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3화
나디아는 반듯하게 정리된 침대 위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글렌, 요즘 저를 좀 피하는 것 같던데요?”
“아무래도 최근에 바…….”
“확신하고 왔으니 바빠서 그렇다는 핑계는 대지 마요. 설마 내가 귀찮아요?”
“아, 아니다!”
농담 삼아 한 말이었는데 반응이 격하다. 글렌이 정말 억울하다는 듯 울상을 지었다.
저 반응을 보니…….
‘놀려 주고 싶네.’
저런 반듯한 남자를 놀려먹는다는 건 꽤 즐거운 일이다. 나디아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내가 정말 귀찮은 거 아니죠?”
“그럴 리가 없잖아. 난 단지…….”
글렌이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한다.
“살짝, 민망했을 뿐이다.”
“민망하다? 뭐가요?”
“여러 가지 의미로…….”
“흐음.”
나디아의 눈이 샐쭉해졌다. 표정만 보면 확실히 첫 연애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쑥맥인 것 같긴 하다.
귀엽다. 그래서 더 놀리고 싶다.
그녀가 그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기며 물었다.
“제가 싫어진 건 아니죠?”
“대체 왜 그런 걱정을…….”
“그럼 입 맞춰 주세요.”
“응?”
“아직 저를 좋아한다는 증거를 보여 달라고요. 빨리 입 맞춰 줘요. 네?”
“…….”
글렌이 눈이 커다랗게 뜨인다. 그가 머뭇거리다가 몸을 움직였다.
“그대가 원한다면야…… 못할 것도 없지.”
“어서요.”
그가 침대 옆에 자리 잡자, 옆자리가 살짝 꺼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윽고 오른손이 그녀의 어깨 위로 올라온다.
글렌이 나디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가왔다. 그녀는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 사람…… 대체 왜 키스할 때마다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거야?’
정말 쑥맥인 건지, 아니면 쑥맥인 척하는 고단수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이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이내 부드러운 감촉이 입술에 와 닿는다.
“아.”
그러는 와중에도 글렌은 그녀의 눈을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지고 싶지 않다는 오기에 나디아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두 사람은 입맞춤을 나누었다. 먼저 몸을 뗀 것은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한 나디아였다.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가를 훔친 그녀가, 민망함을 잊기 위해 농담조로 입을 열었다.
“아, 그런데 우리가 이런 대화 나누는 거…… 바깥에 들리진 않았을지 모르겠네요.”
내가 싫어진 거냐느니, 귀찮냐느니, 그렇지 않다면 증거로 입맞춤을 해 달라는 것까지. 모두 남들에게 들려주기엔 부끄러운 대화였다.
하지만 펄쩍 뛸 것이라는 예상 반응과 달리, 글렌의 대답은 매우 무덤덤했다.
“괜한 걱정이야.”
“총사령관이 전장에서 한가하게 연애나 하고 있다고 욕을 먹을지도 모르는데요? 좀 진지하게 생각해 봐요.”
“그런 게 아니라, 막사 주변의 병사들을 물렸거든.”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사람들을 물렸다고요? 대체 언제요?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
“이 안으로 들어올 때부터. 눈짓으로 말했다. 충분히 알아들은 듯하더군.”
“…….”
나디아가 잠시 침묵했다. 막사 주변을 지키는 병사들을 물렸다니. 그 말인즉―
“그럼 이 주변에는 저희 둘뿐이라는 말이네요?”
“그래.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괜찮아.”
“아니…….”
그의 손길이 나디아의 어깨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감각이 느껴지지도 않을 만큼 나디아의 정신은 다른 데에 팔려 있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럼 이 근처에 당신을 호위할 사람이 없다는 거잖아요!”
“……응?”
“여긴 전장이에요! 언제 어디서 위험 요소가 튀어나올지 모른다고요! 그런데 호위를 물리다니, 아무리 우세라고 해도 너무 해이해진 거 아녜요?”
“여, 여기는 우리 진영 한복판이다. 위험요소가 있을 리…….”
“어쩌면 암살자라도 숨어들어 왔을지도 모르죠. 당신은 좀 자기 신분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이네요. 있어 봐요. 내가 사람들을 불러올 테니까.”
그러더니 씩씩한 걸음으로 바깥을 향해 나가 버린다.
커다란 막사 안에 글렌 홀로 남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허…….”
펄럭이는 입구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황망해졌다.
그는 나디아가 떠나갔을 때와 같은 자세로 한참 동안이나 우두커니 앉아 있어야 했다.
* * *
적의 우두머리가 중병에 걸렸다는 정보를 접하고도 가만히 있는다면 그건 머저리들의 집단이라는 말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으리라.
다행히도 북부 연합군은 그런 머저리들의 모임이 아니었다.
발라지트 공작의 건강 상태에 대한 소문은 순식간에 번졌고, 그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혼란이 퍼져 나갔다.
