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4화
어떻게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디아에겐 자신이 원하는 길을 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설령 남편인 글렌이라도 그녀를 막아 세울 수는 없다. 그녀의 안위를 걱정한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해도 말이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글렌은 고개를 떨구며 허락의 말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막아 세운다 해도…… 멈출 사람이 아니지, 그대는.”
“잘 아시네요.”
그 말에 나디아가 유쾌한 듯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말인즉 허락한다는 뜻이죠?”
“하아…….”
글렌의 입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신 내가 그대 옆에 있겠다. 일정 거리를 반드시 유지해야 한다.”
“물론이죠. 저라고 또 포로가 되고 싶지는 않거든요.”
나디아의 입에 빙그레 미소가 퍼져 나간다.
이것이 글렌과 그 남자의 차이점이었다. 아무리 불안하더라도 늘 나디아의 의사를 우선하는 그의 태도가 결국 나디아의 마음을 열었다.
자신의 판단을 우선시하는 이지호와 달리, 글렌은 그녀의 판단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손을 가볍게 토닥인 나디아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말했다. 가신들이 있는 방향이었다.
“자, 여러분. 방금 들으신 대로 제가 미끼 역할을 하는 걸로 결정되었습니다. 이제 모두 함께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보도록 해요.”
* * *
“공작님은 건강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합니다. 주치의의 말에 의하면 회복이 어려울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
주군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이지호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공작이 건강을 회복하든 못 하든, 이미 승기가 기울었다는 걸 느끼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상할 만큼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것은 그의 오랜 염원 아니었던가?
시간을 되돌아왔다는 걸 알게 되어서 그런지, 그냥 머리가 텅 빈 것 같았다. 아무런 생각도 하기 싫었다.
“……호 경? 지호 경?”
“응?”
완전히 넋을 놓았더니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말았다.
이지호는 보다 못한 부관이 제 몸에 손을 올린 후에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 대답을 하지 않으셔서…… 몸이 안 좋으십니까?”
“아니, 그냥…… 피곤할 뿐이다.”
대충 둘러댔으나 꽤 들어맞는 말이었다.
온몸이 무겁고 무기력하다. 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모든 것이 피곤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 잠시 눈이라도 붙이는 게 어떠십니까?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그러는 게 좋겠군.”
한숨 자고 일어나면 텅 빈 듯한 기분이 사라질까 싶었다.
그가 부관의 조언에 따라 실내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위, 윈터펠 후작가의 깃발이 보입니다!”
성벽 아래에서 올라온 병사의 외침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갑자기 윈터펠 후작가의 깃발이 나타났다고? 이지호가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자세히 말해 봐라.”
“강 건너편에 윈터펠 후작과 그 기사들이 나타났습니다. 직접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후작 본인이 직접 나타나?”
도발을 하려는 속셈인가?
적진 바로 앞에 등장한 의도가 무엇이든, 그자가 나타났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곧장 병사들을 이끌고 성을 나서야 했다.
성 근처의 강가로 다가가니, 아니나 다를까 윈터펠 후작가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아래에 윈터펠 후작으로 추정되는 자가 서 있었다. 흔한 머리색이 아니었기에 더욱 눈에 띈다.
“저 은색 머리카락은…… 윈터펠 후작 아닙니까?”
“옆에 있는 자는 지스카르 번스타인 경 같군요. 그리고 그 반대편은…… 설마 여자인가?”
“여자? 여자가 왜 이 자리에…….”
다른 이들이 나누는 대화 소리에 이지호는 더욱 눈을 가늘게 떠야 했다.
자세히 보니 그들의 말대로 긴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 보였다. 체구로 보아 여자임이 분명하다.
‘윈터펠 기사단에 여성 기사가 있었던가?’
만일 그랬더라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녀의 정체를 가늠해 보던 이지호의 눈이 충격받은 듯 커다래졌다.
“……!”
긴 갈색 머리. 그리고 윈터펠 후작의 오른편에 서 있을 만한 직위의 여자.
떠오르는 답이라곤 하나뿐이었다.
‘설마, 나디아?’
그 순간 텅 빈 것처럼 허전했던 가슴에 불길이 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목구멍이 조이듯 갈증이 났다.
“설마…… 윈터펠 후작 부인인 것은 아니겠지요?”
그쯤 되니 다른 이들도 그녀의 정체를 짐작한 듯, 나디아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이상하군요. 자기 부인을 왜 이런 자리에 데리고 나온단 말입니까?”
“지호 경,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추격대를 보낼까요?”
“…….”
강 건너편을 바라보는 이지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추격하여 따라잡기에는 조금 먼 거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장에 버젓이 시야 안을 배회하는데 방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 한다?
