해도, 주위에서 그 꼴을 두고만 보겠나? 필사적으로 뜯어말리겠지.”

“으음…….”

“그러니 움직임이 없는 것도 당연해. 아쉽지만 유인책을 시도해 보는 건 충분하지 않았나 싶군.”

“그런가요.”

아무리 제게 집착하고 있어도 뻔히 보이는 함정에 걸어 들어갈 만큼 이성을 놓지는 않았다는 것인가?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나디아의 표정이 시무룩해지려는 순간이었다.

“어?”

의아해하는 파비안의 목소리가 귓가에 꽂히듯 들려왔다.

“마님. 저기, 움직이는 것 같은데요?”

“응?”

“어? 어? 지, 진짜 쫓아오고 있습니다!”

한 무리의 병력이 도강을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발견한 나디아가 짧게 감상을 표했다.

“어머, 정말이네. 미리 준비하고 있었나 본데요. 정신없이 밀려오고 있어요.”

“한가하게 감상이나 할 때가 아니야!”

글렌의 손이 나디아가 탄 말의 고삐를 잡아당겨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동시에 달리기 시작했다.

우아아아아아!

숲속으로 달아나는 나디아의 등 뒤에서 추격대의 함성이 요란하게 울린다. 그제야 계획이 성공했다는 실감이 든다.

동시에 그녀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치밀어 오른 탓이다.

‘설마 했는데 정말 제 발로 걸어들어올 줄이야…….’

몇 걸음 앞이 불구덩이라는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한순간 다른 생각에 빠질 뻔한 그녀가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집중할 때야. 딴생각은 나중에.’

들판 위를 내달리는 나디아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 * *

“쏘지 마라! 화살을 쏴선 안 된다!”

처음에 궁기병들은 그것이 사정거리가 애매하니 화살을 아끼라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추격하는 적에게 화살을 쏘지 말라니, 말도 안 되는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명령의 진짜 의미를 깨달은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당연하게도 반발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화살을 쏴선 안 된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야! 절대 화살을 쏘지 마라!”

“말도 안 됩니다! 명령이 잘못 전달된 것 아닙니까?”

“젠장! 자세한 건 나도 모른다! 일단 명령에 따라!”

이지호가 직접 내린 명령이라는 말에 병사들은 불만을 품으면서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항명은 곧 죽음이기도 하지만, 그 사람이라면 달리 생각해 둔 방도가 있기에 그런 명령을 내렸으리라 지레짐작한 것이다.

일부 불만을 토로하는 자들이 있긴 했지만 감히 명령을 어길 만큼 간이 크지는 않았다.

“숲으로 진입하면 엄폐물이 많아질 텐데 지금이 아니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군. 하지만 일단 따라.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그렇게 발라지트군의 추격대는 숲 안으로 진입했다.

* * *

“정말 활을 안 쏘는군요.”

파비안의 감탄한 목소리가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뚫고 들렸다.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 이런 것까지 나디아가 예상한 대로 흘러갈 줄이야.

파비안이 경탄해하며 물었다.

“마님께선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예상하신 겁니까?”

“그게…… 뭐, 그런 방법이 있어요. 자세히 묻지는 말아 줘요.”

저쪽 지휘관이 내 전생의 약혼자인데, 나한테 어마무시하게 집착하고 있다- 라고는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다.

늘 그렇듯이, 윈터펠 가문의 식솔들은 나디아가 대답을 원치 않는 것 같으면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마님께서 다 계획이 있으셨겠지요.”

-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일 뿐.

양심의 가책을 무시하며, 나디아가 글렌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글렌, 여기서부터는 당신 판단을 따를게요. 여기선 더 깊숙이 끌어들이는 게 좋겠죠?”

“아무래도.”

적이 함정이 걸려들었음에도 글렌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활로 공격하지 않는 이유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칼라아이 원정 이후, 잠시 혼담이 오갔던 게 전부라 알고 있는데…….’

고작 그 정도 인연으로 저토록 절절할 리 없지 않은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두 사람만의 사정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의 가슴 속에 질투의 불꽃이 똬리를 틀었다.

물론 감히 나디아에게 따져 물을 용기는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니 솟구치는 질투를 깊숙한 곳에 꾹꾹 눌러 담는 수밖에.

* * *

어느덧 해가 지평선 아래로 뉘엿뉘엿 가라앉고 있었다.

숲속의 해는 더욱 빨리 지기 마련이다. 사방이 깜깜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쯤 되니 추격을 감행했던 남부군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놓쳤습니다.”

“…….”

이지호는 대답 대신 더욱 이를 악물었다.

손에 잡힐 듯 말 듯 눈앞에서 아른거리던 갈색 머리카락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그녀는 마치 희망 고문이라도 하듯, 거리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며 숲속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한순간에 사라졌다. 마치 너 따위는 절대 자신을 가질 수 없을 거라고 말하는 것처럼.

“당했군.”

탈력감인지 분노인지 모를 감정이 온몸을 감싸 안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눈앞에서 나디아의 모습이 사라지니 그제야 비로소 이성이 되돌아오기 시작한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자신을 이곳에 끌어들인 이유가 무엇인지.

정체 모를 감정에 휩싸인 그가 허탈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지, 지호 경……?”

그의 이유 모를 웃음소리에 다른 이들이 불안한 듯 눈빛을 교환하기 시작한다.

개중 용기를 낸 몇몇 이들이 입을 열어 질문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쉬운 마음은 이해하지만 더 쫓아가는 건 무리입니다.”

“게다가 병사들이 많이 지쳐 있습니다. 일단 이쯤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날이 밝으면 다시 추격하시는 게…….”

“뜻대로 해라.”

그는 그 한 마디만 남기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걸어가 버렸다.

남겨진 이들은 서로 난처한 시선을 교환하다가 곧 숙영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나디아를 붙잡기 위해 뒤도 안 돌아보고 추격을 감행했으니 숙영 장비 같은 걸 챙겨왔을 리가 없었다.

다만 다행인 것은 이곳이 숲속이라는 점이었다. 나무와 수풀을 뜯어 하룻밤 몸을 눕힐 움막 정도는 만들 수 있었으므로.

병사들이 제 한 몸 눕힐 장소와 한 끼 식사를 준비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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