승기가 기운 걸 눈치챈 일부 귀족들이 항복해 올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 한 방이 부족합니다.”
“이대로라면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제대로 된 대승 한 번이면 승패가 결정될 텐데…….”
“대놓고 시간을 끄는 전략을 쓰고 있던데요.”
남부가 오랜 세월 쌓아 놓았던 전력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라, 그들이 버티기에 들어가면 뾰족한 방법이 없어진다.
회의장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끌어내서 한방에 쓸어버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예를 들자면 강물로 쓸어버린다거나?”
“순순히 따라와 줄지도 의문이지만, 건기라서 유량이 부족합니다.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것도 그렇군. 그럼 숲속으로 끌어들여서 불태우는 것은?”
“건기라서 활활 잘 타긴 하겠습니다만…… 순순히 유인될 지가 문제 아니겠습니까? 숲속에 진을 치는 건 금기 중의 금기인데요.”
“하긴…… 아무래도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겠지.”
이대로 반쪽짜리 승리에 만족해야 된단 말인가?
회의장 안의 분위기가 다시 축 처지려는 순간이었다. 줄곧 조용히 있던 이가 입을 열어 말했다.
“그러니까…… 틀어박힌 적을 끌어내서 한 방에 쓸어내고 싶다는 말이죠.”
바로 나디아였다.
보통이라면 안주인이 참여하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그녀가 함께 있는 것에 의문을 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 제 아버지를 대신해서 발라지트 군을 지휘하고 있는 게 누군가요?”
“일단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고 합니다. 에이든 에른스트가 이끄는 병력은 공작령으로 향했고, 지금 저희 앞에 있는 이는 이지호 경이라는군요.”
“아르파드 경이 전사한 이후, 그자가 지휘권을 이어받았다고 합니다.”
“흐음, 역시.”
나디아가 흡족하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그 웃음에 글렌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자라면 제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미리 말하지만 위험한 짓 할 생각은 꿈에도 꾸지 마.”
“별로 안 위험해요. 그냥 미끼 역할만 할 테니까.”
그 말에 글렌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떠야 했다.
“……나디아, 설마 그게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정말이에요. 일단 내 말을 들어봐요.”
사실은 당장이라도 그녀의 입을 다물고 하고 싶었다. 제가 위험을 자처하겠다는 말을 하려는 게 뻔하지 않은가?
하지만 글렌은 그럴 수 없었다. 나디아는 제가 하고픈 말을 하고, 하고픈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를 막아 세웠다가 미움을 사는 일만큼은 절대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이지호 그 사람 말인데요, 지금쯤 저한테 부글부글 끓고 있을걸요. 제 모습만 보면 눈이 뒤집힐 만큼이요. 제가 탈출을 하면서 조금…… 기만책을 썼거든요. 아마 단단히 열 받아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대가 눈앞에 나타나면 앞뒤 가리지 않고 쫓아올 거다?”
“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붙잡고 싶겠죠. 그런 상대가 코앞에 나타나 줬으니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요?”
글렌이 딱 잘라 대답했다.
“안 돼. 너무 위험해.”
“위험하지 않다는 말까지는 못하겠지만, 당신이 상상하는 것만큼 위험하진 않을 거예요.”
“지금 그게 말이 되는……!”
“말을 타고 도망치는 제 뒤로 화살을 쏘지도 못했거든요. 혹시나 제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 그랬겠죠.”
“…….”
마지막 두 문장은 혹시나 공연한 오해를 사기라도 할까 봐, 글렌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표정이 무섭게 굳는다.
“혹시나 해서 말하자면 그 사람에게는 아무 감정도 없어요.”
“알아. 그놈이 일방적으로 그대에게 집착하는 관계라는 거.”
“알고 있다니 다행이네요.”
나디아는 그다음 문장부터 목소리를 키웠다. 회의장 안의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물론 제 모습을 보고도 동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미끼에 낚이지 않을 수도 있고요. 그럼 그때 가서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될 일 아닌가요?”
“…….”
“시도조차 안 해 볼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요.”
“본인이 위험에 빠질 수 있는데도?”
“정 그러면 제 옆에 함께 있어요. 위험에 처할 때 지켜 줄 수 있게.”
“…….”
글렌이 입을 다물자, 회의장 안은 얼음 같은 침묵으로 휩싸였다.
결정은 가주인 글렌이 해야 할 일. 가신들은 그저 입을 다물 뿐이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설마 내가 못미더워서 그대가 나서겠다는 거라면, 조금만 시간을 더 줬으면 해. 그대의 도움 없이 해내겠다.”
“아뇨. 그런 뜻이 아니에요.”
나디아가 그의 손을 붙잡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결판내고 싶어서 그래요.”
“…….”
“제가 정리할 인연이라고 생각하거든요.”
“…….”
“제 뜻대로 하게 해 줘요, 글렌.”