그가 고삐를 움켜잡은 채 골똘히 고민하는 동안, 강 건너편의 적들은 말머리를 돌려세우고 있었다.
“앗! 돌아갑니다.”
“정말이군.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호 경, 지금이라도 뒤쫓아야 하는 건 아닌지…….”
“이미 늦었다. 지금 추격해 봤자 따라잡지 못할 거다. 움직이지 마라.”
그러잖아도 먼 거리에 있었던 적들이 시야 바깥으로 벗어나는 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텅 빈 강둑을 바라보며, 사람들이 하나둘씩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정말 가 버렸군요. 대체 무슨 속셈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인지…….”
“어쩌면 단순 정찰이었을 수도 있소.”
“그렇다면 부인은 왜 함께 온 겁니까? 이해가 안 됩니다.”
“그, 글쎄. 의외로 공처가라서 바람 좀 쐬고 싶다는 아내 말을 거절하지 못했다든가?”
“그럴 리가. 공사 구분은 잘하는 자인 걸로 아는데…….”
그 외에도 몇 가지 가설이 튀어나왔지만 그럴듯한 답은 없었다. 의문만 더욱 깊어질 뿐이었다.
아니, 개중에서도 정답을 추론해 낸 이가 있긴 했다. 다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뿐.
이지호가 강 건너편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나를 도발하려는 셈인가?’
그렇다면 제대로 된 방법을 찾은 셈이다.
제 약점을 간파당했다는 두려움과 동시에 윈터펠 후작에 대한 한심함 역시 치솟았다.
만일 자신이라면 나디아에게 절대 미끼 역할을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위험한 장소에 있는 것을 허락할 리가 없었다.
나디아가 있을 장소는 안전한 후방이면 충분하다.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위험을 감수하길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무의식적으로 이를 가는 그에게, 부관이 의견을 구했다.
“지호 경,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라져 버렸으니 지금으로선 달리 방도가 없지. 일단 돌아간다.”
“예.”
* * *
아군 진영으로 돌아가는 길. 글렌은 마지막 순간까지 나디아의 마음을 돌리고자 애쓰는 중이었다.
“직접 해 보니 어때? 두렵지는 않던가?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싶다면 얼마든지 그래도 좋아.”
“글렌, 지금 설마 그걸 설득이라고 하는 건 아니죠?”
“…….”
그다지 효과적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마음을 접을 의사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 그녀의 대답에 글렌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정말…… 고집 한번 대단하군.”
“칭찬으로 들을게요. 다음번에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봐요.”
거기다 한술 더 떠서 더 큰 위험을 감수하자는 이야기까지 한다. 글렌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내가 아는 지호 경은 조심성이 많은 자야. 우리가 대놓고 도발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도 남았을 테니, 우리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을 수도 있다. 오늘도 그들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어.”
“그야 오늘은 너무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으니까요. 그러니까 다음번에는 조금 더 그럴듯한 먹이를 던져 보자는 거죠. 게다가…….”
무어라 말을 하려던 나디아가 말끝을 흐린다. 글렌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
“게다가?”
“음…… 아무것도 아녜요.”
“말을 하다 말면 더 궁금해지잖아.”
나디아는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그 사람은 시간을 되돌릴 만큼 내게 집착하고 있으니까.’
-라고 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걸려들지 않으면 말고요. 안 될 것 같다 싶으면 포기해야죠, 뭐.”
“그놈이 부디 이성의 줄을 놓지 않길 바라야겠군.”
적군이 제 예상보다 이성적이고 냉철하길 바라는 것은 또 처음이다.
굳이 위험을 자처하겠다는 아내를 바라보며, 글렌이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 * *
“윈터펠 후작가의 깃발이…… 또 나타났습니다.”
“…….”
이걸로 벌써 네 번째였다. 심지어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슬금슬금 다가오기까지 한다.
마치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강 건너편을 바라보는 이지호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네 번의 도발 모두 나디아가 함께하고 있다. 제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미끼를 내건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는 항상 윈터펠 후작이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이지호의 표정이 종잇조각처럼 일그러졌다.
‘……한심한 자식.’
얼마나 모자라고 한심한 사내면 제 아내를 미끼로 건단 말인가?
자신이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나디아 본인이 스스로 미끼를 자처한다 해도 그녀를 가장 안전한 장소에 꽁꽁 가둬 놓았으리라.
그리고 나디아의 보금자리는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가득 채워 놓을 것이다. 나디아가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에 관심 가지지 않아도 되도록.
그래서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나디아가 왜 저런 남자를 선택했는지, 그 이유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